"제승방략(制勝方略)"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XML 가져오기)
 
1번째 줄: 1번째 줄:
  
  
{{개념용어|대표표제=제승방략|한글표제=제승방략|한자표제=制勝方略|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진관체제(鎭管體制), 자전자수(自戰自守),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분야=정치/군사·국방/병법·훈련법|유형=개념용어|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집필자=박재광|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0367|실록연계=}}
+
{{서명사전|대표표제=제승방략|한글표제=제승방략|한자표제=制勝方略|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병서(兵書)|유형=한문|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세종 또는 선조|집필자=성낙수|저편자=김종서, 이일, 이선|간행처=미상|간행년일=1588, 1670(중간)|권책수=2권 1책(98장)|사용활자=목판본|표제=제승방략(制勝方略)|소장처=규장각|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70000365|실록연계=}}
  
유사시에 읍의 수령들이 소속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지정된 방위 지역으로 가서 서울에서 파견된 장수나 그 도의 병·수사를 기다려 지휘를 받는 군사전략.
+
이 책은 조선시대 야인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함경도 8진(鎭)과 이에 소속된 보(堡)의 방수(防戍)를 논한 병서(兵書)다.
  
 
=='''개설'''==
 
=='''개설'''==
  
제승방략(制勝方略)이란 각 진관의 군사 수가 적으니 유사시에는 각 고을의 수령이 그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전투가 벌어지는 거점 지역으로 이동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전문 지휘관의 지휘를 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군사전략이다.
+
이 책은 1588년(선조 21) 3월 당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있었던 이일(李鎰)이 처음으로 찬집하고, 그로부터 90년이 지난 1670년(현종 11) 10월에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이선(李選)이 중간한 서책이다.
  
=='''내용 및 특징'''==
+
‘제승방략’이란 1555년(명종 10) 일어난 을묘왜변(乙卯倭變)을 전후로 해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이르는 약 50년 간 조선 전기 이래 시행되어 온 진관체제의 변형으로 나타난 독특한 방위체제를 가리킨다. 권1의 머리에서 권2의 중반에 걸쳐 열진방어(列鎭防禦)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6진 소속의 여러 진보를 두만강 하류, 즉 경흥의 서수라(西水羅)부터 시작하여 소개하고, 다음에 부령· 종성· 명천·길주 소속의 진보에 이르는 합계 44진보에 대해 차례로 설명한 것이다. 여기에는 각 진보의 형세, 위치, 성곽, 우물, 수호병, 무기, 추·요격처, 봉수 등이 기술되어 있다.
  
조선전기 국방체제의 근간은 진관체제(鎭管體制)였다. 1457년(세조 3)에 확정된 진관체제는 행정조직 단위인 읍(邑)을 동시에 군사조직 단위인 진(鎭)으로 편성해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으로 나누고, 각 읍의 행정관인 수령이 군사지휘관도 겸임하도록 한 제도였다. 한마디로 진관체제는 국방 체제를 전 국토로 확대해 행정조직과 맞물려 일원화한 조치였다. 주진은 최고지휘부이며, 훈련과 방어의 중심은 거진에서 이루어졌다.
+
=='''편찬/발간 경위'''==
  
진관체제의 방어는 각 진관 단위로 자전자수(自戰自守)를 원칙으로 하여 병력을 다른 진관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적침이 있으면 먼저 제1선 진관이 대적하고 해당 진관이 함락되더라도 다른 진관이 계속해서 적과 대적했다. 그래서 다른 진관으로 적이 침입할 때까지 시간을 확보해 적의 진격을 최대한 저지했다.
+
이 책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의 기록에 따르면, 김종서(金宗瑞)가 조선 세종 중엽 이후 이른바 6진 개척에 종사하면서 처음 저술하고, 이를 선조 때에 이일이 증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견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근자에 만들어진 여러 종류의 도서 해제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데 진관체제는 몇 가지 단점이 있었다. 전 국토를 방위 대상에 포함시키다 보니 국가방위에서 전방·후방의 구별이 없었다. 방위체제가 평면적이어서 요충지에 실질적인 방어력을 투입하기 어려웠다. 예컨대, 만약 적이 상습적으로 침입하는 지역이 있다면 군사력을 지역에 집중시켜야 한다. 실제로 왜구 침입이 남해 연안에 집중되면서 지역의 중점 방어가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진관체제에서는 군사를 분산 배치하므로 집중적으로 적을 격퇴하기가 쉽지 않았다.
+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588년(선조 21) 3월 당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있었던 이일이 처음으로 찬집하고, 그 뒤 1670년 10월에 함경북도병마평사이선(李選)중간한 서책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이렇게 잘못 알려진 근본원인은 중간에 부기한 이선의 발문(跋文) 때문인데, 이선이 임진왜란 직전에 시행되고 있었던 우리나라의 특유한 방위체제였던 ‘제승방략’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제승방략’은 세종 대 6진 개척에 종사한 김종서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므로, 김종서의 저작설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 보는 것이다.
  
또 진관체제는 전 국토방위이다 보니 많은 군사가 필요했고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보인(保人)]]을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군역 기피로 16세기 이후 대립제(代立制)가 성행하면서 병력 수가 감소했고 군사들의 전투력도 점점 저하되었다. 더구나 문관이 수령으로 임용된 지방에서는 군사 문제를 잘 알지 못한 사람이 군사지휘권을 겸하므로 국방에 무관심한 결과를 초래했다.
+
권1의 머리에서 권2의 중반에 걸쳐, 열진방어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은 6진 소속의 여러 진보를 두만강 하류, 즉 경흥의 서수라부터 시작하여 소개하고, 다음에 부령· 종성· 명천·길주 소속의 진보에 이르는 합계 44진보에 대해 차례로 설명을 한 것이다.
  
한편 한반도 연해지방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해방정책(海防政策)을 충실히 하면서 왜인들을 회유하는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은 1419년(세종 1) 대마도 정벌이라는 강경책을 쓰는 한편 평화적인 회유책도 마련해 왜구의 요구를 수용했다. 그중 하나가 1426년(세종 8)에 정식으로 세 개 포구를 개항해 왜인들의 교역을 허가한 일이었다. 왜인들의 왕래를 허가한 포구는 동래 부산포, 웅천 내이포 또는 제포, 울산 염포로 흔히 [[삼포(三浦)]]라고 한다.
+
여기에는 각 진보의 형세, 위치, 성곽, 우물, 수호병, 무기, 적로상거(賊路相距), 추·요격처[應變策], 봉수, 수호처, 후망(候望), 번호(藩胡), 고사(故事) 등이 기술되어 있다. 각 진보에 따라서 복병·체탐행영전보(體探行營傳報)·해망(海望) 등이 더 추가된 곳도 있고, 혹은 이중 몇 항이 빠진 진보도 있다. 특히 경흥·경원 등에는 창상곡(倉上穀) 및 군량곡의 남아 있는 양이 기록되어 있다.
  
삼포에서 교역을 끝낸 왜인들은 원칙적으로 곧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상주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여러 폐단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조선은 엄격한 교역 통제책을 쓰면서 이들의 귀환을 재촉했다. 그러자 왜인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마찰도 잦아졌고 마침내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의 발단이 되었다.
+
다음 제2권의 후반부에는 군정(軍政) 29조, 금령(禁令) 27조, 육진대분군(六鎭大分軍), 삼읍분군(三邑分軍), 청행제승방략장(請行制勝方略狀), 비국회관(備局回關), 방량식(放量式)이 수록되어 있다. 청행제승방략장에서 저자가 제승방략을 시행하도록 건의한 이유를 서술했는데, 남방지역에서 을묘왜변 전후부터 행해지던 특유의 방위체제인 제승방략이 북방에서는 행해지지 않고 있어, 문제가 많기 때문에 함경북도에서는 이를 도입·실시하고자 청한 것이었다.
  
삼포왜란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 규모가 커지면서 조선은 왜적의 주요 침입로에 병력을 집중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런 배경에서 새롭게 등장한 방위 전략이 제승방략(制勝方略)이었다. ‘제승’이란 적을 제압해 승리를 거둔다는 뜻이다. 제승방략은 전 국토의 평면적인 군사 배치를 지양하고 여러 진관의 군대를 제일선 방어에 집중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
이러한 건의에 대해 비변사는 답하여 대부분 허락하되, 함경남도 병력이 적의 침입에 앞서, 북도에 미리 분군하는 것만은 불허하고, 대신 함경북도에 변이 발생했을 때 함경남도가 무사할 경우는 언제나 관찰사의 지휘 하에 함경남도군이 즉시 북도로 달려가 구원하도록 조치했다. 그러므로 함경남도는 제외하고, 함경북도 각 관에만 편성한 제승방략이 분군법이었다.
  
예를 들어 남방에 적침이 발생하면 중앙에서 지휘관이 중앙군을 인솔해 내려가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와 나란히 군사를 나누어 갖고 대적했다. 이때 각 도 수령은 소속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미리 배정된 방어지역으로 이동해 진관 단위와 상관없이 주장(主將)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이때 한곳에 집결한 군사를 전시 편제로 새로이 편성해 여러 지휘관 휘하에 소속시키므로 분군법(分軍法)이라고도 한다.
+
이것이 비국회관의 내용이다. 또 6진대분군은 6진 일대에 위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에 대비하여, 6진 이외 함경북도 전 지역의 병력을 집중적으로 6진 지방에 동원하되, 미리 그 직책과 부방장소를 정하여, 익히게 조처하는 것이다. 삼읍분군은 명천 등지의 내륙지방이 위급할 때 동원될 군대의 배치표이며, 6진의 그것과 원리는 비슷하나, 다만 규모가 작을 뿐이다. 방략식은 실제 사변이 발생하여, 군대를 동원했을 때 소요되는 군량수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든 표()이다.
  
요컨대, 제승방략은 각 진관별로 자전자수(自戰自守)하는 진관체제와 달랐다. 유사시에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군사들을 하나의 방어진지에 모아놓고 공동 대처하는 방어 전략이었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때에도 제주목사김수문이 이 전략으로 왜구를 추격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
=='''서지 사항'''==
  
=='''변천'''==
+
2권 1책(98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사주쌍변이고, 반엽광곽은 25.1×19.4cm이다. 10행 22자의 유계, 상하흑어미를 갖추고 있고, 크기는 36.6×23.8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에서는 남쪽 지역뿐만 아니라 북쪽 지역에서도 제승방략에 의한 분군법이 행해졌다. 1583년(선조16) 2월에 여진족이 니탕개의 난[尼湯介亂]을 일으켜 대규모로 조선의 북방을 침략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도체찰사(都體察使)]]와 [[방어사(防禦使)]] 등을 파견해 병사와 함께 지방군을 나누어 지휘하도록 했다.
+
=='''구성/내용'''==
  
니탕개의 난이 있은 뒤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이일(李鎰)은 1588년 3월에 『제승방략』을 펴냈다. 1670년(현종 11) 『제승방략』을 중간하면서 여기에 발문을 쓴 이선(李選)의 말에 따르면 이미 북방에서는 김종서(金宗瑞)가 시행한 제승방략법이 있었다. 이것을 이일이 증보, 정리해 펴낸 책이 『제승방략』이라 한다. 『연려실기술』에도 “『제승방략』은 육진의 방수(防戍)를 논했으며 김종서가 짓고 이일이 증보했다.”고 되어 있다.
+
『제승방략(制勝方略)』은 조선전기 지방의 군사제도였던 진관체제를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서 독특하게 적용하였던 양계(兩界)지역의 군사제도였으나,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제승방략은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그 무력함이 드러난 남부지방의 제승방략이었다. 특히 임진왜란을 통해, 지방의 군사제도가 진관체제로 복귀하면서, 제승방략은 진관체제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김종서가 시행했다는 제승방략법은 현재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북방의 오랑캐를 막는 ‘방략’으로서 유사시에 여러 도의 군사를 대규모로 동원하던 체제로 짐작된다. 1460년에 오랑캐 낭발아한(浪孛兒罕, [낭볼칸])이 침입했을 때에는 북쪽 지역만 아니라 남쪽 지역과 강원도 군사까지 동원한 사례가 있다. 남방 지역에서는 왜구가 주 위협 대상이었기 때문에 소수의 병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적침이 반복되는 곳에 병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하는 방법을 택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1555년 을묘왜변이었다. 1555년 왜구가 7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전라도의 영암·강진·진도 일대를 습격해오자 제주목사김수문이 전라도에 있으면서 처음 분군법(分軍法)을 이용하여 도내의 여러 고을 병력을 [[순변사(巡邊使)]]·[[방어사(防禦使)]]·[[도원수(都元帥)]] 등의 중앙에서 내려온 장수들과 본도의 병사 및 수사에게 나누어 소속시켜 왜구를 성공적으로 격퇴시킬 수 있었다.
+
이 책은 조선 초기 김종서가 저술한 것을 1588년(선조 21)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이일이 다시 시의(時宜)에 맞게 정리, 증수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 성과에 따르면, 김종서의 저작설은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제승방략』은 1670년(현종 11)에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이선(李選)이 중간한 것이다.
  
이후 1583년 1월에 니탕개와 율보리(栗甫里)가 조선의 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당시 전라도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일은 그해 4월에 경원부사로 임명되면서 함경도와 인연을 맺었다. 그 후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이일은 “적로의 형세, 부락의 다소, 산천의 험악과 평탄, 도로의 멀고 가까움, 성을 지키는 절차, 적을 추격하고 요격하는 등의 일”을 틈나는 대로 현지 조사하고 여러 조건을 참작해 『제승방략』을 출간했다.
+
내용은 권1과 권2의 상반까지에는 도내 각 진()의 위치와 산천의 형세, 노정(路程)의 원근, 성보(城堡)의 배치, 행군(行軍)의 절목(節目) 등이 자세하게 기술되었다. 그리고 각 진보(鎭堡)에서 일어났던 야인의 침범사건을 고사(故事)로 취급하고 있어, 전에 어떠한 사건이 있었던가를 밝히고 있다. 또 적침에 대비한 응변책(應變策)·봉수(烽燧)·복병(伏兵)·체탐(體探)·망해(望海) 등의 배치를 열거하고 향화야인(向化野人)부락의 위치와 추장·호수(戶數) 등도 부기하였다.
  
이일이 완성한 『제승방략』은 유사시에 북도의 병마절도사를 중심으로 도내의 전체 병력을 동원하는 체제였다. 남방의 제승방략이 중앙에서 파견한 경장(京將)이 중심이 되었다면, 북방의 제승방략은 현지 병마절도사가 중심이 되어 군사를 통솔했다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양자 모두 군사력의 피폐와 지휘관의 비전문성으로 인해 진관체제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전문 지휘관을 중심으로 남아 있는 병력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는 공통점을 띤다.
+
권2 끝 부분은 속록(續錄)의 형태로 국경 수비의 군무(軍務) 29조, 금령(禁令) 27조, 육진 군관의 관명(六鎭大分軍) 등을 수록하였다. 끝으로 이일의 ‘청행제승방략장(請行制勝方略狀)’과 이에 대한 조정의 회답인 ‘비국회관(備局回關), 그리고 ‘보순영(報巡營)’·‘방량식(放糧式)’과 이선의 발(跋)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진관체제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승방략도 임진왜란이라는 전면전이 발생하자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다. 가장 큰 문제는 제승방략법이 변방의 국지전을 대비하는 방어체제의 성격이 강하다 보니 전면전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군사력을 제1 방어선에 집중 투입하다 보니 제일선이 무너지면 후방의 제2, 제3 방어선을 형성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인근 지역이 빠르게 함락되었다.
+
이 책은 조선 중기에 실시된 함경도 지역의 제승방략이라는 군사체제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고, 당시의 국경방어태세 및 군사제도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 적이 급박하게 진격하는 상황에서 중앙에서 적시에 지휘관을 파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결과 지휘관이 도착하기 전에 적이 침입하면 집결한 군사는 지휘관이 없는 오합지졸이 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중앙에서 파견한 지휘관과 지방의 지휘관이 뒤엉켜 명령 계통이 통일되지 못하는 혼선을 빚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몇 해 전에 유성룡은 제승방략은 반드시 패배할 방책이라고 하면서 선조에게 진관체제의 복귀를 주장했다.
+
=='''의의와 평가'''==
  
유성룡이 지적한 제승방략의 폐단은 임진왜란 초기 상주 지역 함락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1592년(선조 25) 4월 17일에 조정에서는 이일에게 중도에서 일본군을 막아내라는 임무를 맡겼다. 명령을 받은 이일은 19일에 도성을 출발했다. 당시 경상감사김수(金晬)는 적침 보고를 받고 즉시 제승방략에 의거해 각 고을 수령에게 통첩을 보내 소속 군사를 이끌고 약속 장소에 집합하도록 했다. 이 지령에 따라 문경 이하의 수령들은 군사를 인솔해 대구로 달려와 냇가에 노숙하면서 [[순변사(巡邊使)]]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적의 선봉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많은 군사가 놀라 동요해 흩어졌고 수령들도 도망쳤다.
+
이 책은 선조 때의 야인에 대처한 조선시대의 비변책(備邊策)은 물론 두만강 주변의 야인부락 사정도 잘 살필 수 있으며, 연산군 이래의 주요 고사도 알 수 있어 여진관계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도성을 출발한 이일이 조령을 넘어 문경에 도착한 날은 23일이었다. 이일이 도착해보니 이미 고을이 텅 빈 상태였다. 이일은 인솔해온 군사를 먹인 후 행군을 계속해 상주에 도착했으나 상주목사김해(金澥)마저 달아난 상태였다. 이일은 24일 하루 동안 부근의 백성 수백여 명을 모아 대오를 편성하고 25일 아침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때 일본군이 훈련 중인 이일의 군대를 급습했다. 이일은 일본군이 선산에 주둔한 상황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급습을 당했다. 대부분 농민들로 구성된 이일의 군대는 대항조차 제대로 못 해본 채 궤멸했다. 이일은 단신으로 겨우 탈출해 문경에서 패전 보고를 올리고 그대로 조령을 넘어 충주에서 [[신립(申砬)]] 군대와 합류했다.
 
 
 
18세기 군사전문가 송규빈(宋奎斌)도 왜란 당시 운용된 제승방략의 결함을 신랄하게 지적했는데, 실패한 책임이 ‘제(制)’에 있지 ‘병(兵)’에 있지 않다는 지적은 의미 있다고 하겠다.
 
 
 
=='''의의'''==
 
 
 
조선의 국토방위전략은 진관체제를 근간으로 하여 대내외적 상황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 진관체제를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제승방략 역시 비판이 쏟아지면서 이를 대처하는 또 다른 방어체제가 등장했다. 새로운 방위전략이 나오면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에 따라 새로운 병서도 간행했다. 이는 전략·전술의 원칙이나 실제적인 운용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체계화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제승방략은 시대의 흐름을 고려하여 전문 지휘관을 중심으로 병력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
*강성문, 『임진왜란 초기육전과 방어전술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최창국, 「15~16세기 咸吉道 지역 軍事體制 "制勝方略" 연구」, 국방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제승방략(制勝方略)』     
+
*최창국, 「조선전기 북방 양계지역 ≪제승방략(制勝方略)≫의 실체와 현대적 함의」, 대한민국 육군, 2013.       
*『풍천유향(風泉遺響)』     
+
*허선도, 「「制勝方略」 硏究」, 『진단학보』 제36호, 진단학회, 1973.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론 7 - 조선전기 국방체제의 제문제』, 1981.     
+
*허선도, 「壬辰倭亂에 대한 새로운 理解-制勝方略(防衛體制)를 中心으로-, 대명고시연구회, 1974.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론 9 - 조선후기 국방체제의 제문제』, 1981.       
 
*김우철, 『조선후기 지방군제사』, 경인문화사, 2000.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 혜안, 1999.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한국군제사』, 육군본부, 1968.     
 
*장학근, 『조선시대 군사전략』,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6.     
 
*정해은, 『조선후기 국토방위전략』,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2.     
 
*정해은, 『한국 전통병서의 이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     
 
*차문섭, 『조선시대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천관우, 『근세조선사연구』, 일조각, 1979.     
 
*김구진·이현숙, 「해제-『제승방략』의 북방 방어 체제」, 『국역 제승방략』,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     
 
*서태원, 「조선전기 有事時 지방군의 지휘체계-중앙군사지휘관의 파견과 관련하여」, 『사학연구』63, 한국사학회, 2001.     
 
*許善道, 「制勝方略硏究()-壬辰倭亂 直前 防衛體制의 實相」, 『震檀學報』36, 진단학회, 1974.       
 
 
 
=='''관계망'''==
 
<html><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10367"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html>
 
  
[[분류:정치]][[분류:군사·국방]][[분류:병법·훈련법]][[분류:개념용어]][[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
+
[[분류:병서(兵書)]][[분류:한문]][[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세종 또는 선조]]

2018년 1월 8일 (월) 15:49 기준 최신판



이 책은 조선시대 야인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함경도 8진(鎭)과 이에 소속된 각 보(堡)의 방수(防戍)를 논한 병서(兵書)다.

개설

이 책은 1588년(선조 21) 3월 당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있었던 이일(李鎰)이 처음으로 찬집하고, 그로부터 90년이 지난 1670년(현종 11) 10월에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이선(李選)이 중간한 서책이다.

‘제승방략’이란 1555년(명종 10) 일어난 을묘왜변(乙卯倭變)을 전후로 해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이르는 약 50년 간 조선 전기 이래 시행되어 온 진관체제의 변형으로 나타난 독특한 방위체제를 가리킨다. 권1의 머리에서 권2의 중반에 걸쳐 열진방어(列鎭防禦)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6진 소속의 여러 진보를 두만강 하류, 즉 경흥의 서수라(西水羅)부터 시작하여 소개하고, 다음에 부령· 종성· 명천·길주 소속의 진보에 이르는 합계 44진보에 대해 차례로 설명한 것이다. 여기에는 각 진보의 형세, 위치, 성곽, 우물, 수호병, 무기, 추·요격처, 봉수 등이 기술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의 기록에 따르면, 김종서(金宗瑞)가 조선 세종 중엽 이후 이른바 6진 개척에 종사하면서 처음 저술하고, 이를 선조 때에 이일이 증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견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근자에 만들어진 여러 종류의 도서 해제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588년(선조 21) 3월 당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있었던 이일이 처음으로 찬집하고, 그 뒤 1670년 10월에 함경북도병마평사이선(李選)이 중간한 서책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이렇게 잘못 알려진 근본원인은 중간에 부기한 이선의 발문(跋文) 때문인데, 이선이 임진왜란 직전에 시행되고 있었던 우리나라의 특유한 방위체제였던 ‘제승방략’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제승방략’은 세종 대 6진 개척에 종사한 김종서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므로, 김종서의 저작설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 보는 것이다.

권1의 머리에서 권2의 중반에 걸쳐, 열진방어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은 6진 소속의 여러 진보를 두만강 하류, 즉 경흥의 서수라부터 시작하여 소개하고, 다음에 부령· 종성· 명천·길주 소속의 진보에 이르는 합계 44진보에 대해 차례로 설명을 한 것이다.

여기에는 각 진보의 형세, 위치, 성곽, 우물, 수호병, 무기, 적로상거(賊路相距), 추·요격처[應變策], 봉수, 수호처, 후망(候望), 번호(藩胡), 고사(故事) 등이 기술되어 있다. 각 진보에 따라서 복병·체탐행영전보(體探行營傳報)·해망(海望) 등이 더 추가된 곳도 있고, 혹은 이중 몇 항이 빠진 진보도 있다. 특히 경흥·경원 등에는 창상곡(倉上穀) 및 군량곡의 남아 있는 양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 제2권의 후반부에는 군정(軍政) 29조, 금령(禁令) 27조, 육진대분군(六鎭大分軍), 삼읍분군(三邑分軍), 청행제승방략장(請行制勝方略狀), 비국회관(備局回關), 방량식(放量式)이 수록되어 있다. 청행제승방략장에서 저자가 제승방략을 시행하도록 건의한 이유를 서술했는데, 남방지역에서 을묘왜변 전후부터 행해지던 특유의 방위체제인 제승방략이 북방에서는 행해지지 않고 있어, 문제가 많기 때문에 함경북도에서는 이를 도입·실시하고자 청한 것이었다.

이러한 건의에 대해 비변사는 답하여 대부분 허락하되, 함경남도 병력이 적의 침입에 앞서, 북도에 미리 분군하는 것만은 불허하고, 대신 함경북도에 변이 발생했을 때 함경남도가 무사할 경우는 언제나 관찰사의 지휘 하에 함경남도군이 즉시 북도로 달려가 구원하도록 조치했다. 그러므로 함경남도는 제외하고, 함경북도 각 관에만 편성한 제승방략이 분군법이었다.

이것이 비국회관의 내용이다. 또 6진대분군은 6진 일대에 위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에 대비하여, 6진 이외 함경북도 전 지역의 병력을 집중적으로 6진 지방에 동원하되, 미리 그 직책과 부방장소를 정하여, 익히게 조처하는 것이다. 삼읍분군은 명천 등지의 내륙지방이 위급할 때 동원될 군대의 배치표이며, 6진의 그것과 원리는 비슷하나, 다만 규모가 작을 뿐이다. 방략식은 실제 사변이 발생하여, 군대를 동원했을 때 소요되는 군량수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든 표(表)이다.

서지 사항

2권 1책(98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사주쌍변이고, 반엽광곽은 25.1×19.4cm이다. 10행 22자의 유계, 상하흑어미를 갖추고 있고, 크기는 36.6×23.8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제승방략(制勝方略)』은 조선전기 지방의 군사제도였던 진관체제를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서 독특하게 적용하였던 양계(兩界)지역의 군사제도였으나,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제승방략은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그 무력함이 드러난 남부지방의 제승방략이었다. 특히 임진왜란을 통해, 지방의 군사제도가 진관체제로 복귀하면서, 제승방략은 진관체제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이 책은 조선 초기 김종서가 저술한 것을 1588년(선조 21)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이일이 다시 시의(時宜)에 맞게 정리, 증수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 성과에 따르면, 김종서의 저작설은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제승방략』은 1670년(현종 11)에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이선(李選)이 중간한 것이다.

내용은 권1과 권2의 상반까지에는 도내 각 진(鎭)의 위치와 산천의 형세, 노정(路程)의 원근, 성보(城堡)의 배치, 행군(行軍)의 절목(節目) 등이 자세하게 기술되었다. 그리고 각 진보(鎭堡)에서 일어났던 야인의 침범사건을 고사(故事)로 취급하고 있어, 전에 어떠한 사건이 있었던가를 밝히고 있다. 또 적침에 대비한 응변책(應變策)·봉수(烽燧)·복병(伏兵)·체탐(體探)·망해(望海) 등의 배치를 열거하고 향화야인(向化野人)부락의 위치와 추장·호수(戶數) 등도 부기하였다.

권2 끝 부분은 속록(續錄)의 형태로 국경 수비의 군무(軍務) 29조, 금령(禁令) 27조, 육진 군관의 관명(六鎭大分軍) 등을 수록하였다. 끝으로 이일의 ‘청행제승방략장(請行制勝方略狀)’과 이에 대한 조정의 회답인 ‘비국회관(備局回關)’, 그리고 ‘보순영(報巡營)’·‘방량식(放糧式)’과 이선의 발(跋)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조선 중기에 실시된 함경도 지역의 제승방략이라는 군사체제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고, 당시의 국경방어태세 및 군사제도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선조 때의 야인에 대처한 조선시대의 비변책(備邊策)은 물론 두만강 주변의 야인부락 사정도 잘 살필 수 있으며, 연산군 이래의 주요 고사도 알 수 있어 여진관계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 강성문, 『임진왜란 초기육전과 방어전술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 최창국, 「15~16세기 咸吉道 지역 軍事體制 "制勝方略" 연구」, 국방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 최창국, 「조선전기 북방 양계지역 ≪제승방략(制勝方略)≫의 실체와 현대적 함의」, 대한민국 육군, 2013.
  • 허선도, 「「制勝方略」 硏究」, 『진단학보』 제36호, 진단학회, 1973.
  • 허선도, 「壬辰倭亂에 대한 새로운 理解-制勝方略(防衛體制)를 中心으로-」, 대명고시연구회,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