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민씨(淑儀閔氏)"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XML 가져오기)
 
1번째 줄: 1번째 줄:
  
  
{{인명사전|대표표제=숙의민씨|한글표제=숙의민씨|한자표제=淑儀閔氏|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왕족/후궁|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성종~중종|집필자=홍연주|자=|호=|봉작=숙의(淑儀)|시호=|출신=왕족|성별=여자|출생=|사망=|본관=여흥(驪興)|주거지=서울|묘소소재지=|증조부=민징원(閔澄源)|조부=민형(閔亨)|부=민효손(閔孝孫)|모_외조=파평 윤씨(坡平尹氏) : 윤지강(尹之崗)의 딸|형제=(남형제)민세군(閔世球), 민세추(閔世추), 민세거(閔世琚), 민세감(閔世瑊), 민세원(閔世瑗) (여동생)이윤원(李允元)의 처|처_장인=(남편)연산군(燕山君) →무후|자녀=|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383|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06022_002 『연산군일기』 9년 6월 22일],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007026_002 『연산군일기』 10년 7월 26일],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008005_008 『연산군일기』 10년 8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201011_009 『연산군일기』 12년 1월 11일]}}
+
{{인명사전|대표표제=숙의민씨|한글표제=숙의민씨|한자표제=淑儀閔氏|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왕족/후궁|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성종~중종|집필자=홍연주|자=|호=|봉작=숙의(淑儀)|시호=|출신=왕족|성별=여자|출생=|사망=|본관=여흥(驪興)|주거지=서울|묘소소재지=|증조부=민징원(閔澄源)|조부=민형(閔亨)|부=민효손(閔孝孫)|모_외조=파평 윤씨(坡平尹氏) : 윤지강(尹之崗)의 딸|형제=(남형제)민세군(閔世球), 민세추(閔世추), 민세거(閔世琚), 민세감(閔世瑊), 민세원(閔世瑗) (여동생)이윤원(李允元)의 처|처_장인=(남편)연산군(燕山君) →무후|자녀=|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383|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06022_002 『연산군일기』 9년 6월 22일],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007026_002 『연산군일기』 10년 7월 26일],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008005_008 『연산군일기』 10년 8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201011_009 『연산군일기』 12년 1월 11일]}}
  
 
=='''총론'''==
 
=='''총론'''==

2018년 1월 9일 (화) 22:46 기준 최신판




총론

[?~? = ?]. 조선의 10대 왕인 연산군(燕山君)의 후궁.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형조 참의(參議)민효손(閔孝孫)이며, 어머니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윤지강(尹之崗)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를 지낸 민형(閔亨)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한성참군(漢城參軍)을 지낸 민징원(閔澄源)이다.

연산군의 후궁

민숙의(閔淑儀)가 언제 연산군의 후궁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록에 따르면 민숙의의 외숙이었던 윤금손(尹金孫)이 1503년 가선(嘉善)으로 승진한 것에 대해 사간원(司諫院)이 부당함을 호소하였다는 것으로 보아,(『연산군일기』 9년 6월 22일) 늦어도 민숙의가 1503년(연산군 9) 전에는 후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연산군은 1504년(연산군 10) 민숙의의 집값으로 면포 2,900필을 지급하라고 명하였고,(『연산군일기』 10년 7월 26일) 민숙의의 집을 철거한 대가로 봉안군(鳳安君)의 집을 주라고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8월 5일) 또한 1506년(연산군 12)에는 민숙의의 집이 금표 안에 들었으니 이해(李偕)가 속공(屬公)한 집을 주라고 지시하였다.(『연산군일기』 12년 1월 11일) 외숙의 승진 및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민숙의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민숙의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는다.

묘소와 후손

민숙의의 묘소는 알려지지 않는다.

민숙의는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이미선, 「조선시대 후궁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지두환, 『연산군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