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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흥국사(남양주)]] |
− | | + | *[[흥국사(개성)]] |
− | {{개념용어|대표표제=흥국사|한글표제=흥국사|한자표제=興國寺|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덕절[德寺], 덕사(德寺), 수락사(水落寺), 흥덕사(興德寺)|관련어=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오규정소(五糾正所), 원당(願堂)|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집필자=윤기엽|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6789|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sa_10802025_002 『숙종실록』 8년 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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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조의 부친 덕흥대원군의 원당이었던, 경기도 수락산의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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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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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국사(興國寺)는 경기도 남양주시수락산(水落山)에 있는 절이다. 신라 때 원광(圓光)이 창건한 수락사(水落寺)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조선시대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원당(願堂)으로 지정되며 흥덕사(興德寺)라 하였고, 민간에서는 덕절[德寺]이라고 했다. 인조 때 절을 중건하고 이름을 흥국사(興國寺)라 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정조 때 흥국사는 승려의 감독기관인 오규정소(五糾正所)로 지정되며 발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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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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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국사는 창건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조선초기까지 절의 연혁을 확인할 만한 기록이 없다. 다만 조선초의 문신 서거정(徐居正)이 이 절을 유람하면서 지은 「수락사」라는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양주목(楊州牧) 불우(佛宇)조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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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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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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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조는 왕위에 오른 다음 해인 1568년(선조 1)에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묘(墓)를 수락사의 남쪽으로 이장하였다. 선조는 부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묘 가까이에 있는 수락사를 크게 복원하여 원당으로 삼고 흥덕사(興德寺)란 이름의 편액을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민간에서는 흥덕사를 덕절이라 불렀다. 박한영(朴漢永)은 「흥국사기적비」에서 선조 원년에 덕흥대원군의 무덤 때문에 칙명으로 행향원당(行香願堂)을 삼고 흥덕사라 사액하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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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26년(인조 4)에 절을 중건하고 현재의 이름인 흥국사(興國寺)로 고쳤다. 하지만 이름이 바뀐 후에도 여전히 덕절 내지 덕사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실록』에서도 흥국사는 덕사(德寺)라는 명칭으로 등장하는데, 1682년(숙종 8) 영운령(靈雲令) 이의천(李義天)과 운흥수(雲興守) 이절(李梲)이 덕사(德寺)에서 술 취해 소란을 피워 파직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0802025_002 『숙종실록』 8년 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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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국사는 1790년(정조 14) 봉은사(奉恩寺), 봉선사(奉先寺), 용주사(龍珠寺), 백련사(白蓮寺) 등과 함께 오규정소(五糾正所) 가운데 한 사찰로 선정되었다. 오규정소는 조선시대의 승려 감독기관으로 중기 이후 승려의 기강을 바로잡고, 승풍(僧風)을 규찰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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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93년(정조 17) 왕실의 시주를 받아 기허(騎虛)가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1818년(순조 18) 요사채 대부분이 소실된 것을 4년 후에 왕명에 따라 기허가 대웅전과 법당 등을 중건했다. 1856년(철종 7) 은봉(隱峰)이 육면각(六面閣)을 중수하고 단청하였으며, 1870년(고종 7) 시왕전[十王殿]을 중수하였다. 1878년(고종 15)에 소실된 절을 용암(庸庵)이 중건하였다. 1888년 제암(濟庵)이 시주금을 모아 영산전(靈山殿)을 건립하였고, 요사채를 중수하여 단청불사를 하였다. 이후 신도 강재희의 시주로 각 법당의 기와를 교체하였고, 대웅전 3존상의 개금불사를 했다. 1917년에는 주지 박범화(朴梵華) 스님이 각 전각을 중수하였는데, 그는 1938년 임종시에 양주와 고성의 전답 33,643평을 사중에 기부하여 사세를 확장하도록 하였다. 1940년에는 주지 한월우경(漢月宇炅)과 화주 진우종호(振宇鐘浩)가 만일회(萬日會) 정토법문(淨土法門)을 개설하고 정재를 모아 각 전각을 수리하고 사내 사실(私室)을 모두 공유화(公有化)하여 사세를 확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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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국사는 근세 화승(畵僧)들의 본거지로 이름나, "덕절 중은 불 때면서 불막대로 시왕초를 그리고, 화계 중은 불 때면서 초할향(初喝香)을 한다."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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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근현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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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시기인 1917년에 주지 범화(梵華)가 전각과 요사채를 중수하고, 기와를 교체하고 단청을 하였다. 절 경내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인 팔작지붕의 대웅전과 영산전(靈山殿), 만월보전(滿月寶殿), 독성전(獨聖殿), 시왕전, 산신전(山神殿)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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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흥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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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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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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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朴漢永, 「수락산흥국사기적비(水落山興國寺紀績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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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완수, 『명찰순례』3, 대원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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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형우 외, 『한국의 사찰』, 대한불교진흥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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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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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문화]][[분류:종교]][[분류:불교]][[분류:개념용어]][[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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