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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대표표제=경모전|한글표제=경모전|한자표제=敬慕殿|대역어=|상위어=혼전(魂殿)|하위어=|동의어=|관련어=효종(孝宗)|분야=왕실/왕실의례/흉례|유형=개념용어|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집필자=이현진|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5604|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qa_11005009_002 『효종실록』 10년 5월 9일], [http://sillok.history.go.kr/id/kra_10110029_001 『현종실록』 즉위년 10월 29일],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110029_001 『현종개수실록』 즉위년 10월 29일],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112001_001 『현종개수실록』 즉위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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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대표표제=경모전|한글표제=경모전|한자표제=敬慕殿|대역어=|상위어=혼전(魂殿)|하위어=|동의어=|관련어=인순왕후(仁順王后)|분야=왕실/왕실의례/흉례|유형=개념용어|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집필자=이현진|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5592|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na_10801011_001 『선조실록』 8년 1월 1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b_10804028_001 『선조수정실록』 8년 4월 28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0801010_004 『선조실록』 8년 1월 10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1003012_001 『선조실록』 10년 3월 12일]}}
  
경덕궁에 있던 효종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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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에 있던 명종의 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달랐다. 왕은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대체로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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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달랐다. 왕과 왕보다 나중에 승하한 왕후는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경모전은 조선의 제17대 왕인 효종의 혼전이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1659년(효종 10)에 효종이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경모(敬慕)’로 정하고([http://sillok.history.go.kr/id/kqa_11005009_002 『효종실록』 10년 5월 9일]), 6개월 영릉(寧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 정전 제10실에 부묘할 때까지 경모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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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후는 3년상이 아닌 1년상인 기년상(期年喪)으로 치러져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냈다.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담제가 끝난 후에도 왕후의 신주는 혼전에 남아 있었다. 왕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친 후 함께 부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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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모전은 명종의 비 인순왕후의 혼전이다. 인순왕후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심강(沈鋼)의 딸이다. 인순왕후는 왕보다 나중에 승하한 왕후에 해당하였다. 1575년(선조 8)에 인순왕후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경모(敬慕)’로 정하고([http://sillok.history.go.kr/id/kna_10801011_001 『선조실록』 8년 1월 11일]), 4개월 강릉(康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의 명종 신실(神室)에 부묘할 때까지 경모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1659년 5월 4일 효종이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하자 창덕궁의 선정전(宣政殿)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6개월 뒤 10월에 영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ra_10110029_001 『현종실록』 즉위년 10월 29일])([http://sillok.history.go.kr/id/krb_10110029_001 『현종개수실록』 즉위년 10월 29일]). 이때 창경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경모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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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년(선조 8) 1월 2일 인순왕후가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에서 승하하자 그곳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4월에 강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이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해 둔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0804028_001 『선조수정실록』 8년 4월 28일]). 이때 창경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경모전이다.
 
 
효종의 혼전은 처음에 창경궁의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에 설치하였다. 혼전에서 졸곡제(卒哭祭)를 지낸 뒤 후원(後苑)에 천둥이 치고 궁중에 귀변(鬼變)이 발생하여 현종이 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혼전을 계상당(啓祥堂)으로 옮겼다([http://sillok.history.go.kr/id/krb_10112001_001 『현종개수실록』 즉위년 12월 1일]). 계상당이 효종의 혼전으로 최종 정해졌으며, 이때 전랑(前廊)을 조성하였다. 문정전에서 계상당으로 혼전의 전각은 바뀌었으나 혼전명은 그대로 경모전이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경모전이 창덕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경모전은 효종을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경모전에서 거행한 의식은 일반적으로 혼전에서 거행하는 의식과 같은 절차를 밟았다. 경모전에 반우한 날 지낸 초우제(初虞祭)를 시작으로 칠우제(七虞祭)까지 우제를 모두 지낸 뒤 졸곡제를 거쳐 연제(練祭), 대상제(大祥祭), 담제(禫祭)를 거행하였다. 그 밖에 조석상식(朝夕上食), 사시(四時) 및 납(臘) 제사, 속절(俗節) 및 삭망(朔望) 제사를 경모전에서 지냈다. 사시는 춘·하·추·동, 납일은 동지(冬至) 후 세 번째 미일(未日), 속절은 정조(正朝)·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동지, 삭망은 초하루와 보름을 말한다. 또 경모전에서 주다례(晝茶禮)를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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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순왕후의 혼전은 창경궁의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에 설치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0801010_004 『선조실록』 8년 1월 10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도 창경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혼전에서 거행한 의식 중에서 중요한 것은 중국에서 내린 제사와 시호를 받고 분황(焚黃)하는 의식을 행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조대에는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중원의 주인이 바뀌면서 청나라에서 조선왕실의 국상에 사신을 파견하여 혼전에서 ‘조제(弔祭)’를 거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효종의 국상에서도 혼전에서 ‘조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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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순왕후의 국장(國葬)과 관련하여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명종의 능인 강릉에 부장(祔葬)한 뒤 우주(虞主)를 경모전에 봉안한 기록은 있지만 우제(虞祭)를 지낸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우주는 뽕나무로 만들며, 장지(葬地)에서 신주에 글을 써서 연제 때까지 혼전에 봉안한 뒤 종묘(廟)의 북쪽 계단 사이[階間]에 매안하는 신주이다.
  
1661년(현종 2) 7월 8일 효종의 신주를 경모전에서 옮겨 태묘(太廟)에 부묘하였다. 『춘관통고(春官通考)』에 효종의 부묘 날짜를 두고 『국조보감(國朝寶鑑)』의 기록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효종이 돌아가신 날짜와 담제를 지낸 시기를 고려하여 7월 8일에 부묘한 것으로 추정한다. 『현종개수실록』과 『종묘의궤(宗廟儀軌)』에도 7월 8일에 부묘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현종실록』에는 7월 7일에 부묘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날은 경모전에서 고동가제(告動駕祭)를 행한 날이었다. 고동가제를 행한 다음 날에 부묘례를 거행한다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기사를 고려하면 7월 8일에 부묘하였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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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경모전에서 졸곡제(卒哭祭)·연제·대상제(大祥祭)를 지냈으며, 담제는 섭행(攝行)하고, 부제(祔祭)는 친행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1003012_001 『선조실록』 10년 3월 12일]). 아침 상식(上食)과 별다례(別茶禮), 동향대제(冬享大祭)를 경모전에서 행한 기록은 있으나, 이를 제외한 신주와 위판(位版)에 글을 쓰는 절차 등을 거행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따라서 경모전은 효종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659년(현종 즉위) 10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는 창경궁의 문정전에, 1659년 12월 1일부터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661년 7월 8일까지는 경덕궁의 계상당에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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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7년(선조 10) 3월 12일에 인순왕후의 신주를 경모전에서 옮겨 와서 태묘(太廟)에 부묘하였다. 이때의 신주는 연제 때 마련한 연주(練主)이다. 연주는 밤나무로 만들며, 혼전에서 신주에 글을 써서 담제를 지나 최종 종묘에 봉안하는 신주이다. 따라서 경모전은 인순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575년 4월 28일부터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577년 3월 12일까지 창경궁의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변천'''==
  
경녕전이었던 경덕궁의 전각은 고종대까지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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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문정전은 이후에도 왕이나 왕후의 혼전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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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효종국장도감의궤(孝宗國葬都監儀軌)』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종묘의궤(宗廟儀軌)』       
 
*『종묘의궤(宗廟儀軌)』       
*『통문관지(通文館志)』     
 
 
*『춘관통고(春官通考)』       
 
*『춘관통고(春官通考)』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관계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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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2 판



창경궁에 있던 명종의 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달랐다. 왕과 왕보다 나중에 승하한 왕후는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반면,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후는 3년상이 아닌 1년상인 기년상(期年喪)으로 치러져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냈다.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담제가 끝난 후에도 왕후의 신주는 혼전에 남아 있었다. 왕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친 후 함께 부묘하였다.

경모전은 명종의 비 인순왕후의 혼전이다. 인순왕후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심강(沈鋼)의 딸이다. 인순왕후는 왕보다 나중에 승하한 왕후에 해당하였다. 1575년(선조 8)에 인순왕후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경모(敬慕)’로 정하고(『선조실록』 8년 1월 11일), 4개월 뒤 강릉(康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의 명종 신실(神室)에 부묘할 때까지 경모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575년(선조 8) 1월 2일 인순왕후가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에서 승하하자 그곳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4월에 강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이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해 둔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선조수정실록』 8년 4월 28일). 이때 창경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경모전이다.

인순왕후의 혼전은 창경궁의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에 설치되었다(『선조실록』 8년 1월 10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도 창경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인순왕후의 국장(國葬)과 관련하여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명종의 능인 강릉에 부장(祔葬)한 뒤 우주(虞主)를 경모전에 봉안한 기록은 있지만 우제(虞祭)를 지낸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우주는 뽕나무로 만들며, 장지(葬地)에서 신주에 글을 써서 연제 때까지 혼전에 봉안한 뒤 종묘(廟)의 북쪽 계단 사이[階間]에 매안하는 신주이다.

선조는 경모전에서 졸곡제(卒哭祭)·연제·대상제(大祥祭)를 지냈으며, 담제는 섭행(攝行)하고, 부제(祔祭)는 친행하였다(『선조실록』 10년 3월 12일). 아침 상식(上食)과 별다례(別茶禮), 동향대제(冬享大祭)를 경모전에서 행한 기록은 있으나, 이를 제외한 신주와 위판(位版)에 글을 쓰는 절차 등을 거행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1577년(선조 10) 3월 12일에 인순왕후의 신주를 경모전에서 옮겨 와서 태묘(太廟)에 부묘하였다. 이때의 신주는 연제 때 마련한 연주(練主)이다. 연주는 밤나무로 만들며, 혼전에서 신주에 글을 써서 담제를 지나 최종 종묘에 봉안하는 신주이다. 따라서 경모전은 인순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575년 4월 28일부터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577년 3월 12일까지 창경궁의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창경궁의 문정전은 이후에도 왕이나 왕후의 혼전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 『종묘의궤(宗廟儀軌)』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