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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향산군묘향산 보현사의 산내 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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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있었던 파주보광사의 산내 암자.
  
 
=='''개설'''==
 
=='''개설'''==
  
금강암(金剛庵)은 묘향산 보현사의 산내 암자로서 금강굴(金剛窟)이라고도 불렸다. 창건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중기 서산 대사 청허휴정이 주석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고 바위굴을 이용해 지붕을 이어 만든 건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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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암(金剛庵)은 조선시대 고령사(高嶺寺)의 산내 암자였다. 고령사는 지금의 파주보광사인데, 금강암의 터가 어디인지는 불분명하다.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금강암은 평안북도 향산군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산내 암자인 영신암(靈神庵)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암자이다. 커다란 바위 밑에 건축되어 자연적인 바위와 인위적인 지붕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 때문에 금강굴로도 불렸다.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서산 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이 주석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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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사(普光寺)는 조선시대에 고령사(高嶺寺)로 불렸는데, 고령사와 관련해서는 1409년에 산사태가 일어나 고령사 아랫마을 주민 22인이 압사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907003_001 『태종실록』 9년 7월 3일]).
  
영조대에 승려 현기(玄機)가 금강암에 거처하고 있던 법훈(法訓)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훗날 첩문(帖文)을 위조한 도둑으로 체포되어 여러 사람을 무고(誣告)하였다. 현기가 스승 법훈에 대해 말하기를,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도망친 황진기(黃鎭紀)가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는데, 그 사람이 바로 법훈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금강암에 거처하던 두 명의 법훈을 조사한 결과 거짓으로 판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1301009_001 『영조실록』 13년 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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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545년 을사사화 때 희생된 계림군(桂林君)이유(李瑠)가 고령사에 잠시 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유는 명종의 즉위와 관련하여 벌어진 윤임(尹任) 일파와 윤원형(尹元衡) 일파 사이에 벌어진 정쟁에서 윤임이 제거되자 자신에게 해가 닥칠 것을 예감하고 피신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령사 금강암에 머물고 있던 승노(僧奴) 경원(敬元)을 만나 함경도 안변으로 갔으나 체포되었고, 결국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110005_001 『명종실록』 즉위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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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금강암과 관련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보광사 산내 암자로 도솔암과 영묘암이 있지만 금강암과의 관련성은 불분명하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사찰문화연구원 편저, 『북한사찰연구』, 사찰문화연구원 출판부,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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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규, 「파주 보광사의 역사와 위상」, 『대각사상』12, 2009.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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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0 판



조선시대에 있었던 파주보광사의 산내 암자.

개설

금강암(金剛庵)은 조선시대 고령사(高嶺寺)의 산내 암자였다. 고령사는 지금의 파주보광사인데, 금강암의 터가 어디인지는 불분명하다.

내용 및 특징

보광사(普光寺)는 조선시대에 고령사(高嶺寺)로 불렸는데, 고령사와 관련해서는 1409년에 산사태가 일어나 고령사 아랫마을 주민 22인이 압사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태종실록』 9년 7월 3일).

그리고 1545년 을사사화 때 희생된 계림군(桂林君)이유(李瑠)가 고령사에 잠시 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유는 명종의 즉위와 관련하여 벌어진 윤임(尹任) 일파와 윤원형(尹元衡) 일파 사이에 벌어진 정쟁에서 윤임이 제거되자 자신에게 해가 닥칠 것을 예감하고 피신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령사 금강암에 머물고 있던 승노(僧奴) 경원(敬元)을 만나 함경도 안변으로 갔으나 체포되었고, 결국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명종실록』 즉위년 10월 5일).

그 외에 금강암과 관련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보광사 산내 암자로 도솔암과 영묘암이 있지만 금강암과의 관련성은 불분명하다.

참고문헌

  • 황인규, 「파주 보광사의 역사와 위상」, 『대각사상』12, 200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