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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황실에서 국내외 고금의 유명한 서적, 신문, 잡지, 월보, 연보 등을 정비하여 보관, 관리하는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부서.

개설

1903년(고종 40) 1월 23일 포달(布達) 제94호인 궁내부(宮內府) 관제(官制) 중 박문원(博文院) 증치건(增置件)을 반포하였다. 이에 따라 국내외 고금의 유명한 서적, 신문, 잡지, 월보(月報), 연보(年報) 등을 정비하여 보관, 관리하는 사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대한제국은 군주제를 기본으로 하고, 서양의 기술과 기기를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의 각 기구를 근대식으로 개편하기도 했으나 사실상 궁내부를 확대하는 방법으로 황제 중심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대한제국은 황실의 위상을 제고하고, 황실 재정을 확충하는 것을 바탕으로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무엇보다 황제 권력의 강화를 위한 법령을 정비하고, 고종의 직계 가계를 높이는 등 황실 위상의 제고 작업을 추진하며, 서구 열강과 대등한 관제 및 의식을 진행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황실의 궁내부에 박문원을 비롯한 통신사(通信司), 철도원(鐵道院), 광학국(礦學局), 수민원(綏民院), 평식원(平式院) 등을 설치하였다. 특히 박문원은 벨기에영사의 권유가 큰 영향을 발휘했다. 그 무렵 벨기에는 궁내부를 통해 금광을 경영하고자 했으며, 이를 관철하기 위해 고종에게 황실 도서관 건립을 권유하였다. 벨기에영사는 현상건(玄尙健)을 통해 도서관 설립을 추진했고, 현상건은 박문원의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조직 및 역할

1903년 포달 제94호인 박문원 증치건 제26조에 따라 서북철도국(西北鐵道局) 아래에 박문원을 증설하였다. 그 조직은 원장(院長) 1명은 칙임관으로 사무를 총판하고 소속 관리를 감독하였으며, 부장(副長) 1명은 칙임관 혹은 주임관(奏任官), 찬의(贊議) 2명은 칙임관 대우, 감서(監書) 2명은 주임관, 기사(記事) 2명은 판임관(判任官)이었다(『고종실록』 40년 1월 23일). 박문원 원장에는 원수부(元帥府) 검사국(檢査局) 총장(總長)이근택(李根澤)을 겸임시켰다(『고종실록』 40년 1월 24일). 그리고 프랑스어 학교 교사 마르텔([馬太乙], Martel, E.)을 박문원 찬의(贊議)로 임명하였다(『고종실록』 40년 2월 3일). 이 외에 벨기에인 드레와주([戴日匡], C. Deleoigue)도 찬의겸내부고문에 임명하였다. 그는 1903년 11월부터 1905년(고종 42) 1월까지 근무했으며 연봉 6,000원을 받았다.

1903년 10월 19일 포달 제99호인 궁내부의 일부 관제를 개정하는 일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改正件]에 따라 박문원에 부장 1명과 찬의 3명을 더 두었으며, 감서(監書)는 참서(參書)로 고쳤다(『고종실록』 40년 10월 19일). 이때 법무국장(法務局長)이근상(李根湘)을 박문원 부장에 겸임시켰다(『고종실록』 40년 10월 21일). 또한 11월 26일 포달 제103호인 궁내부 관제 중 개정 안건에 따라 박문원 기사를 주사(主事)로 개칭하였고, 참서관(參書官)과 주사를 수시로 증감하도록 하였다(『고종실록』 40년 11월 26일).

변천

1904년(고종 41) 1월 11일 궁내부(宮內府) 대신서리(大臣署理)성기운(成岐運)이 조사한 결과에 따라 박문원과 수륜원(水輪院), 평식원, 관리서(管理署)가 한가한 관청에 속한다고 하여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그 결과 박문원은 예식원(禮式院)에 부속시켜 1개의 박문과(博文課)로 두었다(『고종실록』 41년 1월 11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서영희, 『대한제국 정치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김영수, 「대한제국 초기 고종의 정국구상과 궁내부의 세력변동」, 『사림』3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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