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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박문수(1502-1592)]] |
− | | + | *[[박문수(1691-1756)]] |
− | {{인명사전|대표표제=박문수|한글표제=박문수|한자표제=朴文秀|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가/관료/문신|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 후기|왕대=경종~영조|집필자=박은화|자= 성보(成甫) |호= 기은(耆隱) |봉작= 영성군(靈城君) |시호= 충헌(忠憲) |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691년(숙종 17)|사망=1756년(영조 32) 4월 24일|본관=고령(高靈)|주거지= 서울 |묘소소재지=|증조부= 박장원(朴長遠) |조부= 박선(朴洗) |부= 박항한(朴恒漢): 영은군(靈恩君) |모_외조=경주이씨(慶州李氏): 이세필(李世弼)의 딸|형제=|처_장인=청풍김씨(淸風金氏): 김도협(金道浹)의 딸 →(자녀)1자|자녀=(1자)박구영(朴久榮) (서1자)박향영(朴向榮) (서2자)박만영(朴萬榮)|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오명항토적송공비(吳命恒討賊頌功碑)」(글씨)|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0543|실록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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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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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91년(숙종 17)~1756년(영조 32) = 66세]. 조선 후기 경종~영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병조 [[판서(判書)]]이고, [[봉작(封爵)]]은 영성군(靈城君)이며, [[증직(贈職)]]은 [[영의정(領議政)]]이다. 자는 성보(成甫)이고, 호는 기은(耆隱)이며,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아버지는 영은군(靈恩君)박항한(朴恒漢)이며, 어머니 경주이씨(慶州李氏)는 공조 [[참판(參判)]]이세필(李世弼)의 딸이다. 증조부는 이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이고, 조부는 세마(洗馬)박선(朴洗)이다. 운곡(雲谷)이광좌(李光佐)를 사표(師表)로 삼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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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종~영조 시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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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문수는 1723년(경종 3) [[증광시(增廣試)]] 문과(增廣)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고, 1724년(경종 4) 4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병조 [[정랑(正郞)]]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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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24년(영조 즉위) 9월 검열이 되었는데, [[노론(老論)]]이 집권하면서 삭직되었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少論)]]이 기용되자 그는 [[사서(司書)]]가 되었으며, 영남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亂)>이 일어나자 서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출진, 전공을 세워 그 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으며,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하여졌다. 그 해 도당록(都堂錄)에 들었다. 1730년(영조 6) [[대사성(大司成)]]·[[대사간(大司諫)]]·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고, 충청도암행어사(忠淸道暗行御史)로 나아가 기민(饑民)의 구제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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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32년(영조 8) [[선혜청(宣惠廳)]] 당상(堂上)이 되었고, 1734년(영조 10) 예조 [[참판(參判)]]으로 재직 중에 진주사(陳奏使)의 부사(副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호조 참판이 되었고, 1737년(영조 13)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가 병조 [[판서(判書)]]가 되었다. 그때 병조 자체 내의 인신(印信)이 없어 군무의 신속한 입송(入送)에 불편을 줄 뿐 아니라, 중간에 간리(奸吏)가 농간을 부리는 폐단은 군기의 중요성에 비추어 많은 문제점이 야기될 수 있음을 들어 병조 판서의 인신과 [[이군색(二軍色)]]의 인신을 만들어줄 것을 청나라에 주청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1738년(영조 14) 다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앞서 안동서원(安東書院)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부사(豊德府使)로 좌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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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39년(영조 15)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다. 그 때 그는 수화(水火)의 환란을 우려하여 강가에 제방을 쌓고 수목(樹木)을 널리 심어 놓았는데, 이 때문에 무성한 숲이 우거져 풍구(風口)를 가로막아서 그로부터 20년 동안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순조실록(純祖實錄)』순조 9년 3월 21일조 기사 참고). 1741년(영조 17)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역임하였으며, 함경도에 진휼사(賑恤使)로 나아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1742년(영조 18) 다시 병조 판서가 되었다. 그 때 지리적 여건으로 봉군(烽軍)의 충원이 어려운 북도(北道)에 각 지방에 정배(定配)된 봉무사(烽武士)로서 변통할 것을 주청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1743년(영조 19)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1744년(영조 20) 황해도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로 좌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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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45년(영조 21) 다시 어영대장이 되었으며, 1749년(영조 25) 호조 판서로 재직시 국가에서 대내(大內)의 당우(堂宇)를 3년에 한 번씩 수리할 때 책임관으로서 역대 어느 관료보다도 일을 잘 처리하였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기기도 하였다. 1750년(영조 26) 수어사(守禦使)를 역임한 뒤 영남균세사(嶺南均稅使)를 거쳐, 성균관 [[지사(知事)]]·의금부 [[판사(判事)]]·세손 사부(世孫師傅) 등을 지냈고, 1751년(영조 27) 예조 판서가 되었다. 1752년(영조 28) 왕세손이 죽자 [[내의원(內醫院)]][[제조(提調)]]로 책임을 추궁당하여 제주에 안치되었다. 1753년(영조 29)에 풀려나와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1756년(영조 32) 4월 24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66세이다. 그의 글씨로는 「오명항토적송공비(吳命恒討賊頌功碑)」가 전한다. 한편 그가 암행어사로 활약하였던 행적이 설화로 많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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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월한 실무 행정 및 「탁지 정례」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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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적으로는 소론에 속하였으며, 영조대의 탕평책(蕩平策)이 실시될 때 명문 벌열(名門閥閱) 중심의 인사 정책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고, 노론·소론·[[남인(南人)]]·[[북인(北人)]] 등 사색(四色)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의 실(實)을 강조하였다. 그는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도 밝아 당시 국정 개혁 논의에 중요한 몫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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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49년(영조 25) 영조에게 주청하여 다른 신하들과 함께 『탁지 정례(度支定例)』를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각전각궁 공상 정례(各殿各宮供上定例)』 6권, 『국혼 정례(國婚定例)』 2권, 『각사 정례(各司定例)』 12권, 『상방 정례(尙方定例)』 3권을 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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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호와 추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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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인 청풍김씨(淸風金氏)는 김도협(金道浹)의 딸인데, 아들 박구영(朴久榮)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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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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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종실록(景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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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조실록(英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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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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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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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기요람(萬機要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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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조보감(國朝寶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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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재전서(弘齋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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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의통략(黨議通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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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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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정치·행정가]][[분류:관료]][[분류:문신]][[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 후기]][[분류:경종~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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