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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총론'''==
  
[1833년(순조 33)~? = ?]. 조선의 25대 왕인 철종(哲宗)의 후궁.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김치욱(金致郁)이고, 그 외의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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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5년(중종 20) = ?]. 조선 6대 왕인 단종(端宗)의 후궁. 본관은 상산(商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원(中樞院) 동지사(同知事)를 지낸 김사우(金師禹)이며, 어머니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의 딸인 광주 이씨(廣州李氏)이다. 외삼촌은 영의정을 지낸 이극배(李克培), 형조 판서(判書)를 지낸 이극감(李克堪), 병조 판서를 지낸 이극증(李克增)이며, 병조 판서를 지낸 이극돈(李克墩)과 우의정을 지낸 이극균(李克均)이다.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으로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되자 김숙의 역시 궁에서 쫓겨났다. 단종과의 사이에 자녀를 두지 못하였고, 양자(養子)인 이약빙(李若氷)이 있다.
  
=='''철종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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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후궁'''==
  
김숙의(金淑儀)는 궁인(宮人) 출신으로 철종의 승은을 입어 1856년(철종 7) 7월 딸을 낳았으나,[『승정원일기』철종 7년 7월 5일],[『일성록』철종 7년 7월 5일] 철종 때에는 첩지를 받지 못하였다. 1899년(광무 3) 고종에 의해 옛 일을 추모하여 은전을 베푸는 차원에서 숙의(淑儀)에 봉작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05007_001 『고종실록』 36년 5월 7일]),[『승정원일기』 고종 36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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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의(金淑儀)는 아버지 김사우(金師禹)와 이인손(李仁孫)의 딸인 어머니 광주 이씨(廣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454년(단종 2)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좌의정정인지(鄭麟趾), 우의정한확(韓確)과 양녕대군(讓寧大君)이제(李禔), 효령대군(孝寧大君)이보(李補) 등과 함께 단종에게 왕비(王妃)를 맞이할 것을 청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1001_001 『단종실록(端宗實錄)』 2년 1월 1일]) 그리고 수양대군은 여러 종친과 신하들과 함께 창덕궁(昌德宮)에서 처녀를 간택하였는데, 풍저창(豊儲倉) 부사(副使)송현수(宋玹壽)와 예원군사(預原郡事)김사우(金師禹), 전 사정(司正)권완(權完)의 딸이 최종으로 뽑혔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1008_001 『단종실록』 2년 1월 8일]) 수양대군은 종친 및 신하들과 의논한 후, 단종에게 송현수의 딸을 비(妃)로 하고 김사우와 권완의 딸을 잉(媵)으로 삼도록 말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1010_004 『단종실록』 2년 1월 10일]) 이에 단종은 송현수의 딸을 왕비에 책봉하고, 김사우와 권완의 딸에게는 관교(官敎)를 내려주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1022_001 『단종실록』 2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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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단종은 상중(喪中)에 왕비를 맞아들이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다며 혼례를 정지할 것을 주장하였으나,([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1023_002 『단종실록』 2년 1월 23일]) 수양대군이 왕비를 맞아들이고 길복(吉服)을 입을 것을 강요하자 결국 수양대군의 말대로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1023_005 『단종실록』 2년 1월 23일]) 이에 효령대군과 호조 판서조혜(趙惠)를 보내 왕비 송씨(宋氏)는 효령 대군의 집으로부터, 김사우의 딸인 김숙의(金淑儀)는 밀성군(密城君)이침(李琛)의 집으로부터 봉영하여 궁으로 들어오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1024_002 『단종실록』 2년 1월 24일]) 얼마 후 단종은 김숙의의 아버지인 김사우를 겸 사간원(司諫院) 지사(知事)로 삼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2006_003 『단종실록』 2년 2월 6일]) 그런데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서 김숙의는 병에 걸렸고, 단종은 김숙의의 거처를 수양대군의 저택으로 옮기도록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3029_001 『단종실록』 2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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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癸酉靖難)>과 단종복위운동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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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인 1453년(단종 1)에 숙부인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 인(皇甫 仁), 김종서(金宗瑞), 정분(鄭苯) 등을 죽이고, 동생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강화도(江華島)에 유배시킨 후 스스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에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106111_001 『세조실록(世祖實錄)』 1년 윤6월 11일]) 이렇게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1456년(세조 1)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 등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 중심이 되어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가 발각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단종복위운동이었다. 단종은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306021_002 『세조실록』 3년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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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치적 사건으로 김숙의 또한 궁에서 내쫓긴 것으로 보인다. 1519년(중종 14)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진천(鎭川)에 사는 단종의 후궁 권씨(權氏)를 혜양(惠養)하도록 청하였던 적이 있었다. 이 때 궁에서 나가 서울에 살고 있던 80세가 넘은 김숙의도 함께 논의되었다. 중종은 진천에 살고 있는 단종의 후궁과 함께 김숙의도 예에 따라 후하게 혜양하라 하였고,([http://sillok.history.go.kr/id/kka_11401026_001 『중종실록(中宗實錄)』 14년 1월 26일]) 이에 해마다 쌀과 소금 등의 물건을 주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2002011_006 『중종실록』 20년 2월 11일]) 1525년(중종 20) 김숙의는 충주(忠州)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중종은 단종은 이미 폐위가 되었으니 그의 후궁에게 따로 부의를 내려줄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2002011_006 『중종실록』 20년 2월 11일])
  
 
=='''묘소와 후손'''==
 
=='''묘소와 후손'''==
  
김숙의의 무덤은 본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에 있었으나, 1969년 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201-85 서삼릉 내 후궁묘역으로 이전하였다. 1970년 서삼릉이 사적 제200호로 지정될 때 함께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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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의는 단종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못하였으나, 궁에서 나간 후 양자를 들인 것으로 보인다. 1539년(중종 34) 한산군수(韓山郡守)이약빙(李若氷)은 폐위된 연산군(燕山君)과 단종의 묘소를 복원하고 후사를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3407105_001 『중종실록』 34년 윤7월 5일]) 그러나 대간(臺諫)은 이약빙의 상소가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이어준다는 말이며, 더욱이 이약빙은 노산군의 후궁 즉, 병조 판서김사우의 딸인 김숙의의 양자이므로 이러한 의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중종은 이약빙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3407107_001 『중종실록』 34년 윤7월 7일])
 
 
김숙의는 철종과의 사이에서 1녀를 두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철종실록(哲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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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실록(端宗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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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世祖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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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中宗實錄)』       
*『일성록(日省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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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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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두환, 『단종실록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       
*지두환, 『철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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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52 판




총론

[?~1525년(중종 20) = ?]. 조선 6대 왕인 단종(端宗)의 후궁. 본관은 상산(商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원(中樞院) 동지사(同知事)를 지낸 김사우(金師禹)이며, 어머니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의 딸인 광주 이씨(廣州李氏)이다. 외삼촌은 영의정을 지낸 이극배(李克培), 형조 판서(判書)를 지낸 이극감(李克堪), 병조 판서를 지낸 이극증(李克增)이며, 병조 판서를 지낸 이극돈(李克墩)과 우의정을 지낸 이극균(李克均)이다.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으로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되자 김숙의 역시 궁에서 쫓겨났다. 단종과의 사이에 자녀를 두지 못하였고, 양자(養子)인 이약빙(李若氷)이 있다.

단종의 후궁

김숙의(金淑儀)는 아버지 김사우(金師禹)와 이인손(李仁孫)의 딸인 어머니 광주 이씨(廣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454년(단종 2)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좌의정정인지(鄭麟趾), 우의정한확(韓確)과 양녕대군(讓寧大君)이제(李禔), 효령대군(孝寧大君)이보(李補) 등과 함께 단종에게 왕비(王妃)를 맞이할 것을 청하였다.(『단종실록(端宗實錄)』 2년 1월 1일) 그리고 수양대군은 여러 종친과 신하들과 함께 창덕궁(昌德宮)에서 처녀를 간택하였는데, 풍저창(豊儲倉) 부사(副使)송현수(宋玹壽)와 예원군사(預原郡事)김사우(金師禹), 전 사정(司正)권완(權完)의 딸이 최종으로 뽑혔다.(『단종실록』 2년 1월 8일) 수양대군은 종친 및 신하들과 의논한 후, 단종에게 송현수의 딸을 비(妃)로 하고 김사우와 권완의 딸을 잉(媵)으로 삼도록 말하였다.(『단종실록』 2년 1월 10일) 이에 단종은 송현수의 딸을 왕비에 책봉하고, 김사우와 권완의 딸에게는 관교(官敎)를 내려주었다.(『단종실록』 2년 1월 22일)

그러나 단종은 상중(喪中)에 왕비를 맞아들이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다며 혼례를 정지할 것을 주장하였으나,(『단종실록』 2년 1월 23일) 수양대군이 왕비를 맞아들이고 길복(吉服)을 입을 것을 강요하자 결국 수양대군의 말대로 하였다.(『단종실록』 2년 1월 23일) 이에 효령대군과 호조 판서조혜(趙惠)를 보내 왕비 송씨(宋氏)는 효령 대군의 집으로부터, 김사우의 딸인 김숙의(金淑儀)는 밀성군(密城君)이침(李琛)의 집으로부터 봉영하여 궁으로 들어오게 하였다.(『단종실록』 2년 1월 24일) 얼마 후 단종은 김숙의의 아버지인 김사우를 겸 사간원(司諫院) 지사(知事)로 삼았다.(『단종실록』 2년 2월 6일) 그런데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서 김숙의는 병에 걸렸고, 단종은 김숙의의 거처를 수양대군의 저택으로 옮기도록 하였다.(『단종실록』 2년 3월 29일)

<계유정난(癸酉靖難)>과 단종복위운동의 실패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인 1453년(단종 1)에 숙부인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 인(皇甫 仁), 김종서(金宗瑞), 정분(鄭苯) 등을 죽이고, 동생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강화도(江華島)에 유배시킨 후 스스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에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다.(『세조실록(世祖實錄)』 1년 윤6월 11일) 이렇게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1456년(세조 1)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 등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 중심이 되어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가 발각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단종복위운동이었다. 단종은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세조실록』 3년 6월 21일)

이 정치적 사건으로 김숙의 또한 궁에서 내쫓긴 것으로 보인다. 1519년(중종 14)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진천(鎭川)에 사는 단종의 후궁 권씨(權氏)를 혜양(惠養)하도록 청하였던 적이 있었다. 이 때 궁에서 나가 서울에 살고 있던 80세가 넘은 김숙의도 함께 논의되었다. 중종은 진천에 살고 있는 단종의 후궁과 함께 김숙의도 예에 따라 후하게 혜양하라 하였고,(『중종실록(中宗實錄)』 14년 1월 26일) 이에 해마다 쌀과 소금 등의 물건을 주었다.(『중종실록』 20년 2월 11일) 1525년(중종 20) 김숙의는 충주(忠州)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중종은 단종은 이미 폐위가 되었으니 그의 후궁에게 따로 부의를 내려줄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중종실록』 20년 2월 11일)

묘소와 후손

김숙의는 단종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못하였으나, 궁에서 나간 후 양자를 들인 것으로 보인다. 1539년(중종 34) 한산군수(韓山郡守)이약빙(李若氷)은 폐위된 연산군(燕山君)과 단종의 묘소를 복원하고 후사를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중종실록』 34년 윤7월 5일) 그러나 대간(臺諫)은 이약빙의 상소가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이어준다는 말이며, 더욱이 이약빙은 노산군의 후궁 즉, 병조 판서김사우의 딸인 김숙의의 양자이므로 이러한 의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중종은 이약빙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중종실록』 34년 윤7월 7일)

참고문헌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지두환, 『단종실록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