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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훈련별대(訓鍊別隊)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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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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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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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직역|대표표제=훈련별대|한글표제=훈련별대|한자표제=訓鍊別隊|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금위영(禁衛營), 번상병(番上兵), 훈련도감(訓鍊都監)|분야=정치/행정/관직·관품|유형=직역|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조선|집필자=윤훈표|제정시기=1669년(현종 10)|폐지시기=1682년(숙종 8)|소속관서=훈련도감|관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2649|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ra_11001017_003 『현종실록』 10년 1월 17일], [http://sillok.history.go.kr/id/kra_11007023_002 『현종실록』 10년 7월 23일], [http://sillok.history.go.kr/id/ksa_10803016_003 『숙종실록』 8년 3월 16일]}}&lt;br /&gt;
&lt;br /&gt;
17세기 후반 중앙 군영인 [[훈련도감(訓鍊都監)]]에 소속되었던 번상병(番上兵).&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임진왜란 과정에서 설립된 훈련도감은 왕을 호위하고 수도를 지키는 주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급료를 받는 병사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재정 부담이 심각했다. 효종이 즉위한 뒤 북벌을 목표로 군비 확장을 도모했으나 부담이 커짐으로써 효종이 죽은 뒤 감축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급료병(給料兵) 대신 번상병제(番上兵制)로 운영되는 별도의 부대를 만드는 방안이 강구되면서 훈련별대(訓練別隊)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군비 축소와, 하나의 조직에 다른 성격의 병사가 병존하는 데 따른 문제로 훈련별대와 [[정초군(精抄軍)]]을 합쳐 [[금위영(禁衛營)]]을 설치하였다.&lt;br /&gt;
&lt;br /&gt;
=='''담당 직무'''==&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전기 중앙군의 핵심 조직이었던 오위는 완전히 허수화되었다. 이에 오위를 대신하는 조직으로 훈련도감을 임진왜란 중에 개설하여 확장하였다. 그 결과 훈련도감이 궁궐 경호와 도성 방위를 담당하는 중추적인 기구로 성장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런데 병자호란의 치욕을 만회한다는 이유로 효종은 즉위 직후부터 군비 확충 작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주된 계획의 하나가 훈련도감의 군병 숫자를 1만 명 선으로 증가시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까지 훈련도감의 군병은 모두 급료병으로 구성되었다. 이로 인해 막대한 유지비가 투입되어야 했으며, 그 결과 국가 재정은 심각한 압박을 받았다. 더구나 비슷한 성격의 [[어영청(御營廳)]]까지 인조반정 이후 신설되어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강도가 더 심했다. 마침내 효종 사후에 군병 숫자 감축론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lt;br /&gt;
&lt;br /&gt;
감축론의 주요 핵심은 승호(陞戶) 중지와 군병 수를 5,000명 선으로 고정하는 것, 그리고 도감에 배정된 [[둔전(屯田)]]을 없애는 것이었다. 승호는 중앙과 지방에서 사노비나 공노비, 백정 등의 천민을 양민으로 승격시켜 훈련도감의 포수 [[정군(正軍)]]에 소속시키던 제도인데, 이를 중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군비 확장을 주관하던 이완(李浣)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한 채 논쟁만 계속되었다.&lt;br /&gt;
&lt;br /&gt;
상황이 점점 어려워지자 서인(西人)의 강력한 지도자 송시열(宋時烈)이 절충론을 제시하였다. 훈련도감을 존속시키되 증액을 중지하고, 이후로는 결원이 생겨도 보충하지 않음으로써 자연히 도태시키자는 것이었다. 또한 전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경비가 비교적 적게 드는 어영청 같은 군영을 대신 만들어 불식시키자고 주장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ra_11001017_003 『현종실록』 10년 1월 17일]).&lt;br /&gt;
&lt;br /&gt;
이 제안이 왕의 측근이었던 [[남인(南人)]]의 허적(許積)과 유혁연(柳赫然) 등의 지지를 얻어 실행에 옮겨졌다. 하지만 그들의 실제 계획은 번상병제로 운영되는 별도의 부대를 설립하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왕의 승인을 얻어 각 도에서 찾아내 파악한, [[국역(國役)]]에 나가지 않는 장정, 즉 [[한정(閑丁)]] 54,000여 명 가운데 유직자나 유역인 및 공적·사적 천민을 제외한 10,158명을 간추렸다. 다시 여기에서 서·북 양도(兩道) 출신자를 제외하고 남은 6,665명을 새로운 부대에 소속시킬 인원으로 확정하였다. 이들은 어영청의 예에 따라 13개 번으로 나뉘어 매 번에 521명으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1669년(현종 10)에 정식으로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훈련별대로 이름 붙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ra_11007023_002 『현종실록』 10년 7월 23일]). 훈련별대도 궁중에서 교대하지 않고 오래 근무하는 [[장번(長番)]] 급료병이었던 도감군과 마찬가지로 왕의 호위와 수도 방위를 주로 담당하였으나, 교대로 번상해야 한다는 점이 특징이었다.&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패퇴하고 서인 정권이 들어서자 전과 마찬가지로 도감 변통론(變通論)이 또다시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도감군을 감축하고 중앙군을 번상병제로 전환하자는 것이 주된 골자였다. 더불어 훈련도감의 이원성, 즉 급료병과 번상병이 한 조직에서 병존하는 것도 문제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같은 서인 계열이었음에도 외척인 김석주(金錫冑) 등은 왕의 시위가 취약해진다는 이유로 그에 반대했다. 이번에는 훈련별대가 쓸모없는 군대라며 그것을 혁파하여 군액을 감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신들에게서 나왔다.&lt;br /&gt;
&lt;br /&gt;
드디어 김석주의 주도로 개편 작업이 시작되면서 도감군의 감축과 번상병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부 수용하였다. 일단 훈련도감 군액 5,707명 중 707명을 감축하여 번상병제로 운영되는 훈련별대로 보냈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0803016_003 『숙종실록』 8년 3월 16일]). 그리고 이들을 정초군과 합하여 정군 14,098명, [[보인(保人)]] 78,000명 규모의 금위영을 1682년(숙종 8)에 설치하였다. 이로써 훈련별대의 병력과 직무가 금위영으로 완전히 이관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속대전(續大典)』      &lt;br /&gt;
*『대전통편(大典通編)』      &lt;br /&gt;
*『대전회통(大典會通)』      &lt;br /&gt;
*『만기요람(萬機要覽)』      &lt;br /&gt;
*김종수, 『조선후기 중앙군제연구』, 혜안, 2003.      &lt;br /&gt;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후기편 -』, 육군본부, 1977.      &lt;br /&gt;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lt;br /&gt;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lt;br /&gt;
*최효식, 『조선후기 군제사 연구』, 신서원, 1995.      &lt;br /&gt;
*최효식, 「용호영에 대하여」, 『경주사학』 4, 경주사학회, 1985.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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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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