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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호련대(扈輦隊)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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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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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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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직역|대표표제=호련대|한글표제=호련대|한자표제=扈輦隊|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병조(兵曹), 정련배(正輦陪), 부련배(副輦陪), 옥교배(玉轎陪), 양산선차비(陽繖扇差備), 등롱군(燈籠軍), 의장군(儀仗軍), 궁내부(宮內府)|분야=정치/군사·국방/편제|유형=직역|지역=|시대=조선후기~대한제국기|왕대=조선후기~대한제국기|집필자=서태원|제정시기=1676년(숙종 2)|폐지시기=1907년(융희 1)|소속관서=병조|관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5022|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ua_13708013_001 『영조실록』 37년 8월 13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10016_001 『정조실록』 13년 10월 16일]}}&lt;br /&gt;
&lt;br /&gt;
조선후기에 왕이 행차할 때 타는 연(輦)을 호위하던 군인.&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호련대는 1676년(숙종 2) 창설되어 주로 [[병조(兵曹)]]에 소속되었고, 서울 사람들 중에서 군인을 선발하여 왕이 거둥할 때 타는 연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호련대는 정련배(正輦陪)·부련배(副輦陪)·옥교배(玉轎陪)·양산선차비(陽繖扇差備)·[[등롱군(燈籠軍)]]·의장군(儀仗軍)을 모두 일컫는 명칭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정련배·부련배만을 호련대라고 하거나 전체에서 의장군만 빼고 호련대라고 하는 등 다양하게 정의하였다.&lt;br /&gt;
&lt;br /&gt;
호련대의 정원은 『만기요람』에 의하면 360명이었고, 1년에 무명 6필과 보(保) 3명을 제공받았다. 왕의 연을 호위한 호련대에게는 죽 등의 음식을 주고, [[목면(木綿)]] 등을 상으로 주어 노고를 위로하였다.&lt;br /&gt;
&lt;br /&gt;
1830년(순조 30)에는 호련대 가운데 무뢰배(無賴輩)와 한잡인(閑雜人)을 제거한 다음 내력이나 주소지가 확실하고 호적이 분명한 자들로 보충하였는데, 이들을 별안군(別案軍)으로 불렀다.&lt;br /&gt;
&lt;br /&gt;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병조가 폐지되고 [[군무아문(軍務衙門)]]이 설치되었다가 군무아문의 명칭이 [[군부(軍部)]]로 바뀌면서 호련대의 소속처가 변화하였다. 이어 1895년 윤5월 호련대는 군부에서 [[궁내부(宮內府)]]로 이속되었다가 1907년(순종 즉위) 군대 해산 때 폐지되었다.&lt;br /&gt;
&lt;br /&gt;
=='''담당 직무'''==&lt;br /&gt;
&lt;br /&gt;
호련대 군인은 해당 패두(牌頭)가 건장한 자를 선발하면, [[낭청(郎廳)]]에서 과거 3차례 식년(式年)의 호적을 심사한 후 사복시 관원이 다시 자세히 살펴본 후 호련대로 편성시켰다.&lt;br /&gt;
&lt;br /&gt;
호련대의 수는 ‘1714년 367명, 1782년 400여 명, 1894년 471명’ 등으로 다양하였다. 순조대 『만기요람』에는 호련대 360명이 기재되었는데, 그중에서 ‘정련배 60명은 어가가 거둥할 때, 부련배 40명은 어가가 궐 밖으로 나가는 동가(動駕)·나라에 경사가 있어 왕에게 나아가 축하하는 진하(陳賀)·왕이 정전의 옥좌에 나와 앉는 전좌(殿座) 때, 옥교배 30명과 등롱군 40명은 동가·전좌 때’ 왕을 호위하였다. 양산선차비 20명과 의장군 170명은 동가·전좌 때 줄지어 죽 늘어서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실제로 1679년(숙종 5)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왕이 행차하였을 때 호련대 159명이, 1680년 칙사를 맞을 때에는 호련대 227명이, 1761년(영조 37) [[명릉(明陵)]]([http://sillok.history.go.kr/id/kua_13708013_001 『영조실록』 37년 8월 13일])·1772년 대보단·1781년 육상궁·1789년 현륭원(顯隆園)에 거둥하였을 때([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10016_001 『정조실록』 13년 10월 16일])에도 호련대가 연을 호위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호련대는 1857년 순원왕후·1890년 신정왕후 등의 [[국장(國葬)]]과 관련하여 정일(正日) 때 신련(神輦)을 메었고, 1698년(숙종 24) 강 연안의 산 밑에 사는 주민들이 전염병으로 죽고 흩어져 민호가 줄어든 것을 계기로 내빙고(內氷庫)에 얼음을 저장하는 일도 담당하였다.&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호련대는 1676년(숙종 2) 서울 사람들 중에서 선발하여 창설되었다. 호련대의 정원은 1699년 367명, 순조대 『만기요람』에 의하면 360명, 1894년 471명 등으로 변화가 있었다. 1714년의 경우 호련대 1명에 [[보인(保人)]] 3명을 주고 [[여정(餘丁)]] 1,788명은 병조에 소속시킨 후 매년 군포 2필을 거두도록 하였다.&lt;br /&gt;
&lt;br /&gt;
1830년 병조 판서 서준보의 건의를 받아들여 호련대 가운데 무뢰배와 한잡인을 제거하고, 대신 내력이나 주소지가 확실하고 호적이 분명한 자들로 보충한 다음 명칭을 별안군이라고 하였다.&lt;br /&gt;
&lt;br /&gt;
1894년 갑오개혁으로 병조가 폐지되고 군무아문이 설치되고, 1895년 3월 군무아문이 군부로 명칭이 바뀌면서 병조 소속이었던 호련대의 소속처도 변화하였다. 같은 해 윤5월 호련대는 궁내부로 이속되었다가 1907년 군대 해산 때 폐지되었다. 하지만 『대한매일신보』의 1907년 12월 7일 기사에서 ‘호련대 폐지에 대한 원망이 커서 이달까지만 더 유지한 후 영원히 폐지한다고 하더라.’ 하는 것에서 1908년에 폐지되었을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lt;br /&gt;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lt;br /&gt;
*『일성록(日省錄)』      &lt;br /&gt;
*『각사등록(各司謄錄)』      &lt;br /&gt;
*『만기요람(萬機要覽)』      &lt;br /&gt;
*『순원왕후국장도감의궤(純元王后國葬都監儀軌)』      &lt;br /&gt;
*『신정왕후국장도감의궤(神貞王后國葬都監儀軌)』      &lt;br /&gt;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lt;br /&gt;
*서인한, 『대한제국의 군사 제도』, 혜안, 2000.      &lt;br /&gt;
*신명호, 「조선 후기 국왕 행행 시 국정 운영 체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17, 2001.      &lt;br /&gt;
*이왕무, 「조선 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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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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