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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향무사(鄕武士)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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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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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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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직역|대표표제=향무사|한글표제=향무사|한자표제=鄕武士|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향군(鄕軍), 장용영(壯勇營), 화성(華城)|분야=정치/군사·국방/편제|유형=직역|지역=|시대=조선|왕대=조선|집필자=서태원|제정시기=|폐지시기=1895년(고종 32)|소속관서=|관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5020|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va_12112030_004 『정조실록』 21년 12월 30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05010_003 『정조실록』 15년 5월 10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701012_003 『정조실록』 17년 1월 12일]}}&lt;br /&gt;
&lt;br /&gt;
조선후기 향촌에서 전쟁·반란을 대비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하던 지방의 무사.&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향무사는 영조대의 기록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지만, 언제 처음 설치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향무사는 공홍도와 전라도 순천부의 별초무사나 황해도 추포무사처럼 지방에 설치되어, 전쟁·변란을 대비하고 중국인의 불법 고기잡이 행위 등을 방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장용영 소속 향무사는 [[상번(上番)]]하여 조련을 받으면서 숙직과 어가의 호위도 담당하였고, 화성(華城) 성역(城役)의 감독은 물론이고 1796년(정조 20) 화성이 완공된 후 화성을 방어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임무를 담당한 향무사는 번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활쏘기 시험을 통해 과거 시험의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 곧 [[직부전시(直赴殿試)]] 등의 혜택을 제공받았다. 1802년(순조 2) 장용영이 혁파된 후 장용영 향무사도 폐지되었고, 지방의 감영·수영 등에 설치된 향무사도 1895년(고종 32) 지방군이 혁파되면서 함께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담당 직무'''==&lt;br /&gt;
&lt;br /&gt;
향무사는 전쟁·변란을 대비하고, 해적의 약탈이나 중국인의 불법 고기잡이 행위 등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에 설치되었다. 즉 1728년 [[무신란(戊申亂)]]을 겪은 후 공홍도 감영에, 그리고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후에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전라도 순천부에 별초무사를 두었다. 1736년(영조 12)에는 [[황당선(荒唐船)]]의 불법적인 고기잡이를 금지시키기 위해 황해도 연해의 요해처에 추포무사를 설치하였다.&lt;br /&gt;
&lt;br /&gt;
특히 1793년(정조 17) 장용영 향무사 13명은 읍리(邑吏) 13명과 함께 향군(鄕軍) 13초(哨)를 구관(句管)하는 감색(監色)의 역할을 하였고, 상번하여 조련을 받으면서 숙직을 하고 왕의 행행(幸行) 때 어가를 호위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이러한 임무를 수행한 수원·파주·양주·지평·양근·가평·고양 등의 향무사는 하번하기 직전 [[유엽전(柳葉箭)]]을 쏘는 활쏘기 시험을 통해 3중(中) 4분(分)인 경우 [[출신(出身)]]은 품계를 높여 주고, 이미 품계를 높여 주었으면 변장(邊將)에 제수하며, [[한량(閑良)]]은 직부전시의 혜택을 주었다. 그런 다음 성적에 따라 [[통개(筒箇)]] 1부(部), 과거 시험 가운데 [[회시(會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인 [[직부회시(直赴會試)]], 아마첩(兒馬帖), [[궁시(弓矢)]] 1부, 궁전(弓箭) 1부, 상현궁(上弦宮) 1장(張), 화살의 몸이 되는 대인 전죽(箭竹) 100개 중 하나를 상으로 제공하였다.&lt;br /&gt;
&lt;br /&gt;
아울러 1793년(정조 17) 장용영 내·외영 제도가 성립되고 1796년 화성(華城)이 완공되면서 왕이 행행(幸行)할 때 내영의 향무사 47명은 수첩군관이 되어 화성을 지켰고([http://sillok.history.go.kr/id/kva_12112030_004 『정조실록』 21년 12월 30일]), 평시에 외영으로 입번(入番)하는 향무사는 입방군(入防軍)인 향군(鄕軍) 3명을 병졸로 거느리고 화성의 담장 안팎과 성 위를 파수(把守)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향무사는 1760년(영조 36)의 『승정원일기』 기록 등에서 확인되지만, 언제 처음 설치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장용영의 경우 1791년(정조 15) 장용영에 소속된 향무사가 있는 읍에 새로 인쇄한 『병학지남』을 보내 무예를 열심히 익히도록 한 것을 통해, 향무사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05010_003 『정조실록』 15년 5월 10일]). 실제로 장용영 향무사는 1793년 장용청이 설치될 때 13명을 두었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va_11701012_003 『정조실록』 17년 1월 12일]), 1797년 왕이 행행할 때 내영의 향무사 47명이 화성의 수첩군관이 된 것에서 향무사의 수가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아울러 1795년 이후 향군 중 활쏘기나 조총 쏘기에서 성적이 우수하여 곧바로 전시나 회시에 응시하게 되면 그들도 향무사로 부르게 되면서 향무사의 수가 더욱 많아졌으며, [[출신(出身)]]이나 [[한량(閑良)]]이 주축을 이루었던 향무사의 신분도 변화하였다.&lt;br /&gt;
&lt;br /&gt;
하지만 1802년(순조 2) 장용영이 혁파되면서 장용영 향무사도 함께 폐지되었고, 1804년 [[전시(殿試)]]에 응시하지 않은 장용영 향무사 김상복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장용영 향무사에 대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lt;br /&gt;
&lt;br /&gt;
한편 감영이나 수영 등에 설치된 향무사는 1895년 을미개혁 때 지방군이 혁파되면서 함께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lt;br /&gt;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lt;br /&gt;
*『일성록(日省錄)』      &lt;br /&gt;
*『장용영대절목(壯勇營大節目)』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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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분류:정치]][[분류:군사·국방]][[분류:편제]][[분류:직역]][[분류:조선]][[분류:조선]]&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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