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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행랑조성도감(行廊造成都監)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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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집단기구|대표표제=행랑조성도감|한글표제=행랑조성도감|한자표제=行廊造成都監|대역어=|상위어=도감(都監), 행랑(行廊)|하위어=|동의어=|관련어=개천도감(開川都監), 행랑도감(行廊都監)|분야=정치/행정/관청|유형=집단·기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전기|왕대=태종|집필자=장지연|설치시기=1412년(태종 12)|폐지시기=1417년(태종 17)|소속관서=|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9653|실록연계=}}&lt;br /&gt;
&lt;br /&gt;
조선 태종대 도성 안에 행랑을 조성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행랑조성도감은 1412년(태종 12)에서 1414년 동안 3차에 걸친 행랑 공사를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이다. 세 차례의 행랑 공사를 통해 총 2,027칸이 건설되었다.&lt;br /&gt;
&lt;br /&gt;
=='''설립 경위 및 목적'''==&lt;br /&gt;
&lt;br /&gt;
태종대 행랑 건설은 상업 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태종은 지폐인 [[저화(楮貨)]]를 통용하도록 하기 위해, 1410년 [[추포(麤布)]] 사용을 금지하고 각 도에서 세금으로 내는 포(布)를 저화로 내게 하는 등의 강력한 조치들을 연이어 실시하였다. 그러나 저화의 통용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좌정승(左政丞)[[성석린(成石璘)]] 등이 행랑을 건설하자는 의견을 냈고, 이것이 실천되었다.&lt;br /&gt;
&lt;br /&gt;
행랑 건설 전에 먼저 도성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하천의 물길이 정비되었다. 개천도감을 설치하여 1412년 1월부터 2월까지 약 한 달 동안 개천 공사를 하였다. 개천 공사가 거의 완료될 무렵인 1412년 2월 10일에는 혜정교(惠政橋)부터 창덕궁 동구(洞口)까지 시전 행랑터를 조성하였다. 개천 공사 완료 후에는 개천도감을 행랑조성도감으로 전환하여 행랑 조성에 곧바로 착수하였다.&lt;br /&gt;
&lt;br /&gt;
원래 행랑 조성은 이를 통해 상인층들을 통제하고 절도 등의 범죄를 방지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혜정교에서 창덕궁 동구 구간을 건설하려던 초기 계획과는 달리 1차 행랑 조성 때에는 창덕궁 궐문부터 정선방 동구까지 472칸을 완성하였다. 이 행랑은 관청을 위한 조방(朝房)으로 사용하게 하였으며,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도 이때 건설하였다. 이렇게 방향이 달라진 데에는 행랑 조성을 위해 준비한 물자와 인원이 1412년 경복궁에 경회루를 건설하는 데 투입되었기 때문이었다.&lt;br /&gt;
&lt;br /&gt;
원래의 계획 구간인 혜정교에서 창덕궁 동구 구간은 1413년 2차 공사 때 완성되었다. 1414년에는 3차로 종루에서 남대문까지와 종묘 앞에서 동대문까지의 행랑이 추가로 건설되었다.&lt;br /&gt;
&lt;br /&gt;
행랑을 조성할 때 파괴된 민가에 대해서는 저화로 보상해 주었다. 총 1,486칸 가운데 기와집 126칸은 1칸당 저화 20장씩, 초가 1,360칸은 1칸당 10장씩 지급하여 총 16,120장을 지급하였다.&lt;br /&gt;
&lt;br /&gt;
=='''조직 및 역할'''==&lt;br /&gt;
&lt;br /&gt;
행랑조성도감은 개천도감이 그대로 전환되었다는 점에서 개천도감의 제조 등의 조직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천도감은 윤12월 처음 설치된 당시에는 성산군(星山君)이직(李稷)·공조 판서[[박자청(朴子靑)]]·지의정부사이응(李膺) 등 3명을 제조로 삼았다. 1월 공사 시작 전에는 남성군(南城君)홍서(洪恕)·화성군(花城君)장사정(張思靖)·희천군(熙川君)김우(金宇)·총제(摠制)김중보(金重寶)·유습(柳濕)·이지실(李之實)·김만수(金萬壽)·유은지(柳殷之)·이안우(李安愚)·황녹(黃祿) 등 10명을 추가로 제조로 삼았다. 제조 아래에는 사(使)와 판관(判官)이 있었는데, 이 역시 1월에 33명을 증원하였다.&lt;br /&gt;
&lt;br /&gt;
2차와 3차 공사 때에는 담당자가 변하였다. 2차 공사의 경우 성산군이직·공조 판서박자청·지의정부사이응 등 3명이 영솔하고 전 [[판사(判事)]]이간(李暕) 등 22인이 감역의 일을 맡았다. 이 외에도 [[감역관(監役官)]]이 여러 명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목수(木手)]]·석수(石手)·노야장(爐冶匠) 등 숙련 [[공장(工匠)]]이 동원되었다.&lt;br /&gt;
&lt;br /&gt;
2차 공사와 3차 공사 때는 행랑조성도감의 참여 인원도 변화하였다. 1차 행랑 조성 때 동원한 인원은 총 2,035명이었다. 그 가운데 승군(僧軍)이 500명으로 2월부터 4월까지 부역하고 돌아갔으며, 7월에 다시 승군 1천 명, 목공 200명을 동원하여 단청 등 추가 작업을 하였다. 1413년 2차 행랑 조성 당시에는 풍저창(豊儲倉), 군자고(軍資庫) 등 여러 공역이 함께 이루어졌다. 이때는 [[대장(隊長)]], [[대부(隊副)]], [[군기감(軍器監)]]의 [[별군(別軍)]], 각(各) 사(司) 하전(下典) 등 2,141명의 역정(役丁)과 500명의 승군 등 2,641명을 동원하였다. 1414년 3차 행랑 조성 때에는 박자청이 감독을 맡고 양계(兩界)와 각 도의 승군 600명, 경기·풍해도(豐海道)의 [[선군(船軍)]] 1천 명을 징발하여 공역을 진행하였다.&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1414년 3차 행랑 조성 이후로 일부 행랑이 무너져 감역관이 처벌받았다. 1415년 여름에는 폭풍우로 숭례문 안과 흥복사문(興福寺門) 남행랑 등이 무너져 병조 판서[[박신(朴信)]]·전 이조 판서황희(黃喜)를 행랑도감 제조로 삼아 행랑을 고쳐 짓게 하였다. 이때 역군으로는 [[화통군(火㷁軍)]] 400명, [[사재감(司宰監)]] 수군 100명, 의금부의 번상(番上)한 [[도부외(都府外)]] 50명, 보충군(補充軍) 50명 등과 [[선공감(繕工監)]]의 목수·석수·노야장 등을 동원하여 충당하였다. 이처럼 행랑 등의 건축물 보수를 위해 1417년 무렵까지는 행랑도감이 간간이 설치되다가 그 이후로는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태종대에 조성한 행랑의 규모는 성종대 약간 확장되었을 뿐 큰 틀에서는 변화 없이 조선후기까지 유지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 上: 문물의 정비와 왕실문화』, 일지사, 2007.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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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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