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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학림사(鶴林寺)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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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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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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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개념용어|대표표제=학림사|한글표제=학림사|한자표제=鶴林寺|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계림사(雞林寺), 곡서사(鵠棲寺)|관련어=기자화상도(箕子畫像圖), 인현서원(仁賢書院)|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황해도 장연군 순택면 학현리 괴림산(槐林山) 삼장봉(三藏峯)|시대=|왕대=|집필자=이종수|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70|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sa_14007024_003 『숙종실록』 40년 7월 24일]}}&lt;br /&gt;
&lt;br /&gt;
황해도 장연군괴림산에 있던 절.&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학림사(鶴林寺)는 신라시대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하지만 자세하지 않다. 숙종대에 김경유는 고려말에 원 순제가 고려에 가지고 왔다가 잃어버린 기자화상도(箕子畫像圖)를 학림사에서 찾았다고 주장하였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기자화상도를 어떤 승려가 찾아서 학림사에 보관하고 있다가 훗날 인현서원에 보관하였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내용 및 변천'''==&lt;br /&gt;
&lt;br /&gt;
(1) 창건&lt;br /&gt;
&lt;br /&gt;
황해도 장연군(長淵郡)괴림산(槐林山)에 소재한 학림사는 곡서사(鵠棲寺)라고도 불리며 신라 눌지왕 때 묵호자(墨胡子) 아도(阿道) 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학림사에는 흰 닭과 지네에 관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이 절에 운무(雲霧)가 끼는 날의 아침이면 승려가 한 사람씩 행방불명되었다. 승려의 수가 자꾸 줄어 5명밖에 남지 않았을 때, 어느 날 밤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흰 닭 두마리를 주면서 하는 말이 &amp;quot;이 두마리의 흰 닭을 잘 기르시오. 그러면 이 절의 괴이한 일이 생기는 원인을 알 수 있게 될 것이오.&amp;quot;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5명의 승려들이 이 닭을 정성들여 기른 후부터는 괴이한 일이 생기지 않았으며, 2년 뒤에 흰 닭은 수 백 마리로 늘어났다. 흰 닭의 수효가 많아지자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일이 많았으며, 저녁에 돌아올 때는 닭의 주둥이에 피가 묻어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승려들이 닭들을 따라가 보니 숲속에 있는 움막 같은 토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 토굴 속에는 큰 지네가 수없이 모여 있었는데, 흰 닭의 무리와 큰 싸움이 벌어졌다. 원래 상극상식(相克相食)의 동물인데, 닭의 세력이 크기 때문에 닭은 지네를 보면 대들어 잡아먹고, 지네는 죽은 닭만 있는 곳이면 모여들어 먹는 것이었다. 결국 흰 닭과 지네는 싸움 끝에 모두 죽었는데, 그 뒤로 절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2) 조선시대&lt;br /&gt;
&lt;br /&gt;
학림사와 관련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1714년(숙종 40)에 유생(儒生) 김경유(金景游) 등이 상소를 올려 학림사에서 발견된 기자(箕子)의 화상(畫像)을 본부(本府)에 묘향(廟享)할 것을 청하였다. 그 내용에 의하면, 원 순제(順帝)가 멀리 고려에 유람 왔을 때 은밀히 기자의 화상을 가지고 와서 문수암(文殊庵)에 봉안하였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그 소재를 알지 못하다가 학림사에서 발견했으니 사당에 향사(享祀)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4007024_003 『숙종실록』 40년 7월 24일]). 당시의 상소 내용이 사실이었는지 거짓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임하필기』의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에 전해 오는데 여기서는 곡서사라고 하였다.&lt;br /&gt;
&lt;br /&gt;
그 내용에 의하면, 1600년(선조 33)에 평안감사[[서성(徐渻)]]이 조맹부(趙孟頫)가 그린 ‘기자가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홍범(洪範)을 설명하는 그림’을 중국으로부터 얻어서 이를 인현서원(仁賢書院)에 보관하였는데, 명나라가 화사(畫師) 이신흠(李臣欽)을 보내와서 인현서원에 보관된 그림을 모사(模寫)하여 간 뒤에 진본(眞本)을 미처 봉안하지 못하고 있었다. 1626년(인조 4)에 정묘호란 때 진본은 잃어버리고 모사본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한씨(韓氏) 성을 가진 승려가 그 잃어버렸던 진본을 다시 얻어서 곡서사에 보관하다가 한연희(韓連希)에게 맡겼다. 그 뒤 1719년(숙종 45)에 한연희의 4대손 한진태(韓晉泰)가 이를 다시 인현서원에 봉안하였는데 모사본과 일치하였다.&lt;br /&gt;
&lt;br /&gt;
또 『심리록(審理錄)』에 의하면, 1800년(정조 24)에 학림사의 승려 취은(就訔)이 권해천(權海千)이라는 사람과 구리 화로[銅爐]를 사는 문제로 싸우다가 죽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관청에서 조사를 할 때 취은이 피살자가 자기 어미를 강간하려 했다고 거짓 진술을 하면서 죄를 벗어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형조의 [[계사(啓辭)]]에서는 학림사의 승려들은 평소 대부분 흉악하고 사나웠다고 평하였다.&lt;br /&gt;
&lt;br /&gt;
(3) 근현대&lt;br /&gt;
&lt;br /&gt;
학림사는 일제강점기까지 9칸의 보광전(普光殿)을 중심으로 동쪽에 보응당(普應堂), 남쪽에 무집당(霧集堂), 서쪽에 청심당(淸心堂), 북쪽에 심검당(尋劒堂)이 있었고, 천왕문(天王門) 및 42칸의 좌우 낭무(廊廡)와 [[해탈문(解脫門)]]·영송문(迎送門)·금강문(金剛門)·조계문(曺溪門)·불이문(不二門)·단속문(斷俗門) 등이 차례로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어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현재는 사적비와 5층의 석탑만 남아 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심리록(審理錄)』      &lt;br /&gt;
*『임하필기(林下筆記)』      &lt;br /&gt;
*김용국, 『황해도지』, 황해도, 1970.      &lt;br /&gt;
*사찰문화연구원 편저, 『북한사찰연구』, 한국불교종단협의회, 1993.      &lt;br /&gt;
&lt;br /&gt;
[[분류:문화]][[분류:종교]][[분류:불교]][[분류:개념용어]][[분류:황해도 장연군 순택면 학현리 괴림산(槐林山) 삼장봉(三藏峯)]]&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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