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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평양첩(平壤捷)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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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사건|대표표제=평양첩|한글표제=평양첩|한자표제=平壤捷|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임진왜란(壬辰倭亂), 조명연합군(朝明聯合軍), 절강병법(絶江兵法), 이여송(李如松), 평양성(平壤城)|분야=정치/군사·국방/전쟁|유형=사건|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후기|왕대=조선후기|집필자=허태구|발생시기=1593년(선조 26) 1월|발생장소=평양성(平壤城)|관련인물집단=이여송(李如松), 소서행장(小西行長)|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741|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1009_001 『선조실록』 26년 1월 9일]}}&lt;br /&gt;
&lt;br /&gt;
1593년 1월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평양성을 수비하던 일본군을 물리쳐 크게 이긴 전투.&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1593년(선조 26) 1월 6일부터 3일간 평양성(平壤城)에서 벌어진 조·명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사수하던 일본군 수천 명을 살상하고 성을 탈환하였다. 평양성 패전으로 큰 타격을 입은 일본군은 평안도·함경도·황해도·경기도 일대에서 철수하여 도성으로 집결하였다. 이 승전을 계기로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열세에 몰린 전세를 단숨에 반전시킬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역사적 배경'''==&lt;br /&gt;
&lt;br /&gt;
임진왜란 발발 이후 20일 만에 도성을 점령당한 조선은, 1592년(선조 25) 5월 임진강 방어선마저 붕괴되자 명(明)에 원군 파견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명은 조선 전토가 점령당할 경우, 요동과 중국의 안전도 확실히 보장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본격적인 참전 준비에 돌입하였다. 당시 요동의 주력군은 섬서성영하(寧夏)에서 일어난 발배(哱拜)의 반란 진압을 위해 동원된 상태였기 때문에, 명은 요동부총병(遼東副摠兵)조승훈(祖承訓)에게 4,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으나, 1592년(선조 25) 7월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일본군의 역습을 받아 참패를 당하였다. 이 패전 소식에 크게 놀란 명은 전쟁 준비를 충실히 하는 한편 심유경(沈惟敬)을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진(軍陣)에 파견하여 화평 교섭을 진행함으로써 시간을 벌었다. 1592년(선조 25) 9월 발배의 반란을 진압한 명은 조선 파병의 준비를 완료하고, 같은 해 12월 군무제독(軍務提督)이여송(李如松)으로 하여금 43,000여 명의 명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게 하였다.&lt;br /&gt;
&lt;br /&gt;
=='''발단'''==&lt;br /&gt;
&lt;br /&gt;
이여송은 1593년(선조 26) 1월 2일 안주에서 [[도체찰사(都體察使)]]유성룡(柳成龍)과 평양성 탈환 작전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뒤 숙천에서 머물다가, 휘하 부대를 남하시켜 6일 새벽 1만여 명의 조선군과 함께 평양성을 포위하고 성을 공격할 준비를 완료하였다. 조선군은 [[도원수(都元帥)]]김명원(金命元)의 지휘하에 [[순변사(巡邊使)]]이일(李鎰), 좌방어사정희현(鄭希賢), 우방어사김응서(金應瑞), 승병장(僧兵長) 휴정(休靜)이 이끄는 군대가 참전하였다. 6일 명군 일부가 조선 승군의 지원하에 모란봉의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성 밖에서 접전을 벌였다. 야간에는 명군의 우영(右營)을 노린 일본군의 기습이 있었지만 격퇴하였다. 7일에는 전군을 동원해 보통문(普通門)을 공격한 뒤 일본군을 성 밖으로 유인하여 30명의 목을 베었다. 탐색전을 마친 명군은 8일 이른 아침부터 전군을 동원하여 평양성의 서북쪽을 촘촘히 포위한 뒤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명군은 조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위력이 강한 자국의 대·소 [[화포(火砲)]]를 집중 발사하여 적의 기선을 제압한 뒤에, 근접전 무기인 [[방패(防牌)]]·[[장창(長槍)]]·낭선창(狼筅槍)·당파창(鏜鈀槍) 등을 이용하여 일본군의 장기인 백병전을 무력화시켰다. 백병전이란 칼이나 창, 총검 따위의 무기를 가지고 적과 직접 몸으로 맞붙어서 싸우는 전투인데, 일본군이 특히 이에 능하였다. 모란봉·칠성문(七星門)·보통문·함구문(含毬門)을 집중 공격한 명군이 성 밖에 겹으로 둘러쌓은 성인 외성(外城)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안쪽의 내성(內城)으로 돌입하자, 일본군은 만수대(萬壽臺)와 을밀대(乙密臺) 쪽으로 도주한 뒤 미리 파놓은 토굴로 몸을 피한 뒤에 조총을 쏘며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여송은 명군의 인명 손실을 우려하여 군사를 성 밖으로 철수시킨 뒤에, 소서행장에게 저항 없이 평양성을 비우면 퇴로를 열어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철수 제안을 수락한 일본군은 1월 8일 밤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도주하였다. 이여송이 일본군의 철군을 통보하고 퇴로를 차단하지 말 것을 조선 측에 통보하자 조선군은 복병을 철수시키고 말았다. 이로써 평양성을 탈출하던 일본 패잔병은 아무런 인명 피해 없이 한성까지 후퇴할 수 있었다. 조선은 평양성 탈환을 계기로 임진왜란 발발 이후 수세에 몰리기만 했던 전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키고 이후 명군과 함께 한성 수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경과'''==&lt;br /&gt;
&lt;br /&gt;
평양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적의 수급 1,285개, 말 2,985마리, 군기(軍器) 45,002개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적에게 붙잡혔던 조선인 1,225명을 구출하고 적군 2명을 사로잡았다. 평양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보고를 받은 선조는 대신과 승지를 보내어 명군의 공로를 치하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1009_001 『선조실록』 26년 1월 9일]). 평양성의 일본군이 철군하자, 퇴로를 차단당할 것을 염려한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일본군도 함경도에서 서둘러 한성으로 철군하였다. 명군이 거둔 전과 가운데에는 상당수 조선인 민간인의 희생자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전공의 배분을 놓고 명의 남군(南軍)과 북군(北軍)의 갈등이 심화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lt;br /&gt;
*서인한, 『壬辰倭亂史』,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7.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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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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