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feed xmlns="http://www.w3.org/2005/Atom" xml:lang="ko">
		<id>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action=history&amp;feed=atom&amp;title=%EC%A0%95%EC%9D%91%28%E9%84%AD%E6%87%89%29</id>
		<title>정응(鄭應) - 편집 역사</title>
		<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action=history&amp;feed=atom&amp;title=%EC%A0%95%EC%9D%91%28%E9%84%AD%E6%87%89%29"/>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C%A0%95%EC%9D%91(%E9%84%AD%E6%87%89)&amp;action=history"/>
		<updated>2026-05-16T18:22:37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generator>MediaWiki 1.27.3</generator>

	<entry>
		<id>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C%A0%95%EC%9D%91(%E9%84%AD%E6%87%89)&amp;diff=14976&amp;oldid=prev</id>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C%A0%95%EC%9D%91(%E9%84%AD%E6%87%89)&amp;diff=14976&amp;oldid=prev"/>
				<updated>2018-01-09T13:53: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table class=&quot;diff diff-contentalign-left&quot; data-mw=&quot;interface&quot;&gt;
				&lt;col class='diff-marker' /&gt;
				&lt;col class='diff-content' /&gt;
				&lt;col class='diff-marker' /&gt;
				&lt;col class='diff-content' /&gt;
				&lt;tr style='vertical-align: top;' lang='ko'&gt;
				&lt;td colspan='2' style=&quot;background-color: white; color:black; text-align: center;&quot;&gt;← 이전 판&lt;/td&gt;
				&lt;td colspan='2' style=&quot;background-color: white; color:black; text-align: center;&quot;&gt;2018년 1월 9일 (화) 13:53 판&lt;/td&gt;
				&lt;/tr&gt;&lt;tr&gt;&lt;td colspan=&quot;2&quot; class=&quot;diff-lineno&quot; id=&quot;mw-diff-left-l19&quot; &gt;19번째 줄:&lt;/td&gt;
&lt;td colspan=&quot;2&quot; class=&quot;diff-lineno&quot;&gt;19번째 줄:&lt;/td&gt;&lt;/tr&gt;
&lt;tr&gt;&lt;td class='diff-marker'&gt;&amp;#160;&lt;/td&gt;&lt;td style=&quot;background-color: #f9f9f9; color: #333333;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e6e6e6;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div&gt;1519년(중종 14) 이조 [[정랑(正郞)]]을 거쳐 홍문관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다가, 이윽고 홍문관 [[전한(典翰)]] 및 예문관 [[응교(應敎)]]를 겸하였다.[「정응묘표」] 이는 중종이 그의 재주를 아껴서 [[초자(超資)]]하여 불차탁용(不次擢用)한 것이었다. 불차탁용이란 유능한 인재를 발탁할 때 품계(品階)의 차례를 밟지 않고 품계를 몇 단계씩 건너뛰어서 높은 관직에 등용하던 것을 말한다. 당시 중종은 정응과 기준 두 사람의 재주를 중하게 여겨 불차탁용한 것인데, 훈구파에서 그들을 너무 조급하게 승진시킨다고 비난하였다.&lt;/div&gt;&lt;/td&gt;&lt;td class='diff-marker'&gt;&amp;#160;&lt;/td&gt;&lt;td style=&quot;background-color: #f9f9f9; color: #333333;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e6e6e6;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div&gt;1519년(중종 14) 이조 [[정랑(正郞)]]을 거쳐 홍문관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다가, 이윽고 홍문관 [[전한(典翰)]] 및 예문관 [[응교(應敎)]]를 겸하였다.[「정응묘표」] 이는 중종이 그의 재주를 아껴서 [[초자(超資)]]하여 불차탁용(不次擢用)한 것이었다. 불차탁용이란 유능한 인재를 발탁할 때 품계(品階)의 차례를 밟지 않고 품계를 몇 단계씩 건너뛰어서 높은 관직에 등용하던 것을 말한다. 당시 중종은 정응과 기준 두 사람의 재주를 중하게 여겨 불차탁용한 것인데, 훈구파에서 그들을 너무 조급하게 승진시킨다고 비난하였다.&lt;/div&gt;&lt;/td&gt;&lt;/tr&gt;
&lt;tr&gt;&lt;td class='diff-marker'&gt;&amp;#160;&lt;/td&gt;&lt;td style=&quot;background-color: #f9f9f9; color: #333333;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e6e6e6;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td&gt;&lt;td class='diff-marker'&gt;&amp;#160;&lt;/td&gt;&lt;td style=&quot;background-color: #f9f9f9; color: #333333;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e6e6e6;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td&gt;&lt;/tr&gt;
&lt;tr&gt;&lt;td class='diff-marker'&gt;−&lt;/td&gt;&lt;td style=&quot;color:black;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ffe49c;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div&gt;이때 훈구파 홍경주(洪景舟)와 남곤(南袞), 심정(&lt;del class=&quot;diffchange diffchange-inline&quot;&gt;沈貞&lt;/del&gt;) 등이 중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1519년(중종 14) 11월 15일 기묘사화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이자(&lt;del class=&quot;diffchange diffchange-inline&quot;&gt;李耔&lt;/del&gt;)·김정·조광조·김구·[[김식(&lt;del class=&quot;diffchange diffchange-inline&quot;&gt;金湜&lt;/del&gt;)]]·유인숙(柳仁淑)·[[박훈(朴薰)]]·[[박세희(朴世熹)]]등의 사림파가 모두 체포되어 하옥되었다. 이때 훈구파 홍경주와 남곤 등은 사림파를 모조리 죽이고자 하였으나, 영의정[[정광필(鄭光弼)]]과 우의정안당(安塘)이 중종에게 간청하면서 체포된 사림파들은 모두 3차례에 걸쳐 석방되었고, 마지막 8명만이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훈구파는 영의정정광필을 파직시키고, 조광조를 능주(綾州)로 귀양보냈다가 곧 사사(賜死)시켰다. 이어 김정과 김식 등도 유배지에서 사사되었으며, 기준 및 한충 등도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 밖에 김구·박세희·박훈·홍언필(洪彦弼)·이자·유인숙(柳仁淑) 등 수십 명이 귀양을 갔으며, 사림파를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 형제 등도 파직되었다.&lt;/div&gt;&lt;/td&gt;&lt;td class='diff-marker'&gt;+&lt;/td&gt;&lt;td style=&quot;color:black;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a3d3ff;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div&gt;이때 훈구파 홍경주(洪景舟)와 남곤(南袞), 심정(&lt;ins class=&quot;diffchange diffchange-inline&quot;&gt;沈貞&lt;/ins&gt;) 등이 중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1519년(중종 14) 11월 15일 기묘사화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이자(&lt;ins class=&quot;diffchange diffchange-inline&quot;&gt;李耔&lt;/ins&gt;)·김정·조광조·김구·[[김식(&lt;ins class=&quot;diffchange diffchange-inline&quot;&gt;金湜&lt;/ins&gt;)]]·유인숙(柳仁淑)·[[박훈(朴薰)]]·[[박세희(朴世熹)]]등의 사림파가 모두 체포되어 하옥되었다. 이때 훈구파 홍경주와 남곤 등은 사림파를 모조리 죽이고자 하였으나, 영의정[[정광필(鄭光弼)]]과 우의정안당(安塘)이 중종에게 간청하면서 체포된 사림파들은 모두 3차례에 걸쳐 석방되었고, 마지막 8명만이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훈구파는 영의정정광필을 파직시키고, 조광조를 능주(綾州)로 귀양보냈다가 곧 사사(賜死)시켰다. 이어 김정과 김식 등도 유배지에서 사사되었으며, 기준 및 한충 등도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 밖에 김구·박세희·박훈·홍언필(洪彦弼)·이자·유인숙(柳仁淑) 등 수십 명이 귀양을 갔으며, 사림파를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 형제 등도 파직되었다.&lt;/div&gt;&lt;/td&gt;&lt;/tr&gt;
&lt;tr&gt;&lt;td class='diff-marker'&gt;&amp;#160;&lt;/td&gt;&lt;td style=&quot;background-color: #f9f9f9; color: #333333;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e6e6e6;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td&gt;&lt;td class='diff-marker'&gt;&amp;#160;&lt;/td&gt;&lt;td style=&quot;background-color: #f9f9f9; color: #333333;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e6e6e6;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td&gt;&lt;/tr&gt;
&lt;tr&gt;&lt;td class='diff-marker'&gt;&amp;#160;&lt;/td&gt;&lt;td style=&quot;background-color: #f9f9f9; color: #333333;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e6e6e6;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div&gt;기준은 조광조의 제자였으나, 정응은 조광조의 제자가 아니었으므로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체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해 11월 정응을 비롯한 홍문관 관원들은 연명으로 상소하여, “일을 같이 한 사람들이 이미 죄를 받았으니, 우리들도 감옥에 가서 그 죄를 함께 받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중종실록』중종 14년 11월 16일] 이에 중종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얼마 후인 12월 조광조 일파를 추가 색출하는 과정에서 정응도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충청도 부여(扶餘)로 유배되었다.[『중종실록』중종 14년 12월 16일,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상권] 그리고 1522년(중종 17) 7월 장독(杖毒 : 곤장을 맞은 여독)으로 유배지 부여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33세였다.[『중종실록』중종 17년 7월 29일, 『비문』]&lt;/div&gt;&lt;/td&gt;&lt;td class='diff-marker'&gt;&amp;#160;&lt;/td&gt;&lt;td style=&quot;background-color: #f9f9f9; color: #333333;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e6e6e6;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div&gt;기준은 조광조의 제자였으나, 정응은 조광조의 제자가 아니었으므로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체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해 11월 정응을 비롯한 홍문관 관원들은 연명으로 상소하여, “일을 같이 한 사람들이 이미 죄를 받았으니, 우리들도 감옥에 가서 그 죄를 함께 받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중종실록』중종 14년 11월 16일] 이에 중종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얼마 후인 12월 조광조 일파를 추가 색출하는 과정에서 정응도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충청도 부여(扶餘)로 유배되었다.[『중종실록』중종 14년 12월 16일,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상권] 그리고 1522년(중종 17) 7월 장독(杖毒 : 곤장을 맞은 여독)으로 유배지 부여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33세였다.[『중종실록』중종 17년 7월 29일, 『비문』]&lt;/div&gt;&lt;/td&gt;&lt;/tr&gt;
&lt;tr&gt;&lt;td colspan=&quot;2&quot; class=&quot;diff-lineno&quot; id=&quot;mw-diff-left-l33&quot; &gt;33번째 줄:&lt;/td&gt;
&lt;td colspan=&quot;2&quot; class=&quot;diff-lineno&quot;&gt;33번째 줄:&lt;/td&gt;&lt;/tr&gt;
&lt;tr&gt;&lt;td class='diff-marker'&gt;&amp;#160;&lt;/td&gt;&lt;td style=&quot;background-color: #f9f9f9; color: #333333;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e6e6e6;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div&gt;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강올리(綱兀里)에 있는데, 묘표(墓表)가 남아있다.[「정응묘표」]&lt;/div&gt;&lt;/td&gt;&lt;td class='diff-marker'&gt;&amp;#160;&lt;/td&gt;&lt;td style=&quot;background-color: #f9f9f9; color: #333333;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e6e6e6;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div&gt;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강올리(綱兀里)에 있는데, 묘표(墓表)가 남아있다.[「정응묘표」]&lt;/div&gt;&lt;/td&gt;&lt;/tr&gt;
&lt;tr&gt;&lt;td class='diff-marker'&gt;&amp;#160;&lt;/td&gt;&lt;td style=&quot;background-color: #f9f9f9; color: #333333;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e6e6e6;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td&gt;&lt;td class='diff-marker'&gt;&amp;#160;&lt;/td&gt;&lt;td style=&quot;background-color: #f9f9f9; color: #333333;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e6e6e6;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td&gt;&lt;/tr&gt;
&lt;tr&gt;&lt;td class='diff-marker'&gt;−&lt;/td&gt;&lt;td style=&quot;color:black;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ffe49c;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div&gt;첫째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부사(府使)신염(申濂) 딸인데, [[영의정(領議政)]][[신숙주(申叔舟)]]의 후손이다. 둘째 부인 연일 정씨(延日鄭氏)는 [[정랑(正郞)]]정완(鄭浣)의 딸이다. 후사가 없었으므로, 여동생의 아들 의양령(義陽令)이중손(&lt;del class=&quot;diffchange diffchange-inline&quot;&gt;李仲孫&lt;/del&gt;)이 제사를 맡아서 그 기일(忌日)에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정응묘표」]&lt;/div&gt;&lt;/td&gt;&lt;td class='diff-marker'&gt;+&lt;/td&gt;&lt;td style=&quot;color:black;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a3d3ff;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div&gt;첫째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부사(府使)신염(申濂) 딸인데, [[영의정(領議政)]][[신숙주(申叔舟)]]의 후손이다. 둘째 부인 연일 정씨(延日鄭氏)는 [[정랑(正郞)]]정완(鄭浣)의 딸이다. 후사가 없었으므로, 여동생의 아들 의양령(義陽令)이중손(&lt;ins class=&quot;diffchange diffchange-inline&quot;&gt;李仲孫&lt;/ins&gt;)이 제사를 맡아서 그 기일(忌日)에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정응묘표」]&lt;/div&gt;&lt;/td&gt;&lt;/tr&gt;
&lt;tr&gt;&lt;td class='diff-marker'&gt;&amp;#160;&lt;/td&gt;&lt;td style=&quot;background-color: #f9f9f9; color: #333333;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e6e6e6;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td&gt;&lt;td class='diff-marker'&gt;&amp;#160;&lt;/td&gt;&lt;td style=&quot;background-color: #f9f9f9; color: #333333;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e6e6e6;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td&gt;&lt;/tr&gt;
&lt;tr&gt;&lt;td class='diff-marker'&gt;&amp;#160;&lt;/td&gt;&lt;td style=&quot;background-color: #f9f9f9; color: #333333;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e6e6e6;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div&gt;=='''참고문헌'''==&amp;#160; &amp;#160; &amp;#160; &amp;#160;&lt;/div&gt;&lt;/td&gt;&lt;td class='diff-marker'&gt;&amp;#160;&lt;/td&gt;&lt;td style=&quot;background-color: #f9f9f9; color: #333333; font-size: 88%;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1px 1px 4px; border-radius: 0.33em; border-color: #e6e6e6; vertical-align: top; white-space: pre-wrap;&quot;&gt;&lt;div&gt;=='''참고문헌'''==&amp;#160; &amp;#160; &amp;#160; &amp;#160;&lt;/div&gt;&lt;/td&gt;&lt;/tr&gt;
&lt;/table&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C%A0%95%EC%9D%91(%E9%84%AD%E6%87%89)&amp;diff=13242&amp;oldid=prev</id>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C%A0%95%EC%9D%91(%E9%84%AD%E6%87%89)&amp;diff=13242&amp;oldid=prev"/>
				<updated>2017-12-21T16:49: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정응|한글표제=정응|한자표제=鄭應|이칭=정응(鄭譍)|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인물|유형=정치·행정가/관료/문신|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중종|집필자=이현숙|자=응지(譍之)|호=소우(素愚)|봉작=|시호=|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490년(성종 21)|사망=1522년(중종 17)|본관=동래(東萊)|주거지=서울|묘소소재지=양주(楊州)|증조부=정효경(鄭孝卿)|조부=정수(鄭穗)|부=정인후(鄭仁厚)|모_외조=경주 최씨(慶州崔氏) : 최순(崔洵)의 딸 [비문] 충주 최씨(忠州崔氏) : 최순(崔洵)의 딸 [방목]|형제=|처_장인=(첫째 부인)고령 신씨(高靈申氏) : 신염(申濂)의 딸 →무후 (둘째 부인)연일 정씨(延日鄭氏) : 정완(鄭浣)의 딸 →무후|자녀=|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011|실록연계=}}&lt;br /&gt;
&lt;br /&gt;
=='''총론'''==&lt;br /&gt;
&lt;br /&gt;
[1490년(성종 21)∼1522년(중종 17) = 33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이조 [[정랑(正郞)]]과 [[홍문관(弘文館)]][[응교(應敎)]] 등을 지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이름이 정응(鄭應)으로 되어 있다. 자는 응지(譍之)이고, 호는 소우(素遇)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돈녕부(敦寧副 정(正)정인후(鄭仁厚)이고, 어머니 경주 최씨(慶州崔氏)는 단성현감(丹城縣監)최순(崔洵)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고양군수(高陽郡守)를 지낸 정수(鄭穗)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경산현령(慶山縣令)을 지낸 정효경(鄭孝卿)이다. &amp;lt;[[기묘사화(己卯士禍)]]&amp;gt;와 연관되어 유배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lt;br /&gt;
&lt;br /&gt;
=='''중종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507년(중종 2)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다.[『방목(榜目)』] 1514년(중종 9)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방목』] 처음에 [[홍문관(弘文館)]][[정자(正字)]]로 보임되었으나, [[분관(分館)]]에서 허참례(許參禮)와 면신례(免新禮)를 행하지 않고 바로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었다고 탄핵을 하여 체직되었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9년 11월 14일, 중종 9년 11월 15일, 중종 9년 11월 22일] 조선 초기부터 새로 출사(出仕)하는 관원은 구 관원(舊官員)에게 음식을 차려 대접하는 예(禮)가 있었는데, 이를 허참례(許參禮), 또는 허참(許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후부터 서로 상종(相從)을 허락한다는 뜻으로, 신 관원(新官員)의 오만을 없애기 위해서 시행해 오던 풍습이었다. 그리고 이후 열 며칠 뒤에는 면신례(免新禮)를 행하여야 비로소 구 관원과 동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응(鄭譍)이 이를 하지 않았다고 하여 구 관원들로부터 지적을 받았던 것이다.&lt;br /&gt;
&lt;br /&gt;
1515년(중종 10) 5월 이조와 예조, 그리고 대제학 등의 의논에 따라 김안로(金安老)·김정(金淨)·[[소세양(蘇世讓)]]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었고, 홍문관 [[저작(著作)]]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10년 5월 5일]  이때 중종의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사림파(士林派)의 김정과 [[박상(朴祥)]]이 &amp;lt;[[중종반정(中宗反正)]]&amp;gt; 이전에 중종이 사가에서 살 때 부인이었던 폐비 신씨(愼氏)를 복위(復位)시켜 다시 중전(中殿)으로 모실 것을 주장하였다. 사림파인 사간원 대사간조광조(趙光祖)는 이를 적극 지지하였으나, 이를 반대하는 훈구파(勳舊派)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행(李荇)의 탄핵을 받고 김정과 박상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때 사간원 정언정응 등이 “상소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것입니다.”라며 그들을 비호하고, 오히려 대사헌이행을 탄핵하여 그를 파직시켰다.[『중종실록』중종 10년 8월 22일, 중종 10년 10월 25일] 이행은 훈구파인 사장파(詞章派)의 우두머리로서 남곤(南袞)·소세양 등 당대의 문장가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결국 이 일로 이들은 정응을 사림파 인물로 낙인찍혔다.[『중종실록』중종 14년 12월 14일]&lt;br /&gt;
&lt;br /&gt;
1516년(중종 11) 11월 이언호(李彦浩)·소세량 등과 함께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이 되어, 천문학을 별도로 공부하였다.[『중종실록』중종 11년 11월 7일] 그때 경연청(經筵廳) [[사경(司經)]]을 겸임하였는데, 경연청에서 진강(進講)할 때 [[내수사(內需司)]] 장리(長利)를 혁파하도록 건의하였다.[『중종실록』중종 12년 7월 30일] 1517년(중종 12) [[성균관(成均館)]][[박사(博士)]]에 임명되었다가, 5품의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으로 발탁되었으며, 이어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전임되었다가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중종실록』중종 12년 4월 7일, 중종 12년 8월 22일, 중종 12년 8월 24일]&lt;br /&gt;
&lt;br /&gt;
1518년(중종 13)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로 있을 때, 그는 홍문관 부제학조광조, 홍문관 [[교리(校理)]]김구(金絿)와 함께 월과(月課)의 시문(詩文)을 짓지 않았다는 이유로 추고(推考)를 당하였다. 당시 정응과 기준(奇遵)은 소장파 그룹에서 문장의 쌍벽(雙璧)을 이룰 만큼 문명(文名)이 높았고, [[성리학(性理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당시 풍조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정응은 매월마다 의무적으로 시문(詩文)을 짓는 일을 보이콧하였던 것이다. 이후 예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지평(持平)]]을 거쳐 병조 좌랑으로 전임되었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속고8 「정응」 이하 「정응묘표」로 약칭] 그리고 그해 11월 홍문관 교리로 승진하였고,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어, 성균관 [[직강(直講)]]을 겸임하였다.[『중종실록』중종 13년 11월 17일, 중종 13년 11월 19일]&lt;br /&gt;
&lt;br /&gt;
1519년(중종 14) 이조 [[정랑(正郞)]]을 거쳐 홍문관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다가, 이윽고 홍문관 [[전한(典翰)]] 및 예문관 [[응교(應敎)]]를 겸하였다.[「정응묘표」] 이는 중종이 그의 재주를 아껴서 [[초자(超資)]]하여 불차탁용(不次擢用)한 것이었다. 불차탁용이란 유능한 인재를 발탁할 때 품계(品階)의 차례를 밟지 않고 품계를 몇 단계씩 건너뛰어서 높은 관직에 등용하던 것을 말한다. 당시 중종은 정응과 기준 두 사람의 재주를 중하게 여겨 불차탁용한 것인데, 훈구파에서 그들을 너무 조급하게 승진시킨다고 비난하였다.&lt;br /&gt;
&lt;br /&gt;
이때 훈구파 홍경주(洪景舟)와 남곤(南袞), 심정(沈貞) 등이 중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1519년(중종 14) 11월 15일 기묘사화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이자(李耔)·김정·조광조·김구·[[김식(金湜)]]·유인숙(柳仁淑)·[[박훈(朴薰)]]·[[박세희(朴世熹)]]등의 사림파가 모두 체포되어 하옥되었다. 이때 훈구파 홍경주와 남곤 등은 사림파를 모조리 죽이고자 하였으나, 영의정[[정광필(鄭光弼)]]과 우의정안당(安塘)이 중종에게 간청하면서 체포된 사림파들은 모두 3차례에 걸쳐 석방되었고, 마지막 8명만이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훈구파는 영의정정광필을 파직시키고, 조광조를 능주(綾州)로 귀양보냈다가 곧 사사(賜死)시켰다. 이어 김정과 김식 등도 유배지에서 사사되었으며, 기준 및 한충 등도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 밖에 김구·박세희·박훈·홍언필(洪彦弼)·이자·유인숙(柳仁淑) 등 수십 명이 귀양을 갔으며, 사림파를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 형제 등도 파직되었다.&lt;br /&gt;
&lt;br /&gt;
기준은 조광조의 제자였으나, 정응은 조광조의 제자가 아니었으므로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체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해 11월 정응을 비롯한 홍문관 관원들은 연명으로 상소하여, “일을 같이 한 사람들이 이미 죄를 받았으니, 우리들도 감옥에 가서 그 죄를 함께 받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중종실록』중종 14년 11월 16일] 이에 중종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얼마 후인 12월 조광조 일파를 추가 색출하는 과정에서 정응도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충청도 부여(扶餘)로 유배되었다.[『중종실록』중종 14년 12월 16일,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상권] 그리고 1522년(중종 17) 7월 장독(杖毒 : 곤장을 맞은 여독)으로 유배지 부여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33세였다.[『중종실록』중종 17년 7월 29일, 『비문』]&lt;br /&gt;
&lt;br /&gt;
=='''성품과 일화'''==&lt;br /&gt;
&lt;br /&gt;
정응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성품과 행실이 순수하였으며, 문장과 지절(志節)로 세상에 이름났다.[『해동잡록(海東雜錄)』 권6, 「정응묘표」] 전한(前漢)의 [[고문(古文)]]을 문장의 기본으로 삼았으므로, 시문으로 일가견을 이루었다. 당시 사람들은 정응과 기준을 ‘문학의 쌍벽’이라고 불렀다.[『국조보감(國朝寶鑑)』 권20] 정응은 사림파의 영수인 조광조로부터 크게 쓰일 인물로 촉망을 받았으나, 기준처럼 조광조의 제자가 아니었다. 만약 그가 훈구파의 사장파에 합류하였다면, 소세양과 문장을 겨룰 만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정응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522년(중종 17) 7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찍이 개 한 마리를 길렀었는데, 그가 죽자 그 집안 식구들이 애통해 하니, 그 개도 슬피 부르짖으며 3일 동안 밥을 먹지 않다가 죽었으므로, 듣는 자들이 슬퍼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중종실록』중종 17년 7월 29일]&lt;br /&gt;
&lt;br /&gt;
=='''묘소와 후손'''==&lt;br /&gt;
&lt;br /&gt;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강올리(綱兀里)에 있는데, 묘표(墓表)가 남아있다.[「정응묘표」]&lt;br /&gt;
&lt;br /&gt;
첫째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부사(府使)신염(申濂) 딸인데, [[영의정(領議政)]][[신숙주(申叔舟)]]의 후손이다. 둘째 부인 연일 정씨(延日鄭氏)는 [[정랑(正郞)]]정완(鄭浣)의 딸이다. 후사가 없었으므로, 여동생의 아들 의양령(義陽令)이중손(李仲孫)이 제사를 맡아서 그 기일(忌日)에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정응묘표」]&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중종실록(中宗實錄)』      &lt;br /&gt;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lt;br /&gt;
*『국조방목(國朝榜目)』      &lt;br /&gt;
*『고봉집(高峯集)』      &lt;br /&gt;
*『국조보감(國朝寶鑑)』      &lt;br /&gt;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lt;br /&gt;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lt;br /&gt;
*『동각잡기(東閣雜記)』      &lt;br /&gt;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lt;br /&gt;
*『임하필기(林下筆記)』      &lt;br /&gt;
*『해동잡록(海東雜錄)』      &lt;br /&gt;
*『극원유고(屐園遺稿)』      &lt;br /&gt;
*『남계집(南溪集)』      &lt;br /&gt;
*『문곡집(文谷集)』      &lt;br /&gt;
*『사재집(思齋集)』      &lt;br /&gt;
*『송재집(松齋集)』      &lt;br /&gt;
*『은봉전서(隱峯全書)』      &lt;br /&gt;
*『음애집(陰崖集)』      &lt;br /&gt;
*『정암집(靜菴集)』      &lt;br /&gt;
*『지퇴당집(知退堂集)』      &lt;br /&gt;
*『학포집(學圃集)』      &lt;br /&gt;
&lt;br /&gt;
[[분류:인물]][[분류:정치·행정가/관료/문신]][[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중종]]&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