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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빈이씨(靖嬪李氏)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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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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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정빈이씨|한글표제=정빈이씨|한자표제=靖嬪李氏|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왕족/후궁|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숙종~경종|집필자=김가람, 황선희|자=|호= 연호(延祜) |봉작= 정빈이씨(靖嬪李氏) |시호= 온희(溫僖) |출신=왕족|성별=여자|출생=1694년(숙종 20)|사망=1721년(경종 1)|본관=함양(咸陽)|주거지= 서울 |묘소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수길원|증조부= 이언량(李彦良) |조부= 이신선(李信瑄) |부= 이후철(李後哲) |모_외조=김해 김씨(金海金氏)|형제=|처_장인= 영조(英祖) →(자녀)1남 2녀|자녀=(1자)진종(眞宗) : 효장세자(孝章世子) (1녀)? (2녀)화순옹주(和順翁主) : 김한신(金漢藎)의 처|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0990|실록연계=}}&lt;br /&gt;
&lt;br /&gt;
=='''총론'''==&lt;br /&gt;
&lt;br /&gt;
[1694년(숙종 20)~1721년(경종 1) = 28세]. 조선의 21대 왕인 영조(英祖)의 후궁이자, 추존왕 진종(眞宗)의 어머니. 궁호는 연호(延祜)이고, 시호는 온희(溫僖)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후철(李後哲)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사과(司果)]] 김매일(金梅一)의 딸인데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었다. 할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된 이신선(李信瑄)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이언량(李彦良)이다.&lt;br /&gt;
&lt;br /&gt;
=='''영조의 후궁'''==&lt;br /&gt;
&lt;br /&gt;
이정빈(李靖嬪)은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延礽君)이 사저(私邸)에 있던 시절 얻은 후궁으로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남아 있는 기록은 많지 않다. 이정빈은 1711년(숙종 37) 8세의 나이에 궁에 들어왔으며, 이후 [[동궁(東宮)]]에 소속되었는데, 당시 동궁은 경종(景宗)이었다. 이때 이정빈이 어떻게 영조의 승은을 입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훗날 진종이 되는 이성경(李聖敬)이 1719년(숙종 45) 2월 15일에 태어난 것으로 보아,[『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4년 11월 26일] 1718년(숙종 44) 초여름에 이정빈은 영조의 승은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이성경을 가졌을 때 이정빈은 꿈에서 봉황과 같은 상서로운 새와 금빛 거북이를 보았다고 전해진다.[『영조실록』영조 4년 11월 26일] 이후 이정빈은 딸 둘을 더 낳았고, 1721년(경종 1)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품계는 소훈(昭訓)이었다.[『경종실록(景宗實錄)』경종 2년 5월 13일]&lt;br /&gt;
&lt;br /&gt;
그리고 같은 해 연잉군은 후손이 없는 경종의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어 궁에 들어갔으며, 그 해 겨울 이영빈의 아들인 이성경이 궁에 따라 들어갔다.[『경종실록』경종 1년 8월 20일, 경종 1년 8월 21일, 경종 1년 9월 27일, 『영조실록』영조 4년 11월 26일] 이어 1724년(영조 즉위년) 영조가 즉위하면서 이성경은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고, 이듬해인 1725년(영조 1) 2월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다.[『영조실록』영조 즉위년 11월 3일, 영조 1년 2월 25일, 영조 4년 11월 26일] 그리고 며칠 후 그의 생모는 정빈(靖嬪)으로 추증되었는데, 당시 이정빈은 [[소원(昭媛)]]의 품계를 갖고 있었다.[『영조실록』영조 1년 2월 27일]&lt;br /&gt;
&lt;br /&gt;
한편 이정빈의 죽음은 정치적인 사건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경종의 측에 있던 [[소론(少論)]]이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요구하던 [[노론(老論)]]을 축출하고자 &amp;lt;목호룡(睦虎龍)의 고변&amp;gt; 사건을 일으켰을 때, 고변의 내용 가운데 당시 이정빈이 노론의 독살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화가 난 연잉군이 정국을 뒤집어 [[남인(南人)]]을 불러들이려 한다는 소문을 노론이 내고 있다고 목호룡은 고변하였다.[『경종실록』경종 2년 3월 27일, 경종 2년 5월 13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영조 즉위년 11월 10일] 게다가 당시 사건의 조사 보고서인 임인옥안(壬寅獄案)에는 역적의 수괴로 연잉군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1741년(영조 17) 영조의 명에 따라 소각되는 바람에 자세한 내용은 파악하기 어렵다.[『영조실록』영조 17년 9월 25일] 사실 정국을 뒤집으려 한다는 소문과 역적의 수괴라고 언급되는 상황은 영조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노론은 역모를 일으키려 하였다며 대대적인 숙청을 당하였고, 영조는 소론 온건파와 남인 청류당(淸流黨)의 도움을 받아 큰 탈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영조는 더 이상 정치적 사건에 휩쓸리지 않도록 처신에 주의하여야만 하였다. 이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노론을 등용하고,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하였다. 이때 노론의 영수인 민진원(閔鎭遠)은 당시 이정빈을 독살한 사람으로 동궁 주방 나인이 거론되었는데, 당시에는 영조가 사저에 있었기 때문에 동궁 주방 나인은 있을 수 없다며 이 고변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영조가 동의를 표하고, 이정빈의 죽음에는 아무런 의혹도 없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영조실록』영조 1년 3월 2일, 영조 1년 3월 26일]&lt;br /&gt;
&lt;br /&gt;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진종 추증'''==&lt;br /&gt;
&lt;br /&gt;
영조와 이정빈의 첫째 아들로 세자에 책봉된 이성경은 1728년(영조 4)에 1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영조실록』영조 4년 11월 26일] 이에 영조는 이성경에게 ‘효장(孝章)’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자혜롭고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을 효라 하고, 경신(敬愼)하고 고명(高明)한 것을 장이라 하였다.[『영조실록』영조 4년 12월 2일] 그리고 7년 후인 1735년(영조 11) 영조는 [[이영빈(李暎嬪)]]과의 사이에서 두 번째 아들을 낳았고, 이듬해인 1736년(영조 12) 원자를 왕세자로 책봉하였다.[『영조실록』영조 11년 1월 21일, 영조 12년 3월 15일] 이 왕세자가 훗날 뒤주에서 죽는 비극의 주인공인 사도세자(思悼世子), 즉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정조(正祖)의 친아버지이다. 장헌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총명하여 아버지 영조의 기대를 많이 받아 15세가 되던 1749년(영조 25)부터 대리청정을 하였다.[『영조실록』영조 25년 1월 27일] 그러나 이러는 가운데 영조와 장헌세자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결국 1762년(영조 38) 영조의 명을 받은 장헌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영조실록』영조 38년 윤5월 21일] 그리고 2달 여 후에 영조는 세손, 즉 장헌세자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이어 2년 후인 1764년(영조 40)에는 왕세자를 자신의 첫째 아들인 효장세자의 후사로 입적하였다. 동시에 영조는 왕세자에게 장헌세자를 추숭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영조실록』영조 40년 2월 20일, 영조 40년 9월 26일]&lt;br /&gt;
&lt;br /&gt;
효장세자의 후사가 된 정조는 1776년(정조 즉위년) 즉위 직후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숭하고,[『정조실록(正祖實錄)』정조 즉위년 3월 19일] 1778년(정조 2) 진종의 생모인 이정빈에게 영조의 유지에 따라 임금을 낳은 후궁으로 대접하여 궁호(宮號)와 원호(園號), 그리고 [[시호(諡號)]]를 내렸다. 궁호는 연호(延祜)이고, 원호는 수길(綏吉)이며, 시호는 온희(溫僖)이다.[『정조실록』정조 2년 3월 18일, 『일성록(日省錄)』정조 2년 1월 30일]&lt;br /&gt;
&lt;br /&gt;
=='''묘소와 후손'''==&lt;br /&gt;
&lt;br /&gt;
이정빈의 무덤은 처음에는 정빈묘(靖嬪墓)라 하였으나, 1778년 이정빈이 임금을 낳은 후궁으로 인정받으며 [[수길원(綏吉園)]]으로 승격하였다.[『정조실록』정조 2년 3월 18일]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으며, 담장과 비석, 그리고 문인석(文人石) 등의 석물들이 남아 있다. 1991년 사적 제359호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같은 해에 [[경복궁(景福宮)]]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사당을 세우고 이정빈의 신주를 모셨는데, 이곳이 바로 [[연호궁(延祜宮)]]이다.[『정조실록』정조 2년 3월 18일, 정조 2년 6월 1일] 이후 1870년(고종 7) 연호궁은 [[장희빈(張禧嬪)]]과 이영빈, 그리고 성의빈(成宜嬪)의 신주와 함께 [[육상궁(毓祥宮)]]의 별묘(別廟)로 옮겨졌다.[『고종실록(高宗實錄)』 고종 7년 1월 2일] 이어 1908년(순종 2년) 개정한 제사 제도의 칙령에 따라 다른 후궁들의 신주도 육상궁으로 옮겨졌고,[『순종실록(純宗實錄)』 순종 1년 7월 23일] 1929년에는 [[덕안궁(德安宮)]]이 육상궁에 추가되면서 이곳은 7개의 신주를 모셨다는 의미로 ‘칠궁(七宮)’이라 불리게 되었다.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12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6년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이정빈은 영조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1남은 진종이다. 1녀는 어려서 세상을 떠났으며, 2녀는 [[화순옹주(和順翁主)]]로 월성위(月城尉)김한신(金漢藎)과 혼인하였다.[『영조실록』영조 8년 11월 29일] 한편 화순옹주는 1758년(영조 34) 1월 남편 김한신이 세상을 떠나자 곡기를 끊어버렸고, 영조가 화순옹주의 집에 방문하여 음식을 권하여도 듣지 않다가, 곧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영조실록』영조 34년 1월 4일, 영조 34년 1월 8일, 영조 34년 1월 17일] 이때 신하들이 영조에게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난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화순옹주의 정려(旌閭)를 청하였으나, 영조는 화순옹주가 비록 정절은 있을지 모르나, 부모에게는 불효한 것이므로 정려할 수 없다며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영조실록』영조 34년 1월 17일]&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경종실록(景宗實錄)』      &lt;br /&gt;
*『영조실록(英祖實錄)』      &lt;br /&gt;
*『정조실록(正祖實錄)』      &lt;br /&gt;
*『고종실록(高宗實錄)』      &lt;br /&gt;
*『순종실록(純宗實錄)』      &lt;br /&gt;
*『국조보감(國朝寶鑑)』      &lt;br /&gt;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lt;br /&gt;
*『일성록(日省錄)』      &lt;br /&gt;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lt;br /&gt;
*『능허관만고(凌虛關漫稿)』      &lt;br /&gt;
*『만기요람(萬機要覽)』      &lt;br /&gt;
*『임하필기(林下筆記)』      &lt;br /&gt;
*『학암집(鶴巖集)』      &lt;br /&gt;
*『한중록(閑中錄)』      &lt;br /&gt;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5.      &lt;br /&gt;
*박영규, 『환관과 궁녀』, 웅진 하우스, 2009.      &lt;br /&gt;
*지두환, 『영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      &lt;br /&gt;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개정신판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lt;br /&gt;
&lt;br /&gt;
[[분류:왕족]][[분류:후궁]][[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숙종~경종]]&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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