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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접주(接主)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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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28T11:00:58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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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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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09T17:44: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개념용어|대표표제=접주|한글표제=접주|한자표제=接主|대역어=|상위어=접(接), 포(包)|하위어=대접주(大接主)|동의어=|관련어=육임제(六任制)|분야=정치/정치운영/정변|유형=개념용어|지역=|시대=조선|왕대=|집필자=조성환|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597|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9030_002 『고종실록』 31년 9월 30일],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11015_001 『고종실록』 31년 11월 15일]}}&lt;br /&gt;
&lt;br /&gt;
1863년 무렵 처음 제정된 초기 동학교단의 접(接) 조직을 이끄는 리더.&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동학 조직이 확대됨에 따라 동학교도들 간에 자연스럽게 인맥이 형성되자 그 인맥을 관리하는 조직으로 접(接)이 생기게 되었다. 접의 규모는 보통 30~50호 정도인데, 이들을 이끄는 리더가 필요해져 접주(接主)를 임명하게 되었다. 접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복수의 접이 생김에 따라 그 상위 조직으로 포(包) 조직이 만들어졌는데, 포의 리더를 대접주(大接主)라고 불렀다.&lt;br /&gt;
&lt;br /&gt;
=='''내용 및 특징'''==&lt;br /&gt;
&lt;br /&gt;
원래 ‘접’이란 말은 ‘동아리’라는 의미이므로, ‘접주’는 ‘동아리의 장’에 해당한다. 접 조직의 특징은 그것이 지역 단위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인맥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접의 명칭도 그 구성원이나 접주의 거처를 중심으로 붙여졌다. 가령 ‘영해접’이니 ‘부중접’이니 하는 말은 영해나 부중을 중심으로 접이 조직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지역에 접주가 살거나 상대적으로 접원들이 많이 거처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이다.&lt;br /&gt;
&lt;br /&gt;
접주가 처음으로 임명된 것은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한 지 1년 뒤인 1863년 무렵이라고 한다. 동학 최초의 역사서인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 의하면, 1863년 2월 17일에 최제우가 포항에 있는 손봉조의 집에서 최초로 접주 16명을 임명했다고 한다. 동학의 접주 중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로는 전봉준과 김구를 들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핵심 인물인 전봉준은 고부접주로 알려져 있으며, 백범김구 역시 17세의 어린 나이에 동학에 입교하여 이듬해 황해도 팔봉접주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조선왕조실록』에는 동학도의 접주 김학여와 정원준을 붙잡아 처형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1894년 9월 27일에는 안성군의 동학도 두목 유구서와 접주 김학여, 진천의 동학도 김금룡 등 세 명을 체포하여 많은 백성을 모아 놓고 처형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9030_002 『고종실록』 31년 9월 30일]). 11월 15일에는 대관(隊官) 이겸제가 일본 군사와 함께 옥천 지방을 정탐하다가 비적의 접주 정원준을 붙잡아 쏘아 죽이고, 탄환 20두, 총 150자루, [[환도(環刀)]] 100개, 그리고 철창과 죽창 600개를 노획하였다고 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11015_001 『고종실록』 31년 11월 15일]).&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접 조직이 점점 커지고, 복수의 접이 생김에 따라 그것의 상위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때 생긴 것이 ‘포’이다. 가령 처음에 50호 내외였던 접이 점점 늘어나서 100호 정도가 되면 두 접으로 분리되고 접주도 두 명이 된다. 이런 식으로 점점 늘어난 접들은 제각각 독립적으로 운영되지만 최초의 접주와 인맥을 형성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집단을 이루는데, 이때 최초의 접주를 ‘큰접주’ 또는 ‘대접주’라고 불렀다.&lt;br /&gt;
&lt;br /&gt;
포에 관한 기록은 1884년부터 보이는데, 『시천교종역사』나 『시천교역사』에 의하면, 1884년의 최제우 탄신 기념제 때 각 포의 중간급 리더 82명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1893년 이후부터는 포가 완전히 동학의 단위 조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887년에는 접주제 외에 육임제가 만들어졌다. 육임은 ‘여섯 명의 리더’라는 의미로 교장(敎長)·[[교수(敎授)]]·도집(都執)·집강(執綱)·[[대정(大正)]]·[[중정(中正)]]으로 이루어져 있다. 육임은 접에는 두지 않고 대도소(大都所)와 각 포의 도소(都所)에만 두었는데, 그 역할은 주로 자문하는 일이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표영삼, 「접·포 조직과 남·북접의 실상」, 『한국학논집』25, 1994.      &lt;br /&gt;
*표영삼, 「접포 조직과 남북접」, 『동학연구』4, 1999.      &lt;br /&gt;
&lt;br /&gt;
[[분류:정치]][[분류:정치운영]][[분류:정변]][[분류:개념용어]][[분류:조선]]&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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