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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기경(李基慶)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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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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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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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이기경|한글표제=이기경|한자표제=李基慶|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가/관료/문신|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정조~순조|집필자=정주영, 김가람|자= 휴길(休吉) |호= 척암(瘠菴) |봉작=|시호=|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756년(영조 32)|사망=1819년(순조 19)|본관=전주(全州)|주거지=서울|묘소소재지=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증조부= 이진일(李震一) |조부= 이봉령(李鳳齡) |부= 이제현(李齊顯) |모_외조=동래 정씨(東萊鄭氏) : 정언빈(鄭彦賓)의 딸|형제=|처_장인=파평 윤씨(坡平尹氏) : 윤동벽(尹東壁)의 딸 →(자녀)2남 1녀|자녀=(1자)이정태(李廷泰) (2자)이정겸(李廷謙) (1녀)강시영(姜時永)의 처|유명자손=|저술문집=『벽위편(闢衛編)』, 『척암유고(瘠菴遺稿)』, 『척암만필(瘠菴漫筆)』|작품=「심진곡(尋眞曲)」, 「낭유사(浪遊詞)」|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166|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0016_001 『정조실록』 15년 10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1008_002 『정조실록』 15년 11월 8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1008_006 『정조실록』 15년 11월 8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1011_003 『정조실록』 15년 11월 11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1013_002 『정조실록』 15년 11월 13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1014_002 『정조실록』 15년 11월 14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1013_002 『정조실록』 15년 11월 13일],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111007_003 『순조실록』 1년 11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212002_001 『순조실록』 2년 12월 2일],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406023_001 『순조실록』 4년 6월 23일],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406026_003 『순조실록』 4년 6월 26일],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503022_004 『순조실록』 5년 3월 22일],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601016_004 『순조실록』 6년 1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604001_005 『순조실록』 6년 4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604027_002 『순조실록』 6년 4월 27일],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605004_002 『순조실록』 6년 5월 4일],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607012_001 『순조실록』 6년 7월 12일],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909011_004 『순조실록』 9년 9월 11일], [http://sillok.history.go.kr/id/kwa_11809020_008 『순조실록』 18년 9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wa_11401016_001 『순조실록』 14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총론'''==&lt;br /&gt;
&lt;br /&gt;
[1756년(영조 32)~1819년(순조 19) = 64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문신.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과 이조 [[좌랑(佐郞)]] 등을 지냈다. 자는 휴길(休吉)이고, 호는 척암(瘠菴)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제현(李齊顯)이고, 어머니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통덕랑(通德郞)정언빈(鄭彦賓)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간원 [[사간(司諫)]]을 지낸 이봉령(李鳳齡)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진사(進士)]]이진일(李震一)이다. [[남인(南人)]]이었으나, 서학(西學) 즉 천주교에 대한 [[척사(斥邪)]] 활동에 앞장 선 대표적인 공서파(攻西派)이다.&lt;br /&gt;
&lt;br /&gt;
=='''정조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21살이 되던 1777년(정조 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이기경(李基慶)은 정약용(丁若鏞) 등과 함께 과거 준비를 하다가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예조 [[정랑(正郞)]]과 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다.[『일성록(日省錄)』정조 14년 2월 19일],[『일성록』정조 14년 4월 7일],[『방목(榜目)』],[『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권16,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이후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상(喪)을 치르던 중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에서 &amp;lt;진산사건(珍山事件)&amp;gt;이 발생하였다. 진산사건은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윤지충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신주를 불태우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른 사건으로, 제사로 표현되던 조선의 조상 숭배 사상을 부정하여 문제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진산사건이 발생한 것은 1791년 5월이었으나, 이 사건이 공론화 된 것은 그해 10월 사헌부에서 상소를 올리면서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0016_001 『정조실록』 15년 10월 16일]) 이후 홍낙안(洪樂安)은 사실 확인 후 장서(長書)를 작성하여 채제공(蔡濟恭)과 유생들에게 이 사건을 폭로하였다. 이 장서에는 1787년(정조 11)에 [[반촌(泮村)]]에서 천주교 교리 강습회를 하다가 발각된 &amp;lt;반회사건(泮會事件)&amp;gt;의 전말도 적혀 있었다. 그러자 채제공은 이 강습회를 직접 목격한 이기경을 심문하며 사실 확인을 하였다. 이후 조정에서는 진산사건의 핵심 인물인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1008_002 『정조실록』 15년 11월 8일]) 이러한 과정에서 천주교 교리 강습회에 참석한 [[이승훈(李承薰)]]뿐만 아니라 [[노론(老論)]]의 송익효(宋翼孝)와 정조 등은 이기경이 다른 속셈을 가지고 있다며 비난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1008_006 『정조실록』 15년 11월 8일]),([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1011_003 『정조실록』 15년 11월 11일])&lt;br /&gt;
&lt;br /&gt;
이에 이기경은 상소를 올려 자신은 서학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고, 동시에 반회사건의 전말 및 이승훈, 정약용 등 강습회 참가자들의 실명을 언급하며 서학과 관련된 이들의 처벌을 요청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1013_002 『정조실록』 15년 11월 13일]) 그러나 이 상소는 이기경처럼 남인이면서 공서파인 홍인호(洪仁浩)에게조차 갈등을 일으키려는 목적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1014_002 『정조실록』 15년 11월 14일]) 결국 이기경은 상 중임에도 상소를 올렸고, 상소에 사용된 말들이 패악스러웠다는 비난을 받아 공서파 중에서는 유일하게 함경도 경원부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1013_002 『정조실록』 15년 11월 13일]) 그리고 1794년(정조 18)에 해배되어 이듬해인 1795년(정조 19)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순조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801년(순조 1) 나이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섭정을 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사교(邪敎)를 근절하기 위하여 서학을 믿는 이들을 처벌하는 &amp;lt;신유박해(辛酉迫害)&amp;gt;를 일으켰다. 그런 가운데 박해를 막기 위하여 프랑스 군대를 끌어들여 조선 정부에게 압력을 행할 것을 요청하려고 한 &amp;lt;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amp;gt;이 발생하면서, 남인 가운데 서학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친서파(親西派) 인물들이 많은 곤경에 빠졌다. 이때 이기경은 사헌부 [[장령(掌令)]]으로서 채제공의 관작 추탈을 주장하였고, 서학과의 관계로 이미 유배를 떠난 정약용과 정약전(丁若銓) 등도 다시 국문할 것을 청하는 등 적극적인 척사 활동을 펼쳤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0111007_003 『순조실록』 1년 11월 7일])&lt;br /&gt;
&lt;br /&gt;
이후 사헌부 [[집의(執義)]] 등을 역임하던 가운데, 1804년(순조 4) 6월 정순왕후가 다시 수렴청정을 하려 하자 이기경은 이에 반대하다가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05년(순조 5)에 해배가 되어 1806년(순조 6)에는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 및 사헌부 집의를 역임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0212002_001 『순조실록』 2년 12월 2일]),([http://sillok.history.go.kr/id/kwa_10406023_001 『순조실록』 4년 6월 23일]),([http://sillok.history.go.kr/id/kwa_10406026_003 『순조실록』 4년 6월 26일]),([http://sillok.history.go.kr/id/kwa_10503022_004 『순조실록』 5년 3월 22일]),([http://sillok.history.go.kr/id/kwa_10601016_004 『순조실록』 6년 1월 16일]),([http://sillok.history.go.kr/id/kwa_10604001_005 『순조실록』 6년 4월 1일]) 그런데 이 해에 1804년(순조 4)에 대역부도죄로 국문 중 사망한 권유(權裕)를 두둔하던 현중조(玄重祚)와 정언인(鄭彦仁)의 배후가 이기경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그는 다시 운산(雲山)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0604027_002 『순조실록』 6년 4월 27일]),([http://sillok.history.go.kr/id/kwa_10605004_002 『순조실록』 6년 5월 4일]) 이후 이기경은 척사 활동을 한다고 홍낙안과 함께 도당을 만들었으나 허울에 불과하다는 비난 등을 받다가, 1809년(순조 9)에 해배되어 돌아왔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0607012_001 『순조실록』 6년 7월 12일]),([http://sillok.history.go.kr/id/kwa_10909011_004 『순조실록』 9년 9월 11일]) 그러나 이후에도 심환지(沈煥之)에 대한 옹호 및 채제공 관작 추탈 주장 등의 이유로 1814년(순조 14)과 1818년(순조 18)에 탄핵을 받았다.[『순조실록』 14년 1월 16일, 1번째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wa_11809020_008 『순조실록』 18년 9월 20일])&lt;br /&gt;
&lt;br /&gt;
이기경은 64세가 되던 1819년(순조 19) 세상을 떠났는데, 후손들이 척사 활동과 관련된 글을 모은 『벽위편(闢衛編)』과 시문집인 『척암유고(瘠菴遺稿)』와 『척암만필(瘠菴漫筆)』 등을 편찬하였다.&lt;br /&gt;
&lt;br /&gt;
=='''성품과 일화'''==&lt;br /&gt;
&lt;br /&gt;
이기경의 성품에 대해서는 본래 음험하고 사나운 성격으로 분격하고 간특한 행동을 하여 남의 집안과 나라를 해쳤다고 전해진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1401016_001 『순조실록』 14년 1월 16일]) 또한 그의 척사 활동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이다. 그가 진산사건으로 유배되었다가 돌아온 후에 정약용은 “이기경이 풀려온 지 꽤 지나자 점차로 조정에 들어와 벼슬하게 되었는데 아는 친구로서 그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라고 하였다.[『여유당전서』권16, 「자찬묘지명」] 척사 활동을 하였던 이재기(李在璣) 역시 “홍낙안과 이기경이 곤궁해져 돌아갈 곳이 없게 되자, 계축년(1793) 후에 원백(元伯: 홍인호)에게 돌아갔다. 양쪽의 궁함이 서로 들어맞은 것이다.”라며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눌암기략(訥菴記略)』]&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러한 평가와 달리 이기경과 함께 척사 활동을 하였던 강준흠(姜浚欽)은 강직한 사람이라 다른 사람과 타협할 줄 몰랐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홍문관교리이공묘지명(弘文館校理李公墓誌銘)」&lt;br /&gt;
&lt;br /&gt;
=='''묘소와 후손'''==&lt;br /&gt;
&lt;br /&gt;
이기경의 묘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있으며, 강준흠이 그의 묘지명을 작성하였다.&lt;br /&gt;
&lt;br /&gt;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윤동벽(尹東壁)의 딸인데, 2남 1녀를 두었다. 1남 이정태(李廷泰)는 큰집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며, 2남 이정겸(李廷謙)은 목인규(睦仁圭)의 딸, 즉 목만중(睦萬中)의 손녀와 결혼하였다. 1녀는 강준흠(姜浚欽)의 아들로 이조 [[판서(判書)]]를 지낸 강시영(姜時永)과 혼인을 하였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정조실록(正祖實錄)』      &lt;br /&gt;
*『순조실록(純祖實錄)』      &lt;br /&gt;
*『방목(榜目)』      &lt;br /&gt;
*『일성록(日省錄)』      &lt;br /&gt;
*『눌암기략(訥菴記略)』      &lt;br /&gt;
*『벽위편(闢衛編)』      &lt;br /&gt;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lt;br /&gt;
*「홍문관교리이공묘지명(弘文館校理李公墓誌銘)」      &lt;br /&gt;
*홍이섭, 「『벽위편』 찬집자 이기경의 전기자료 - 강준흠찬「홍문관교리이공묘지명」의 소개」, 『최현배 선생 환갑기념논집』, 사상계사, 1954.      &lt;br /&gt;
*김가람, 「이기경의 척사론과 척사활동」, 서강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lt;br /&gt;
&lt;br /&gt;
[[분류:정치·행정가]][[분류:관료]][[분류:문신]][[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정조~순조]]&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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