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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영변진(寧邊鎭)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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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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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집단기구|대표표제=영변진|한글표제=영변진|한자표제=寧邊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영변대도호부사(寧邊大都護府使), 영변도(寧邊道), 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분야=정치/군사·국방/편제|유형=집단·기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조선|집필자=윤훈표|설치시기=1457년(세조 3)|폐지시기=|소속관서=|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2599|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1012002_002 『세종실록』 10년 12월 2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103026_004 『세종실록』 11년 3월 26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102005_005 『세종실록』 11년 2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12009_004 『세종실록』 17년 12월 9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403002_006 『세종실록』 24년 3월 2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109011_004 『세조실록』 1년 9월 11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310020_002 『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510015_001 『선조실록』 35년 10월 15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303029_004 『광해군일기』 3년 3월 29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07006_001 『인조실록』 3년 7월 6일], [http://sillok.history.go.kr/id/kqa_10403006_003 『효종실록』 4년 3월 6일], [http://sillok.history.go.kr/id/ksa_10711027_001 『숙종실록』 7년 11월 27일],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203013_004 『경종실록』 2년 3월 13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810020_005 『영조실록』 8년 10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210008_002 『영조실록』 22년 10월 8일]}}&lt;br /&gt;
&lt;br /&gt;
조선시대 평안도의 영변 지역에 설치한 지방 방위 조직인 진관.&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1428년 평안도의 연산부(延山府)와 무산현(撫山縣)을 병합하여 영변대도호부(寧邊大都護府: 한자 추가)라 칭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부사로 하여금 병마도절제사를 겸하게 하면서 병영을 두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격이 올라가 토관직도 설치되었다. 곧 군익도(軍翼道)체제로 편입되면서 영변도(寧邊道)가 수립되었다. 그 뒤 군익도체제의 전국 확대와 진관(鎭管)체제로의 개편 과정을 거쳐 1457년에 정식으로 진관이 세워졌다. 소속 진의 이동과 같은 약간의 변화를 겪은 뒤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지방 군제가 크게 바뀌었는데 병영이 안주로 옮겨가면서 위축되었다.&lt;br /&gt;
&lt;br /&gt;
=='''설립 경위 및 목적'''==&lt;br /&gt;
&lt;br /&gt;
1428년(세종 10) 평안도의 연산부와 무산현을 병합하여 영변대도호부(寧邊大都護府: 한자 삭제)라 칭하고, 부사(府使)와 판관(判官)을 두고, 병마도절제사로 하여금 부사를 겸임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012002_002 『세종실록』 10년 12월 2일]). 아울러 서반 토관직(土官職)을 설치하여 변민(邊民)이 기꺼이 이주해서 큰 진(鎭)을 이루도록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103026_004 『세종실록』 11년 3월 26일]). 이는 야인의 침입에 대비하면서 본격적인 북방 진출을 꾀하기 위해서였다.&lt;br /&gt;
&lt;br /&gt;
영변진(寧邊鎭)이 설치되자 곧 평안도의 군익도에 편입되어 처음 삭주도(朔州道)의 중익(中翼)에 속했다가 얼마 뒤 박천(博川)·안주(安州)·순천(順川)과 함께 안주도(安州道)의 중익으로 옮겨졌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102005_005 『세종실록』 11년 2월 5일]). 하지만 [[병영(兵營)]]이 있었기 때문인지 곧 영변도로 호칭이 바뀌면서 먼저 있던 순천·박천은 삭주도(朔州道)로 옮겨졌다. 그 대신 평양도(平壤道) 소속의 삼등(三登)·고강동(古江東)을 넘겨받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12009_004 『세종실록』 17년 12월 9일]).&lt;br /&gt;
&lt;br /&gt;
사군(四郡)이 설치된 이후 평안도의 중앙이 되어 연변(沿邊) 지역과 멀리 떨어지게 되자 적이 침입하면 구원하기 힘들어졌다. 이에 병영을 강계부(江界府)로 옮겼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403002_006 『세종실록』 24년 3월 2일]). 그에 따라 대도호부에서 도호부로 강등되었고, 판관이 혁파되었다. 조금 뒤에 다시 병영이 옮겨와 판도호부사가 병마도절제사를 겸하면서 판관을 다시 설치하였다[『세종실록』 29년 10월 29일].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영변도의 중익에 영변, 안주, 순천, 박천, 좌익에 성천(成川), 맹산(孟山), 은산(殷山), 양덕(陽德), 우익에 강동, 숙천(肅川), 자산(慈山), 영유(永柔)가 소속되었다.&lt;br /&gt;
&lt;br /&gt;
1450년(세종 32) 다시 병마도절제사를 없애고 관찰사가 겸임하게 했다가 1453년(단종 1)에 회복시켰다. 1455년(세조 1) 양계(兩界)의 군익도체제를 전국으로 확장하면서 연해뿐만 아니라 내륙에도 [[거진(巨鎭)]]을 두고 주변 고을을 분속시켰다. 영변도에는 중익에 영변·가산, 좌익에 희천·운산, 우익에 태천·박천이 소속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109011_004 『세조실록』 1년 9월 11일]).&lt;br /&gt;
&lt;br /&gt;
1457년에 군익도체제를 진관체제로 개편하면서 주요 지역을 거진으로 삼고 주변의 진들을 그 휘하에 소속시켰다. 이로 인해 영변진이 설치되었는데, 처음에 박천·개천·덕천·은산·맹산·희천이 영변진에 속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310020_002 『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그 뒤 박천이 의주진 소속으로 바뀌는 등의 변동을 거쳐 진관이 확립되었다. 이것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되었다.&lt;br /&gt;
&lt;br /&gt;
=='''조직 및 역할'''==&lt;br /&gt;
&lt;br /&gt;
『경국대전』에 의하면 정3품 영변대도호부사가 병마절도사를 겸하였다. 그에 소속된 운산·희천·박천에는 군수가 종4품의 병마동첨절제사를, 영변판관과 태천현감이 종6품의 병마절제도위를 겸하였다.&lt;br /&gt;
&lt;br /&gt;
중앙에 올라가 [[대열(大閱)]] 등에 참가했을 때에는 오위(五衛)에 소속되고, [[우위(右衛)]]였던 [[호분위(虎賁衛)]]의 전부(前部)에 속하였다. 가을과 겨울철 방어가 긴박할 때는 병마절도사가 보통 창주(昌州)로 가서 변란에 대비했으며, 판관이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홀로 진을 지키도록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510015_001 『선조실록』 35년 10월 15일]).&lt;br /&gt;
&lt;br /&gt;
광해군대에 부사용한교(韓嶠)가 올린 상소에 따르면, 압록강 일대 각 읍을 일위독진(一衛獨陣)으로 만들어 외적을 지키되, 본도(道)의 내지 황해도의 군사를 합하여 윤번제로 들어가 지키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변방에 경보가 있을 것을 대비해 안팎에서 서로 구원하고자 영변 등 5개의 진관을 설치하여 오위연진(五衛連陣)의 제도를 만들었다. 혹시라도 변성(邊城)이 수비를 못 하게 되면 주현의 군민이 각각의 소속 진관에 들어가 방어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303029_004 『광해군일기』 3년 3월 29일]).&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이후 지방 군제를 개편하면서 진관체제에도 변화가 생겼다. 광해군대에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던 [[박엽(朴燁)]]이 5진 대신 7진을 배치하면서 영변·성천·귀성·평양 등의 4진이 폐지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에 복구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07006_001 『인조실록』 3년 7월 6일]). 1627년(인조 5)에는 병영이 안주로 옮겨 가면서 급속히 침체되었다[『인조실록』(한 칸 띄움)11년 11월 17일 2번째기사]. 이후 노비가 주인을 살해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현(縣)으로 강등시키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qa_10403006_003 『효종실록』 4년 3월 6일]).&lt;br /&gt;
&lt;br /&gt;
하지만 방어의 요지였던 관계로 곧 영변진으로 회복되고, 천수진(天水鎭)이 휘하에 속하게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0711027_001 『숙종실록』 7년 11월 27일]). 대신 박천이 나가면서 진관의 소속 진들에 변동이 생겼다. 그 뒤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이르러서 운산·희천의 병마동첨절제사는 남았고 천수는 혁파되었으며, 병마절제도위는 모두 삭감되었다.&lt;br /&gt;
&lt;br /&gt;
한편 지방군을 강화하고자 영장제(營將制)를 도입하면서 처음에는 전임 영장을 두었다. 그러나 비용이 과다하다는 이유로 폐지하고 병자호란 이후에 하삼도, 즉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제외하고는 수령에게 영장을 겸임하게 했다. 1722년(경종 2) 청천강(淸川江) 남북의 영장을 9명에서 5명으로 줄이고 모두 토포사를 겸하게 하였다. 이때 영변진은 수령에게 수성장(守城將)을 겸하게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ta_10203013_004 『경종실록』 2년 3월 13일]). 하지만 다시 9명으로 늘어나면서 『속대전(續大典)』에 이르러 영변부사가 별후영장을 겸하도록 규정하였다. 아울러 토포사를 겸하게 되었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ua_10810020_005 『영조실록』 8년 10월 20일]), 안주의 경우에는 4부(部)를 설치하여 변방의 요새를 웅장하게 만들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2210008_002 『영조실록』 22년 10월 8일]).&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경국대전(經國大典)』      &lt;br /&gt;
*『속대전(續大典)』      &lt;br /&gt;
*『대전회통(大典會通)』      &lt;br /&gt;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lt;br /&gt;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lt;br /&gt;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 혜안, 1999.      &lt;br /&gt;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전기편 -』, 1968.      &lt;br /&gt;
*차문섭, 『조선시대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lt;br /&gt;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lt;br /&gt;
&lt;br /&gt;
[[분류:정치]][[분류:군사·국방]][[분류:편제]][[분류:집단·기구]][[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분류:조선]]&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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