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feed xmlns="http://www.w3.org/2005/Atom" xml:lang="ko">
		<id>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action=history&amp;feed=atom&amp;title=%EC%96%B8%EA%B0%80%EB%A6%AC%28%E5%BD%A6%E5%8A%A0%E9%87%8C%29</id>
		<title>언가리(彦加里) - 편집 역사</title>
		<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action=history&amp;feed=atom&amp;title=%EC%96%B8%EA%B0%80%EB%A6%AC%28%E5%BD%A6%E5%8A%A0%E9%87%8C%29"/>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C%96%B8%EA%B0%80%EB%A6%AC(%E5%BD%A6%E5%8A%A0%E9%87%8C)&amp;action=history"/>
		<updated>2026-07-15T11:25:08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generator>MediaWiki 1.27.3</generator>

	<entry>
		<id>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C%96%B8%EA%B0%80%EB%A6%AC(%E5%BD%A6%E5%8A%A0%E9%87%8C)&amp;diff=11645&amp;oldid=prev</id>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C%96%B8%EA%B0%80%EB%A6%AC(%E5%BD%A6%E5%8A%A0%E9%87%8C)&amp;diff=11645&amp;oldid=prev"/>
				<updated>2017-12-21T16:15:2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인물|대표표제=언가리|한글표제=언가리|한자표제=彦加里|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 병자호란(丙子胡亂), 심하(사르후[薩爾滸]) 전투, 어푸([額駙], efu), 양구리([楊古利], yangguri), 여진(女眞)|분야=정치/외교/외교사안|유형=인물|지역=중국|시대=건주여진～청/조선|왕대=건주여진～청/조선|집필자=이선애|이칭=어푸([額駙], efu),  양구리([揚古利], yangguri), 초품1등공(超品一等公, [jergi ci lakcaha ujui gung]), 무훈왕(武勳王)|성별=남|생년=1572년|몰년=1637년|본관=슈무루([舒穆祿], šumuru)씨|출신지=       훈춘(渾春) |관력=1등총병관(一等總兵官), 초품공(超品公)|가족관계=부: 랑주([郞柱], langju), 동생: 렁거리([楞額禮], lenggeri)|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6879|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oa_11309010_003 『광해군일기』 13년 9월 10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1405013_008 『광해군일기』 14년 5월 13일]}}&lt;br /&gt;
&lt;br /&gt;
후금의 개국공신 슈무루[šumuru, 舒穆祿]씨 양구리[yangguri, 楊古利]의 한자 이름.&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양구리는 두만강 하류의 훈춘(渾春) 지역에 세거해온 동해여진 후르카[hūrka, 庫爾喀] 계열의 여진인으로, 어린 나이에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에게 보내져서 시위(侍衛)로 활동하였고, 이후 신임을 받아 후금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양구리는 누르하치의 딸을 처로 맞이하여 사위를 의미하는 어푸([額駙], efu)로 불리었고, 만주 정황기(正黃旗)에 속하였다. 1619년 심하(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조선군 도원수강홍립(姜弘立) 등이 포로가 되었을 때 그들과의 교섭에 자주 참가하였고, 1621년 후금을 방문한 조선 사절 정충신(鄭忠信)과 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다. 1636년 12월 청 태종홍타이지([皇太極], hongtaiji)가 조선을 침공할 때 종군하였고, 이듬해 1월 광교산에서 전라도병마절도사김준룡(金俊龍)의 군대와 싸우던 중에 전사하였다.&lt;br /&gt;
&lt;br /&gt;
=='''가계'''==&lt;br /&gt;
&lt;br /&gt;
양구리의 아버지는 동해여진 후르카 부의 추장이던 랑주([郞柱], langju)였다. 랑주는 이후 부족인들에게 피살되었는데, 양구리의 모친이 양구리의 어린 동생 남타이([納穆泰], namtai)를 업은 채 일족을 이끌고 누르하치에게 갔다. 1등총병관(一等總兵官)을 역임하였던 무양공(武襄公)렁거리([楞額禮], lenggeri)는 그의 동생이었다. 그에게는 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둘째 아들인 탑첨(塔瞻)이 그의 뒤를 이어 초품공(超品公)을 세습하였고, 도르기 암반([內大臣], dorgi amban)이 되었다.&lt;br /&gt;
&lt;br /&gt;
=='''활동 사항'''==&lt;br /&gt;
&lt;br /&gt;
양구리는 누르하치를 따라 해서 여진 및 동해여진의 공격에 앞장섰고, 후금의 건국 이후 요동을 장악하는 데에 공로가 컸다. 특히 1599년 해서여진의 하다([哈達], hada) 부를 공격하면서 버일러 멍거블루([蒙格布祿], menggebulu)을 사로잡았고, 1619년에는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 총병두송(杜松)과 마림(馬林)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몽골의 버일러 자이사이([齋賽], jaisai) 부자를 생포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웠다. 요동의 중요 거점인 요양(遼陽)과 심양(瀋陽)을 공격할 때 종군하여 후금이 명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는 데에 기여하였고, 이후에도 통주(通州)·계주(薊州)·대동(大同)·선부(宣府) 등을 공격할 때도 종군하였다.&lt;br /&gt;
&lt;br /&gt;
양구리는 1619년 2월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후금을 공격할 때도 전공을 세웠는데, 이때 포로로 잡힌 조선군 지휘부와의 교섭에도 참가하였다. 1621년 만포첨사였던 정충신(鄭忠信)이 소롱귀(小弄貴)를 따라 후금을 방문하였을 때, 바두리([巴都禮], baduri)·다하이([大海], dahai)  등과 함께 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1309010_003 『광해군일기』 13년 9월 10일]). 이듬해에는 조선에 후금의 침입이 예상되면서 양구리에게 뇌물을 주어 이를 모면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1405013_008 『광해군일기』 14년 5월 13일]).&lt;br /&gt;
&lt;br /&gt;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양구리는 도로이 버일러([多羅貝勒], doroi beile),  요토([岳托], yoto)와 함께 전봉군의 세 번째 부대 3,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공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1637년 1월 청의 전봉군은 각지에서 남한산성으로 집결하던 근왕군과 수차례의 전투를 치렀는데, 전라도병마절도사김준룡은 광교산에서 청군을 수차례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양구리는 조선군과 싸우던 도중에 전사하였다.&lt;br /&gt;
&lt;br /&gt;
=='''묘소'''==&lt;br /&gt;
&lt;br /&gt;
양구리는 병자호란 때 조선에서 전사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무덤이 남한산성 인근에 마련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예친왕(豫親王) 도도([多鐸], dodo)가 그의 시신을 거두어 왔다고 한다. 홍타이지는 친히 그에게 제사하고 어의(御衣)를 내렸으며, 심양으로 돌아간 뒤에는 누르하치의 무덤인 복릉(福陵)에 배장(陪葬)하였다.&lt;br /&gt;
&lt;br /&gt;
=='''상훈 및 추모'''==&lt;br /&gt;
&lt;br /&gt;
1637년 11월 홍타이지는 양구리를 무훈왕(武勳王)으로 추봉(追封)하였고, 이후 순치제(順治帝)는 칙지를 내려 태묘(太廟)에 그를 배향하도록 하였다. 1698년 강희제(康熙帝)는 심양을 방문하였을 때 양구리에게 친제를 지내고, 1700년에는 비석을 세워 그의 공적을 새겼다고 한다. 1731년 옹정제(雍正帝)는 그의 후손에 대한 세습 작위를 정하여 1등영성공(一等英誠公)이라 하였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만문로당(滿文老檔)』      &lt;br /&gt;
*『청사고(淸史稿)』      &lt;br /&gt;
*『책중일록(柵中日錄)』      &lt;br /&gt;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 『만주실록 역주』, 소명출판, 2014.      &lt;br /&gt;
*Arthur W. Hummel,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1644～1912), Ch’eng Wen Publishing Company, 1972.      &lt;br /&gt;
*張建, 「淸武勳王戰歿史事考」, 『滿族硏究』, 2009年 2期.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amp;lt;html&amp;gt;&amp;lt;script&amp;g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amp;lt;/script&amp;gt;&amp;lt;input type=&amp;quot;button&amp;quot; value=&amp;quot;Graph&amp;quot; onclick=&amp;quot;reload();&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100%&amp;quot; height=&amp;quot;670px&amp;quot; src=&amp;quot;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16879&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분류:정치]][[분류:외교]][[분류:외교사안]][[분류:인물]][[분류:중국]][[분류:건주여진～청/조선]][[분류:건주여진～청/조선]]&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