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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심집(沈諿)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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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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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1-09T13:52: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심집|한글표제=심집|한자표제=沈諿|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가/관료/문신|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선조~인조|집필자=장준호|자= 자순(子順) |호= 남애(南崖) |봉작=|시호= 효간(孝簡) |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569년(선조 2)|사망=1644년(인조 22) 9월 26일|본관=청송(靑松)|주거지= 서울 |묘소소재지= 인천광역시 북구 |증조부= 심달원(沈達源) |조부= 심자(沈鎡) |부= 심우정(沈友正) |모_외조=광릉 안씨(廣陵安氏) : 안여경(安汝敬)의 딸|형제=(형)심현(沈誢)|처_장인=남양 홍씨(南陽洪氏) : 홍종록(洪宗祿) →(자녀) 1남|자녀=(자)심동구(沈東龜)|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0916|실록연계=}}&lt;br /&gt;
&lt;br /&gt;
=='''총론'''==&lt;br /&gt;
&lt;br /&gt;
[1569년(선조 2)~1644년(인조 22) = 76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예조 [[판서(判書)]]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지냈다. 자는 자순(子順)이고, 호는 남애(南崖)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목사(牧使)[[심우정(沈友正)]]이고, 어머니 광릉 안씨(廣陵安氏)는 목사(牧使)안여경(安汝敬)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선공감(繕工監)]][[첨정(僉正)]]을 지낸 심자(沈鎡)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지낸 심달원(沈達源)이다.&lt;br /&gt;
&lt;br /&gt;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596년(선조 29) [[정시(庭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방목(榜目)』] 1597년(선조 30) &amp;lt;[[정유재란(丁酉再亂)]]&amp;gt; 당시 가주서(假主書)를 역임하였고, 이듬해인 1598년(선조 31) [[홍문관(弘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예문관(藝文館)]][[대교(待敎)]]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30년 9월 12일, 선조 31년 7월 4일, 선조 31년 7월 14일] 이 무렵 명(明)나라의 찬획주사(贊畫主事)정응태(丁應泰)가 130여 년 전에 작성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근거로 조선이 그동안 일본과의 관계를 은폐하고 명나라를 우롱했으며, 일본을 끌어 들여 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을 침략하려 한다는 내용으로 만력제(萬曆帝)에게 참소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선조실록』선조 31년 9월 21일] 이에 영의정유성룡(柳成龍)을 비롯하여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헌국(李憲國),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윤돈(尹暾) 등이 더 이상의 오해가 생기기 전에 명나라 황제를 만나 정응태의 주장이 무고(誣告)라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선조실록』선조 31년 9월 24일] 이때 심집도 선조에게 서둘러 무고를 밝혀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선조실록』선조 31년 9월 24일]&lt;br /&gt;
&lt;br /&gt;
그리고 1604년(선조 37) 그는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에 제수되었고, 이어 그해 예조 [[정랑(正郞)]]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7년 윤9월 26일, 선조 37년 10월 15일] 1605년(선조 38) 1월에는 사간원 [[정언(正言)]]을 역임하였으며, 그해 2월에는 예조 정랑이 되었다가, 4월에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8년 1월 27일, 선조 38년 2월 1일, 선조 38년 4월 1일,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65 「예조판서심공신도비명병서(禮曹判書沈公神道碑銘幷序)」 이하 「심집신도비명」으로 약칭] 이어 1606년(선조 39)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었고, 1607년(선조 40) 죽산부사(竹山府使)에 제수되었다.[『선조실록』선조 39년 3월 1일, 선조 40년 윤6월 27일, 「심집신도비명」]&lt;br /&gt;
&lt;br /&gt;
광해군(光海君) 즉위 후 심집은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는데, 이듬해인 1609년(광해군 1) 사간원 정언유학증(兪學曾)이 조정(趙挺)과 [[구성(具宬)]]이 선조 때에 지은 죄를 이유로 들며 파직할 것을 청하는 일이 발생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즉위년 7월 2일, 광해군 즉위년 12월 22일, 광해군 1년 1월 4일] 광해군은 이미 선조 때에 해결된 일이라며 들어주지 않다가 유학증이 거듭 요청하자 결국 그들을 체차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1년 1월 4일, 광해군 1년 1월 6일] 이때 심집도 유학증과 같은 의견이라고 하면서 사직하기를 청하였고, 결국 체차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년 1월 7일, 광해군 1년 1월 8일] 그리고 은계찰방(銀溪察訪)에 임명되었는데, 일처리에 노련하고 본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광해군일기』광해군 1년 1월 11일, 광해군 2년 11월 22일]&lt;br /&gt;
&lt;br /&gt;
이후 [[해운판관(海運判官)]]과 양호조도사(兩湖調度使), [[군자감(軍資監)]][[정(正)]]을 역임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4년 6월 6일, 광해군 6년 5월 17일, 광해군 6년 8월 24일] 그리고 1615년(광해군 7) 5월 인정전(仁政展)에서 치러진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광해군에게 아마(兒馬) 1필을 하사받았다.[『광해군일기』광해군 7년 5월 15일, 광해군 윤8월 5일] 이어 고령현감(高靈縣監)과 [[접위관(接慰官)]]을 거쳐, 1617년(광해군 9) 1월 성균관 [[사예(司藝)]]가 되었다가 성균관 [[사성(司成)]]에 제수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7년 10월 14일, 광해군 9년 1월 8일, 광해군 9년 1월 26일, 광해군 9년 3월 26일] 그리고 그해 4월에는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이 되었으며, 이어 8월에는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9년 4월 25일, 광해군 8월 12일]&lt;br /&gt;
&lt;br /&gt;
1619년(광해군 11) 그가 의정부 사인으로 있던 그해 3월부터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을 겸하였으며, 9월에는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1년 2월 23일, 광해군 11년 광해군 3월 13일, 광해군 11년 9월 11일] 한편 그는 이듬해인 1620년(광해군 12) 의정부 사인으로 있을 때 동료들과의 상의 없이 친한 사람을 천거한 것이 문제가 되어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추고 당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12년 1월 9일, 광해군 12년 1월 10일] 이후 그는 도청(都廳)으로서 [[경덕궁(慶德宮)]]의 축성을 담당하였으며, 1622년(광해군 14) 오랫동안 궁 건설을 감독한 공로를 인정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고, [[영건도감(營建都監)]][[부제조(副提調)]]에 제수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2년 2월 23일, 광해군 14년 3월 9일]&lt;br /&gt;
&lt;br /&gt;
=='''인조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623년(인조 1) &amp;lt;[[인조반정(仁祖反正)]]&amp;gt; 후 심집은 병조 [[참지(參知)]]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선혜청(宣惠廳)]]과 재생청(裁生廳)도 겸직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년 3월 19일, 인조 1년 4월 5일, 「심집신도비명」] 1624년(인조 2) &amp;lt;이괄(李适)의 난(亂)&amp;gt;이 일어나자, 그는 어가를 공주(公州)로 호위하였는데, 이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았으며, 이어 여주목사(驪州牧使)와 판결사(判決使)를 역임하였다.[「심집신도비명」]&lt;br /&gt;
&lt;br /&gt;
그러던 가운데 1627년(인조 5) &amp;lt;[[정묘호란(丁卯胡亂)]]&amp;gt;이 발생하였다. 이에 심집은 인조를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피난을 갔으며, 아울러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겸하였다.[「심집신도비명」] 이때 윤훤(尹暄)이 전세를 불리하게 하였다는 죄로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사형되었는데, 그 효시(梟示)를 밤이 깊은 뒤에 하였다는 이유로 인조는 의금부 당상(堂上) 등을 잡아들였으며, 심집도 삭직(削職)시켰다.[『인조실록』인조 5년 2월 15일, 인조 5년 2월 16일] 그러나 이후 심집은 조선과 연계하여 후금을 공격하기 위하여 평안도 가도(椵島)에 진을 치고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3년 7월 26일, 『인조실록』인조 6년 8월 20일, 『계곡집(谿谷集)』 권22 「노정주본(虜情奏本)」] 모문룡은 1622년(광해군 14) 조선에 들어온 이래로 조선에 군량을 강요하고, 조공무역에 세금을 매겨 폭리를 취하는 등 전횡을 일삼아서 문제가 되고 있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4년 1월 4일, 『인조실록』인조 3년 1월 3일] 이때 심집이 접반사로서 모문룡의 부장진계성(陳繼盛)의 도움을 받아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인조실록』인조 6년 8월 20일, 「심집신도비명」] 그리고 그해 12월 심집은 특별히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1629년(인조 7) 1월에는 도승지가 되었다가 6월에는 형조 판서로 임명되었다.[『인조실록』인조 6년 12월 25일, 인조 7년 1월 18일, 인조 7년 6월 2일, 「심집신도비명」] 이어 12월에는 부모의 공양을 위하여 부모가 있는 근처의 수령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여 안변부사(安邊府使)가 되었다.[『인조실록』인조 7년 12월 15일]&lt;br /&gt;
&lt;br /&gt;
1633년(인조 11) 심집은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고, 1645년(인조 13)에는 공조 판서가 되었으며, 곧이어 이듬해인 1646년(인조 14) 1월에는 다시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다.[『인조실록』인조 11년 2월 13일, 인조 13년 12월 25일, 인조 14년 1월 12일] 이후 그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는데, 유백증이 적절하지 않은 인사라고 탄핵하였으나 인조가 이를 들어주지 않았으며, 그해 8월 또 다시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다.[『인조실록』인조 14년 6월 8일, 인조 14년 8월 14일] 한편 그해 겨울 &amp;lt;[[병자호란(丙子胡亂)]]&amp;gt;이 발생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청(淸)나라와의 휴전 교섭에 심집과 왕족인 능봉군(綾峰君)을 각각 대신과 인조의 동생으로 위장하여 참석시켰다.[『인조실록』인조 14년 12월 15일, 『인조실록』인조 14년 12월 16일] 그러나 이들이 가짜인 것이 탄로나면서 휴전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고, 전쟁이 끝난 후 이 책임을 물어 1648년(인조 16) 심집은 문외출송(門外出送)되었다가, 그해 12월 대사령(大赦令)으로 석방되었다.[『인조실록』인조 14년 12월 16일, 인조 15년 2월 12일, 인조 15년 12월 11일, 인조 16년 2월 10일, 인조 16년 12월 17일] 그리고 이듬해인 1639년(인조 17) 호종공신(扈從功臣)에 추록되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으며, 1640년(인조 18)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인조 18년 4월 18일, 「심집신도비명」] 1644년(인조 22) 9월 26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6세였다.[『인조실록』 22년 10월 1일]&lt;br /&gt;
&lt;br /&gt;
=='''성품과 일화'''==&lt;br /&gt;
&lt;br /&gt;
심집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효심이 깊어 어머니의 연세가 들자, 둘째 형 [[심현(沈誢)]]과 함께 동거하면서 봉양하였는데, 밤에도 형제가 번갈아가며 일어나 어머니의 안후를 보살폈으며, 명절이나 좋은 일이 있을 때 모든 물건을 구비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형제가 머리가 허옇게 센 나이에도 함께 예제(禮制)를 다했고, 제사 때는 미리부터 [[재계(齋戒)]]하여 어머니의 혼령을 보고 있는 것처럼 하였다. 큰형이 요절하자 형의 두 딸을 길러서 때맞추어 혼인시켰다. 또한 큰형의 사당과 묘소를 보수하고 자손에게 경계(警戒)를 남겨서 제사가 단절되지 않도록 하였다.[「심집신도비명」]&lt;br /&gt;
&lt;br /&gt;
종족간의 친목을 두텁게 하여 원족(遠族)까지 보살폈으므로 문 앞에는 신발이 항상 가득했고, 사람들은 심집의 의로움을 좋아했다고 한다. 평상시에 심집은 자제들에게 “효도란 백행(百行)의 근본이 된다. 『소학(小學)』에 그 [[절목(節目)]]이 자세히 구비되어 있으니, 읽어서 마음속에 간직하고 힘써 실천하여라. 이것을 미루어서 임금에게 충성한다면 비록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고 할 것이다.”라고 훈계하였다. 송시열(宋時烈)은 심집이 이렇게 자제들에게 훈계하였으므로, 자손들이 효도와 공경을 돈독히 행하는 것이 다른 이들과 달랐다고 평했다.[「심집신도비명」]&lt;br /&gt;
&lt;br /&gt;
인조 대에 어느 날 밤에 여러 대장(大將)들이 궐하(闕下)에 모여서 거짓으로 급한 경보를 고하고, 남산 봉화대에 불을 올려 대궐문을 열도록 요청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군정(軍情)의 이합(離合)을 시험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심집은 문을 굳게 닫고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수들은 심집의 처사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인조는 그가 원칙을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겼다고 전해진다.[「심집신도비명」]&lt;br /&gt;
&lt;br /&gt;
=='''후손 및 묘소'''==&lt;br /&gt;
&lt;br /&gt;
심집의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묘소는 금천(衿川) 흘리항(屹里項) 선영에 조성되었는데, 현재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이다. 이후 봉천 지역 개발에 따라 인천광역시 북구 선영으로 이장되었다.&lt;br /&gt;
&lt;br /&gt;
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직제학(直提學)]]홍종록(洪宗祿)의 딸로, 1남을 두었다. 아들 심동귀(沈東龜)는 [[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심집신도비명」]&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선조실록(宣祖實錄)』      &lt;br /&gt;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lt;br /&gt;
*『인조실록(仁祖實錄)』      &lt;br /&gt;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lt;br /&gt;
*『국조방목(國朝榜目)』      &lt;br /&gt;
*『계곡집(谿谷集)』      &lt;br /&gt;
*『동계집(桐溪集)』      &lt;br /&gt;
*『속잡록(續雜錄)』      &lt;br /&gt;
*『송자대전(宋子大全)』      &lt;br /&gt;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lt;br /&gt;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lt;br /&gt;
*허지은, 「정응태의 ‘조선무고사건’을 통해 본 조·명관계」, 『사학연구』76, 한국사학회, 2004.      &lt;br /&gt;
&lt;br /&gt;
[[분류:정치·행정가]][[분류:관료]][[분류:문신]][[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선조~인조]]&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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