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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심광수(沈光洙)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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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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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심광수|한글표제=심광수|한자표제=沈光洙|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가/관료/문신|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선조~현종|집필자=권민균|자= 희성(希聖) |호= 노연(魯淵) |봉작=|시호=|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598년(선조 31)|사망=1662년(현종 3) 5월 21일|본관=청송(靑松)|주거지= 서울 |묘소소재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행양방(杏楊坊)|증조부= 심전(沈銓) |조부=(양조부)심우승(沈友勝) (생조부)심우준(沈友俊)|부= 심액(沈詻) |모_외조=안동 권씨(安東權氏) : 권징(權徵)의 딸|형제=(동생)심광사(沈光泗)|처_장인=안동 권씨(安東權氏) : 권부길(權復吉)의 딸 →(자녀)1녀|자녀=(양자)심백(沈栢) (1녀)이진규(李震奎)의 처|유명자손=|저술문집=『가례보해(家禮補解)』|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0924|실록연계=}}&lt;br /&gt;
&lt;br /&gt;
=='''총론'''==&lt;br /&gt;
&lt;br /&gt;
[1598년(선조 31)∼1662년(현종 3) = 65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와 [[중추부(中樞府)]] 첨지부사(僉知府事), 공조 [[참의(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희성(希聖), 호는 노연(魯淵)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심액(沈詻)이며,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병조 판서에 증직된 [[권징(權徵)]]의 딸이다. 친할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심우준(沈友俊)이고, 양할아버지는 심우준의 동생으로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지낸 [[심우승(沈友勝)]]이다.&lt;br /&gt;
&lt;br /&gt;
=='''인조 시대의 활동'''==&lt;br /&gt;
&lt;br /&gt;
1627년(인조 5)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1628년(인조 6) 이귀(李貴)와 [[최명길(崔鳴吉)]]을 중심으로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을 임금으로 추존하려는 논의가 일어나면서, 이와 관련된 논의는 몇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6년 3월 8일, 인조 8년 8월 24일, 인조 8년 9월 9일, 인조 8년 12월 4일] 그런 가운데 1631년(인조 9) 인조는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원군 추숭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고, 이어 명(明)나라 황제에게 주청을 하겠다고 주장하였다.[『인조실록』인조 9년 4월 20일] 이에 대신들을 비롯하여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 예조 등에서 정원군의 추숭을 적극 반대하였고, 심광수 또한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한(漢)나라 이래로 생부를 추숭한 적은 없었다며 적극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인조실록』인조 9년 5월 2일, 『미수기언(眉叟記言)』 별집 권20 「노연심공묘갈명(魯淵沈公墓碣銘)」 이하 「노연심공묘갈명」로 약칭]&lt;br /&gt;
&lt;br /&gt;
1635년(인조 13)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때 봉림대군이 구우(瞿佑 : 명나라 초기의 유학자)의 『전등신화(剪燈新話)』에 대하여 묻자 심광수(沈光洙)가 “학문의 요점은 의리를 밝게 강론하여 밝히고 덕성을 양성하는 데 있습니다. 음탕하고 불경한 글은 사람의 지려(志慮)를 좀먹는 것이니, 이와 같은 글에 총명을 소모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노연심공묘갈명」]&lt;br /&gt;
&lt;br /&gt;
한편 1636년(인조 14) &amp;lt;[[병자호란(丙子胡亂)]]&amp;gt;이 일어나자 심광수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파천(播遷)하는 인조를 호종(扈從)하였다. 이후 적의 기세가 강성하여 성안에 포위되어 있었는데, 이때 적으로부터 왕세자의 인질 요구가 있었다. 그러자 심광수는 세자가 인질로 나갈 수 없는 의(義)를 말하고, 강력한 척화론(斥和論)을 주장하며 화의론자(和議論者)인 [[최명길(崔鳴吉)]]을 참형할 것을 요구하였다.[『인조실록』인조 14년 12월 18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5 「인조조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그러나 얼마 후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자, 심광수는 춘천으로 퇴거(退去)하여 거실 이름을 ‘졸락(拙樂)’이라 짓고 스스로를 노연(魯淵)이라 하며 은거하였다.[「노연심공묘갈명」] 그런 가운데 1647년(인조 25) 사헌부 [[지평(持平)]]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인조실록』인조 25년 8월 18일]&lt;br /&gt;
&lt;br /&gt;
=='''효종 시대의 활동'''==&lt;br /&gt;
&lt;br /&gt;
1649년(효종 즉위년) 산림은일(山林隱逸) 우대 정책에 의해 대폭적인 산림 수용이 이루어지면서 심광수는 사헌부 지평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진선(進善)]] 등에 임명되었으나, 이번에도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즉위년 10월 17일, 효종 즉위년 11월 22일, 「노연심공묘갈명」] 대신 사직소를 통하여 인조의 뜻에 거슬려 처벌을 받았던 이경여(李敬輿)와 [[홍무적(洪茂績)]], 그리고 이응시(李應蓍) 등의 사면을 주장하였다.[『효종실록』효종 즉위년 12월 3일] 그러다가 1650년(효종 1) 심광수는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면서 관직에 나아갔다.[『효종실록』효종 1년 10월 21일] 당시 인조의 국상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공주의 [[길례(吉禮)]]를 거행하려 하자, 심광수는 예문(禮文)에 “당사자와 주혼자(主婚者)가 기년(朞年) 이상의 상이 없어야 혼인을 할 수 있다”고 한 것을 들며 예에 어그러짐을 논하였다.[『효종실록』효종 1년 11월 5일]&lt;br /&gt;
&lt;br /&gt;
한편 심광수는 [[남인(南人)]]으로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자는 서인(西人)들의 논의를 적극 반대하였다.[『효종실록』 효종 1년 11월 18일]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상소와 이에 대한 논쟁은 인조 대부터 끊이지 않았는데, 영남(嶺南)에서 이에 대한 거짓 비답이 전파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관련자는 자살을 하였고, 사헌부 [[집의(執義)]]조형(趙珩) 등은 이 문제를 대역죄로 논하였으며, 의금부에서는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는 등 일이 크게 번지려 하자 심광수는 대역으로 다스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며 힘써 변론하였다.[『효종실록』효종 1년 윤11월 5일] 그 결과 역모와는 다른 성격의 사건이므로 죄인들을 서울로 데려와서 처벌하는 대신에 가둔 곳에서 주벌을 하는 것으로 사건이 매듭지어 졌다.[『효종실록』효종 1년 윤11월 5일, 「노연심공묘갈명」]&lt;br /&gt;
&lt;br /&gt;
1652년(효종 3)에 다시 사헌부 장령에 제수된 심광수는 치도팔조(治道八條)를 올렸다.[『효종실록』효종 3년 2월 8일, 「노연심공묘갈명」] 치도팔조에는 사물의 본체와 그 쓰임을 밝히고[明體用], 학교를 일으키며[興學校], 내외법을 엄하게 하고[嚴內外], 예양을 숭상하며[崇禮讓], 자신의 허물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好聞過], 헛된 이름을 버리고[去虛名], 실제 혜택을 추진하며[推實惠], 형제를 설치[設形制]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노연심공묘갈명」] 그러나 이후 이응시가 탄핵되는 과정에서 홀로 정계(停啓)하였다가, 이것이 문제가 되어 체직되었다.[『효종실록』효종 3년 12월 4일, 효종 3년 12월 5일, 효종 3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이듬해인 1653년(효종 4) 영의정이경석(李景奭)은 그 인품을 위에서도 이미 알고 있다며 심광수를 추천하였고, 이후 심광수는 [[장악원(掌樂院)]][[정(正)]]을 거쳐 1654년(효종 5) [[상의원(尙衣院)]] 정과 [[사복시(司僕寺)]] 정으로 임명되었다.[『효종실록』효종 3년 2월 8일, 효종 4년 윤7월 11일, 「노연심공묘갈명」] 그해 여름에 홍수가 나자 효종이 자책하며 [[구언(求言)]]하였는데, 심광수가 상소하여 “재변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잘못하여 일어난다.”고 하니, 효종이 “공의 격언은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심이 일어나도록 한다.”고 하였다.[「노연심공묘갈명」] 그리고 이해 6월 경연에 참가하여 유배당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들에 대한 선처를 건의하는 등 심광수는 당시 일반 사류들의 의견을 대변하기도 하였다.[『효종실록』효종 5년 6월16일] 이 해 11월에 다시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부모의 상으로 인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가례보해(家禮補解)』를 제작하였다.[『효종실록』효종 5년 11월 9일, 「노연심공묘갈명」] 그는 상을 마친 후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1658년(효종 9) 11월에 승정원 승지에 특제(特除)되었으며, 송시열(宋時烈)과 더불어 경연에 참가하여 효종을 보좌하였다.[『효종실록』효종 9년 10월 16일, 효종 9년 11월 27일, 「노연심공묘갈명」] 이듬해인 1659년(효종 10)에는 [[중추부(中樞府)]] 첨지부사(僉知府使)로 경연에 참가하였으며, 많은 응지소(應旨疏)를 올렸다.[『효종실록』효종 10년 윤3월 30일]&lt;br /&gt;
&lt;br /&gt;
=='''현종 시대의 활동'''==&lt;br /&gt;
&lt;br /&gt;
1659년(현종 즉위년) 현종이 즉위한 후 선왕이 높여 썼던 신하라 하여 경연관으로 대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노연심공묘갈명」] 그러나 이듬해인 1660년(현종 1)에 다시 공조 참의를 제수하자, 심광수는 포용하는 도량과 과단성 있는 실천을 정치의 요체로 들며 치도(治道)에 관하여 상소하였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1년 2월 21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1년 1월 28일, 현종 1년 3월 22일, 현종 1년 11월 6일]&lt;br /&gt;
&lt;br /&gt;
한편 이 해에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 문제를 결정하는 논의에서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이, 효종이 대통을 이은 것은 장남으로 이은 것이 아닌 까닭에 대왕대비의 [[복제(服制)]]를 1년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 큰 논쟁이 일어났다. 심광수는 이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그 논의가 예를 잃었으며 가(家)에서의 상례(喪禮)는 임금에게까지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종통(宗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3년설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숙종실록』숙종 1년 5월 2일, 「노연심공묘갈명」] 이후 심광수는 승정원 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현종실록』현종 1년 11월 6일, 「노연심공묘갈명」] 그리고 그는 교외에서 문밖 출입을 하지 않고 3년을 지내다가 1662년(현종 3) 5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나이 65세였다.[「노연심공묘갈명」]&lt;br /&gt;
&lt;br /&gt;
한편 1675년(숙종 1) 숙종(肅宗)은 심광수의 예론을 높이며 포장할 것을 주장한 윤휴(尹鑴)의 건의에 따라 이듬해인 1676년(숙종 2) 그를 이조 참판으로 증직하였다.[『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숙종 2년 1월 2일]&lt;br /&gt;
&lt;br /&gt;
=='''성품과 일화'''==&lt;br /&gt;
&lt;br /&gt;
심광수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총명, 박학하였으며 반드시 미리 실천한 다음 말을 하였고, 평생토록 명예를 위한 행동이나 바른 도리를 벗어난 칭찬을 싫어했다. 또 성품이 한결같아 다른 사람을 권면할 때는 스스로 힘쓰도록 격려하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자기 몸을 잘 지켰다.[「노연심공묘갈명」] 아울러 성격이 과격하지도 않고 남 하자는 대로도 않고 꿋꿋이 자기 길을 걸어 군자들의 사모 대상이었으며, 높은 자리에 있다고 아랫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다. 남의 위태로움을 자신의 이로움으로 삼는 일을 부끄러워하였다.[『백호전서(白湖全書)』 권18 「제노연심승지광수문(祭魯淵沈承旨光洙文)」]&lt;br /&gt;
&lt;br /&gt;
또한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즐기며 독서와 수행을 하였고, 점차 성장하면서 경서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광해군(光海君) 시기에 아버지 심액이 &amp;lt;계축옥사(癸丑獄事)&amp;gt;에 연루되어 절역(絶域)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동해 들판을 옮겨 다닐 때에 그의 나이가 16세였음에도 먼길에서 아버지와 함께 고생을 같이하였다. 이때 이명준(李命俊)도 바닷가로 유배되었는데, 심광수가 이명준을 늘 따라다니며 『주역(周易)』과 『시전(詩傳)』을 전수 받아 공부하였다고 전해진다.[「노연심공묘갈명」]&lt;br /&gt;
&lt;br /&gt;
=='''묘소와 후손'''==&lt;br /&gt;
&lt;br /&gt;
심광수는 수춘(壽春 : 현재의 춘천(春川))에서 1662년(효종 3) 5월 21일 사망하였다. 그 해 9월 12일 광주(廣州) 퇴촌에 안장했는데 현재의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행양방(杏楊坊)이다.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와 합장하였다.&lt;br /&gt;
&lt;br /&gt;
부인 안동 권씨는 가산군수(嘉山郡守)권경남(權慶男)의 손녀이자,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권부길(權復吉)의 딸이며, 자녀는 1녀를 두었다. 아들이 없어 조카인 심백(沈栢)을 양자로 삼았다. 딸은 이진규(李震奎)와 혼인하였다.[「노연심공묘갈명」]&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인조실록(仁祖實錄)』      &lt;br /&gt;
*『효종실록(孝宗實錄)』      &lt;br /&gt;
*『현종실록(顯宗實錄)』      &lt;br /&gt;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lt;br /&gt;
*『숙종실록(肅宗實錄)』      &lt;br /&gt;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      &lt;br /&gt;
*『미수기언(眉叟記言)』      &lt;br /&gt;
*『백호전서(白湖全書)』      &lt;br /&gt;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lt;br /&gt;
*『민족문화대백과사전』      &lt;br /&gt;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아름다운 날, 2009.      &lt;br /&gt;
&lt;br /&gt;
[[분류:정치·행정가]][[분류:관료]][[분류:문신]][[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선조~현종]]&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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