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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순령수(巡令手)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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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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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직역|대표표제=순령수|한글표제=순령수|한자표제=巡令手|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뇌자(牢子), 군뇌(軍牢), 공병대(工兵隊), 호위대(扈衛隊), 호위국(扈衛局)|분야=정치/군사·국방/편제|유형=직역|지역=|시대=|왕대=|집필자=서태원|제정시기=|폐지시기=1907년(융희 1)|소속관서=|관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5004|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ua_12801012_001 『영조실록』 28년 1월 12일]}}&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어가(御駕)나 각 군영의 고위 지휘관을 호위하면서 왕이나 군영의 최고 지휘관 명령을 군인들에게 전달하던 군사.&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순령수는 1637년(인조 15) 7월 『승정원일기』의 기사 등에서 확인되지만,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순령수는 중앙과 지방 군영에 설치되었다. 순령수는 [[뇌자(牢子)]]와 함께 보는 사람을 압도시켰으며 어가를 앞에서 호위하거나 군영의 고위 지휘관을 호위하였고, 왕이나 군영의 최고 지휘관 명령을 군인들에게 전달하였다. 정부는 순령수에게 죽 등의 음식이나 상을 주어 노고를 위로하였으며, 서총대(瑞蔥臺)에서 시행하는 조총 시험 등을 통해 과거 시험의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 곧 [[직부전시(直赴殿試)]] 등의 혜택도 주었다. 순령수는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기까지 각 군영의 설치·폐지에 따라 소속처 등이 변화하였는데, 맨 마지막으로 호위국에 소속되었다가 1907년(순종 즉위) 군대 해산 때 폐지되었다.&lt;br /&gt;
&lt;br /&gt;
=='''담당 직무'''==&lt;br /&gt;
&lt;br /&gt;
순령수는 『만기요람』에서 확인되는 ‘호위청에 10명, 용호영에 22명, 훈련도감에 111명으로 이 중 복마군이 6명, 금위영에 76명으로 이 중 복마군이 5명, 어영청에 91명으로 이 중 복마군이 6명’이었다. 충청수영에 12명 등 지방 군영에도 설치되었다. 장용영 순령수 115명은 서자지[書字的] 1명과 패두(牌頭) 1명을 비롯하여 ‘입번(入番) 46명, 대장소 39명, 도제조소 10명, 향색제조소(餉色提調所) 8명, 종사관소 5명, 복마군 5명’으로 구성되었다. 호위청 순령수는 매달 급료로 쌀 9말과 봄·가을의 피복비로 무명 4필을 받았다.&lt;br /&gt;
&lt;br /&gt;
순령수는 어가의 호위와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 등을 수행하였다. 즉 순령수 는 1752년(영조 28) 왕이 도성 안이나 당일에 되돌아올 수 있는 능(陵)으로 거둥하면 뇌자와 함께 각각 5쌍이 어가의 앞을 호위하였고([http://sillok.history.go.kr/id/kua_12801012_001 『영조실록』 28년 1월 12일]), [[영기(令旗)]]를 지니고 가서 1746년(영조 22) [[작문(作門)]]에 잡인을 들이지 말고 1756년 서수문·수구문을 닫지 말라는 영조의 명령을 군인들에게 전달하였다.&lt;br /&gt;
&lt;br /&gt;
어가의 앞을 시위한 순령수는 1840년(헌종 6) 무명[木] 1필, 1797년(정조 21) 왕명을 전달한 순령수는 무명 2필과 포(布) 1필, 어전(御前)에서 명령을 기다린 순령수는 무명 1필과 포 1필을 상으로 받았다. 하지만 명령을 잘못 전달하면 1731년(영조 7) 훈련도감 순령수가 곤장 20대를 맞은 것처럼 처벌을 받았다.&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순령수 5쌍은 왕이 거둥할 때 뇌자 5쌍과 함께 어가의 앞을 시위하였으나, 1730년(영조 6)을 계기로 왕이 도성 안이나 당일로 돌아올 수 있는 왕릉에 거둥할 때는 종전처럼 5쌍을, 그리고 왕이 먼 왕릉에 행차하여 대궐 밖에서 하룻밤을 묵을 경우에는 각각 10쌍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1886년(고종 23) 어가의 모든 거둥에 용호영 5쌍, 친군별영 15쌍 등 20쌍을 배치하였다.&lt;br /&gt;
&lt;br /&gt;
순령수는 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각 군영의 설치·폐지에 따라 소속처는 물론이고, 장용영 순령수가 1782년(정조 6) 6명에서 1793년(정조 17) 115명으로 증가한 것처럼 정원 등에도 변화가 있었다. 특히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으로 조선후기 군대가 모두 폐지된 후 협련군(挾輦軍)·협여군(挾轝軍) 등의 임무는 ‘공병대→호위군→호위대→호위국’으로 이속되었는데, 1907년(고종 44) 5월 18일 『대한매일신보』의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 기부자에 호위국 소속 순령수 70명의 성명이 기재된 것에서 순령수의 최종 소속처가 호위국임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순령수는 1907년 군대 해산 때 호위국과 함께 폐지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lt;br /&gt;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lt;br /&gt;
*『일성록(日省錄)』      &lt;br /&gt;
*『장용영대절목(壯勇營大節目)』      &lt;br /&gt;
*『만기요람(萬機要覽)』      &lt;br /&gt;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lt;br /&gt;
*서인한, 『대한제국의 군사 제도』, 혜안, 2000.      &lt;br /&gt;
*신명호, 「조선 후기 국왕 행행 시 국정 운영 체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17, 2001.      &lt;br /&gt;
*이왕무, 「조선 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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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분류:정치]][[분류:군사·국방]][[분류:편제]][[분류:직역]]&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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