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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선기대(善騎隊)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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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집단기구|대표표제=선기대|한글표제=선기대|한자표제=善騎隊|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장용영(壯勇營), 총위영(總衛營), 무위소(武衛所), 별장(別將), 선기장(善騎將)|분야=정치/군사·국방/편제|유형=집단·기구|지역=|시대=|왕대=|집필자=서태원|설치시기=|폐지시기=|소속관서=장용영(壯勇營), 총위영(總衛營), 무위소(武衛所)|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5001|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va_11701012_003 『정조실록』 17년 1월 12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2106102_001 『정조실록』 21년 윤6월 2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2210019_005 『정조실록』 22년 10월 19일],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202007_004 『순조실록』 2년 2월 7일]}}&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왕이 머무는 곳이나 어가(御駕)를 호위하던, 말을 잘 타거나 특별한 기예를 가진 군인.&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선기대는 왕의 친위부대인 정조대 [[장용영(壯勇營)]]·헌종대 [[총위영(總衛營)]]·고종대 [[무위소(武衛所)]] 소속의 말을 잘 타거나 특별한 기예를 가진 군인으로, 어가를 호위하거나 왕이 머무는 곳을 시위(侍衛)하는 임무 등을 담당하였다. 선기대는 [[별장(別將)]] 1명과 선기장(善騎將) 3명을 비롯하여 좌초·중초·우초의 3[[초(哨)]]로 구성되었는데, 초는 약 100명을 단위로 하는 군대 편제다. 대부분의 군인은 겸사복(兼司僕)과 [[양인(良人)]]이었으며 서울에 거주하였다. 정부는 어가를 호위한 선기대에게 쌀 등을 주어 노고를 위로하였고, 매달 시행하는 중순(中旬)이라는 시재(試才) 등을 통해 포(布)·무명[木] 등을 상으로 내려 무예를 열심히 습득하도록 격려하였다. 선기대는 1802년 장용영, 1849년 총위영, 1882년 무위영이 혁파될 때 함께 폐지되었다.&lt;br /&gt;
&lt;br /&gt;
=='''설립 경위 및 목적'''==&lt;br /&gt;
&lt;br /&gt;
장용영 내영에 설치된 선기대는 『장용영대절목』에 의하면 1787년(정조 11) 27명으로 시작하여 1793년에는 3초 345명의 조직을 갖추었는데, [[마대(馬隊)]]를 본떠 말을 타는 재간을 가졌거나 특별한 기예를 가진 자로 선발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701012_003 『정조실록』 17년 1월 12일]). 선기대는 왕이 행차할 때 어가를 전방 또는 후방에서 호위하거나, 왕이 머무는 곳의 문 밖에서 사방을 둘러싸서 왕을 시위하는 임무 등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아울러 장용영처럼 왕의 친위부대인 헌종대 총위영과 고종대 무위소의 선기대도 같은 목적에서 설치하였다.&lt;br /&gt;
&lt;br /&gt;
=='''조직 및 역할'''==&lt;br /&gt;
&lt;br /&gt;
선기대의 조직은 1880년(고종 17) 작성된 무위소의 『선기대군안(善騎隊軍案)』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선기대는 3초로 구성되었고, 최고 지휘관인 별장 1명과 선기장 3명을 비롯하여 좌초 120명, 중초 120명, 우초 120명 등이 소속되었다. 별장은 종2품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자로 임명하였고, 휘하에는 서자지[書字的] 4명과 패두(牌頭) 1명을 포함하여 42명이 배치되었다. 좌초·중초·우초를 지휘하는 3명의 선기장은 변방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당상관으로 선발하였으며, 1초에는 서자지·패두·표하군·인기수(認騎手)·고수(鼓手) 각각 1명, [[기총(旗摠)]] 3명, [[대총(隊摠)]] 9명을 비롯하여 총 120명이 설치되었다. 선기대 402명은 모집하거나 훈국·어영청·금위영·장막군·등롱군·속오군 등에서 이속되었으며, 신분은 겸사복(兼司僕) 114명, [[출신(出身)]] 4명, [[양인(良人)]] 284명이었고, 2명을 제외한 400명이 서울 출신이었다. 한편 장용영과 총위영의 선기대는 각 초의 전체 인원수 등에서 무위소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3군영 선기대의 조직은 매우 유사하다.&lt;br /&gt;
&lt;br /&gt;
선기대는 왕이 행차할 때 어가를 호위하거나 왕이 머무는 곳의 문 밖에서 시위하는 역할 등을 담당하였다. 실제로 1794년(정조 18) 정조가 현륭원에 행차할 때 장용영 선기대 100명은 보군 1초 등과 함께 어가의 뒤를 호위하였고, 1795년 정조가 경모궁에 거둥하였을 때 선기대 20명은 문 밖에서 주위를 둘러싸서 왕을 시위하였다. 아울러 1846년(헌종 12) [[대가(大駕)]]가 [[종묘(宗廟)]]로 행차할 때 총위영 선기대 1초는 훈국(訓局)의 마군 3초 및 보군 8초와 함께 대가의 후방을 호위하였고, 1875년(고종 12) 고종이 [[칙사(勅使)]]를 맞이하기 위해 거둥할 때 무위소 선기대 1초는 훈국 마군 1초와 함께 어가의 전방을 시위하였다. 이렇게 어가를 호위한 선기대에게는 1명당 쌀 2말을 주는 등의 조치로 노고를 위로해 주었다.&lt;br /&gt;
&lt;br /&gt;
아울러 서총대(瑞蔥臺)에서 유엽전(柳葉箭)이나 기추(騎芻) 등을 시험 보아 포·무명 등을 상으로 주고 매달 시행하던 시험인 중순 때 세 번 수석하면 별무사로 채용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2106102_001 『정조실록』 21년 윤6월 2일]). 또한 1초에서 5명 이상 급제자가 나오면 해당 지휘관의 품계를 올려 주는 등의 상을 줌으로써 무예를 진작시키고 조련의 질을 향상시키려 하였다.&lt;br /&gt;
&lt;br /&gt;
그 밖에 무위소 선기대 2초는 1882년 왕세자의 [[친영(親迎)]] 때 [[중군(中軍)]]의 통솔을 받으며 보군 600명과 함께 [[여(輿)]]를 앞뒤에서 호위하였고, 정조대 부료무사(付料武士) 2명의 통솔을 받는 선기대 20명은 입직(入直)하여 궁성을 순찰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장용영 선기대는 『장용영대절목』에 의하면 1787년(정조 11) 27명으로 시작하여 1788년 88명, 1791년 115명, 1793년 115명이 늘어나, 3초 345명의 조직을 갖추었다. 그러한 사실은 1798년 비변사의 주장이나([http://sillok.history.go.kr/id/kva_12210019_005 『정조실록』 22년 10월 19일]), 정조의 [[행장(行狀)]]에서 3초가 설치되었다는 지적을 통해 확인된다. 그러나 1802년 장용영이 혁파될 때 선기대 2초만 훈련도감의 마병에 환속된다는 점에서([http://sillok.history.go.kr/id/kwa_10202007_004 『순조실록』 2년 2월 7일]) 실제로는 3초를 설치하려던 방침과 달리 1초가 설치되지 않았거나 이미 1초가 다른 군영으로 이속된 것으로 추측된다.&lt;br /&gt;
&lt;br /&gt;
아울러 1846년(헌종 12) 장용영을 모방한 총위영이 창설되면서 훈국 마병을 이속시켜 선기대 3초 357명이 설치되었으나, 1849년 헌종이 죽은 후 총위영이 총융청으로 복원되면서 폐지되었다. 이어 1874년(고종 11) 장용영·총위영을 본뜬 무위소가 창설되면서 훈국·어영청·금위영에서 이속된 군인 등으로 선기대 3초 360명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1882년 무위소를 통합한 무위영이 혁파되면서 선기대도 폐지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lt;br /&gt;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lt;br /&gt;
*『일성록(日省錄)』      &lt;br /&gt;
*『장용영대절목(壯勇營大節目)』      &lt;br /&gt;
*배항섭, 『19세기 조선의 군사 제도 연구』, 국학자료원, 2002.      &lt;br /&gt;
*최효식, 『조선 후기 군제사 연구』, 신서원, 1995.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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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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