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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선과(禪科)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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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법제정책|대표표제=선과|한글표제=선과|한자표제=禪科|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도첩(度牒), 의승(義僧), 임진왜란(壬辰倭亂), 휴정(休靜), 유정(惟政), 양종(兩宗), 비변사(備邊司), 대선(大選),  대선(大禪), 선시(選試), 승과(僧科)|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법제·정책|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집필자=강호선|시행시기=명종, 선조|시행기관=예조, 비변사|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3033|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ma_10908018_002 『명종실록』 9년 8월 18일], [http://sillok.history.go.kr/id/kma_12104020_002 『명종실록』 21년 4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908004_001 『성종실록』 9년 8월 4일],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704012_002 『명종실록』 7년 4월 12일],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908013_002 『명종실록』 9년 8월 13일],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908018_002 『명종실록』 9년 8월 18일],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704020_003 『명종실록』 7년 4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6029_007 『선조실록』 26년 6월 29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7019_001 『선조실록』 26년 7월 19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12008_004 『선조실록』 29년 12월 8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0002_013 『선조실록』 26년 10월 2일]}}&lt;br /&gt;
&lt;br /&gt;
조선시대에 승려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 또는 임진왜란 당시에 공을 세운 승려들에게 내려 준 승려 자격증.&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에 선과(禪科)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먼저 명종대에는 승과(僧科)의 다른 이름으로 쓰였다. 그 뒤 선조 연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의승군 가운데 공을 세운 승려들에게 내려 준, 공식적으로 승려의 신분을 인정해 주는 일종의 자격증을 선과라 하였는데, 이 경우에는 도첩(度牒)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lt;br /&gt;
&lt;br /&gt;
=='''제정 경위 및 변천'''==&lt;br /&gt;
&lt;br /&gt;
승과로서의 선과는 조선시대에는 [[선시(選試)]]라고도 불렸다. 우리나라에서 승과는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승려가 되려는 후보자에게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 시행한 인증 시험이 아니라 이미 출가한 승려들을 대상으로 한 시험이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선과의 시작은 고려 광종대로 추정되는데, 관원을 선발하기 위해 과거를 실시하면서 승과도 함께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즉, 승과는 관료제와 승정(僧政)이라는 이원적인 제도를 통해 국가를 통치하려 한 고려 왕조의 특징이 반영된 것이다. 승과에 합격한 승려들에게는 과거 급제자에게 [[관계(官階)]]와 [[관직(官職)]]을 수여하듯이 승계(僧階)와 그에 따른 [[승직(僧職)]]을 내려 주었다. 불교 교단의 상층부는 승과 출신들로 구성되었으며, 국가에서 공인한 사찰의 주지 역시 승과 출신자들로 임명되었다. 이처럼 승과는 국가의 불교 교단 통제와 관리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제도였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에는 승과를 주로 [[선시(選試)]]라 불렀다. 『경국대전(經國大典)』「[[도승(度僧)]]」조에 관련 규정이 수록됨에 따라, 「도승」조가 삭제되는 중종대 이전까지는 국가의 공식적인 시험으로 시행되었다. 『경국대전』의 이 조항은 조선시대 전기에 불교 교단과 선교양종(禪敎兩宗)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중요한 근거였고, 연산군 대에 폐지된 승과가 명종대에 양종 체제의 복원과 함께 다시 시행될 수 있었던 핵심적인 근거였다.&lt;br /&gt;
&lt;br /&gt;
명종 연간에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비망기(備忘記)]]를 통해 이루어진 양종의 복립과 선과의 재개는 관료들과 성균관 생원 등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왔으나, 전례(前例)대로 예조의 관리 하에 시행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908018_002 『명종실록』 9년 8월 18일]). 하지만 문정왕후 사후에 선교양종 체제와 이를 기반으로 한 선과는 다시 혁파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2104020_002 『명종실록』 21년 4월 20일]). 원래 승과는 도첩을 받은 정식 승려를 대상으로 시험을 치러 합격자에게 승직을 내려 주는 제도였다. 고위 승려를 선발하여, 그들을 통해 교단을 관리하려 한 것이다. 그에 비해 명종대에 실시된 선과는 합격자에게 승직을 제수하는 것과는 별개로, 승려의 자질과 수를 관리하려는 목적에서 대부분의 응시자에게 승려 자격을 허락하는 방편으로 활용되었다.&lt;br /&gt;
&lt;br /&gt;
한편 선조대의 선과는 이전과 제정 경위와 목적이 달랐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명을 받은 휴정(休靜)은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걸고 의승군(義僧軍)을 모집해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성을 수축하는 등 큰 활약을 하였다. 조정에서는 승군의 공로를 치하하고, 또 의승군에 참여하거나 전공을 세울 동기 유발을 위해 1593년(선조 26)부터 선과첩을 내려 주었다. 원래 과거에 급제한 승려에게 주는 선과가 도첩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승려의 노동력을 활용하고, 그 반대급부로 출가자로서의 신분을 인정하는 방법은 조선후기 불교 시책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lt;br /&gt;
&lt;br /&gt;
=='''내용과 특징'''==&lt;br /&gt;
&lt;br /&gt;
승과로서의 선과는 『경국대전』 「도승」조에 그 규정이 수록되어 있는데, 선종과 교종에서 3년에 한번씩 실시하여 각각 30명씩 총 60명을 선발하였다. 선종에서는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과 『선문염송(禪門拈頌)』을, 교종에서는 『화엄경(華嚴經)』과 『십지론(十地論)』을 시험 과목으로 삼았다. 이러한 규정은 고려시대의 승과 전통을 계승한 조선초기의 시행 양상이 법규로 정착된 것이다.&lt;br /&gt;
&lt;br /&gt;
선시 즉 승과는 국가로부터 출가를 인정받은 승려만 응시할 수 있었으므로, 선시를 앞두고 [[승록사(僧錄司)]]에서 도첩의 추가 발급을 예조에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선시와 관련된 여러 업무를 승록사에서 담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승록사가 예조의 속아문(屬衙門)이 됨에 따라 과거(科擧)와 마찬가지로 선시 또한 예조에서 관리하였다.&lt;br /&gt;
&lt;br /&gt;
선시는 종파별로 시행하였는데, 예조의 관리가 파견되어 시험을 감독하였다. 또 [[문과(文科)]]의 [[향시(鄕試)]]와 같이 각 도에서 선종과 교종으로 나누어 승려를 선발해 승록사에 보고하면 그 가운데 1/3 정도를 최종적으로 선발했다고 한다. 선시에 합격하면 [[대선(大選)]]의 승계를 받았고 승진하여 [[중덕(中德)]]이 되었다. 중덕이 되면 [[판사(判事)]]의 서경과 [[대간(臺諫)]]의 [[고신(告身)]]을 거쳐 주지(住持)가 될 수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0908004_001 『성종실록』 9년 8월 4일]).&lt;br /&gt;
&lt;br /&gt;
선과가 재개된 1552년(명종 7)에는 예조 정랑양응태(梁應鮐)와 이언경(李彦憬)을 각각 선종과 교종의 본산(本山)인 [[봉은사(奉恩寺)]]와 [[봉선사(奉先寺)]]로 보내 선시를 시행하게 하였다. 이때 선종에서는 21명, 교종에서는 12명을 최종 선발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704012_002 『명종실록』 7년 4월 12일]). 명종 연간의 선시는 폐지 이전과 마찬가지로 식년시로 치러졌고, 예조에서 담당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908013_002 『명종실록』 9년 8월 13일]). 또 전례대로 [[초시(初試)]]를 통해 우선 선종과 교종에서 각각 100명씩을 선발한 뒤, 다시 [[복시(覆試)]]를 시행하여 최종 선발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908018_002 『명종실록』 9년 8월 18일]). 선시의 시험 감독 및 선발 과정에는 예조의 관원과 선교양종의 판사, 그리고 승과에 급제한 승려도 참여하였다. 그런데 연산군대에 양종이 혁파되고 중종대에 『경국대전』에서 「도승」조가 삭제된 뒤로는 도첩을 발급하지 않았으므로, 선과를 다시 시행할 때 무도첩승의 응시가 문제가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704020_003 『명종실록』 7년 4월 20일]). 이러한 상황에서 선과는 도첩을 내려 주는 방편이 될 수밖에 없었다.&lt;br /&gt;
&lt;br /&gt;
1566년(명종 21)에 선과가 혁파된 뒤 선조대에 임진왜란을 계기로 다시 선과가 등장하였으나, 이때는 시험이 아니라 도첩과 같은 일종의 자격증으로 사용되었다. 의승군이 전쟁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우는 등 여러 활약을 하면서 승군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생긴 조정에서는 적의 목을 벤 승군에게 선과를 내려 주도록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6029_007 『선조실록』 26년 6월 29일]). 특히 당시 승군을 이끌고 있던 [[도총섭(都摠攝)]]휴정과 [[총섭(摠攝)]]유정(惟政), 의엄(義嚴) 등에게 선과를 나누어 주게 하여 승군을 모집하고 통솔하기 수월하게 하였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7019_001 『선조실록』 26년 7월 19일]) [ 『선조실록』 29년 12월 5일 3번째기사], 선과의 발급을 통해 군량을 모으려 하기도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12008_004 『선조실록』 29년 12월 8일]). 그뿐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인력이 부족해 한양과 지방에 쌓여 있는 시체를 처리하기 어렵게 되자, 역시 승려들을 모집하여 시체와 유골을 잘 묻어 준 경우 선과를 주는 것으로 포상하려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0002_013 『선조실록』 26년 10월 2일]). 이러한 선과는 도첩제가 폐지된 상황에서 승려의 자격을 증명하는 일종의 신분증이 되어 도첩을 대신하였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국사편찬위원회 편,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두산동아, 2007.      &lt;br /&gt;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신구문화사, 2010.      &lt;br /&gt;
*이장희, 「임진왜란 중 의승군의 활동에 대하여」, 『사명당 유정』, 지식산업사, 2000.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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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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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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