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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지(司紙)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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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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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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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09T15:55: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직역|대표표제=사지|한글표제=사지|한자표제=司紙|대역어=|상위어=조지서(造紙署)|하위어=|동의어=|관련어=조지소(造紙所)|분야=정치/행정/관직·관품|유형=직역|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집필자=김삼기|제정시기=1466년(세조 12)|폐지시기=|소속관서=조지서|관품=종육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1377|실록연계=}}&lt;br /&gt;
&lt;br /&gt;
조선시대 종이를 만드는 관청인 [[조지서(造紙署)]]의 종6품직 관리.&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조선초 지폐[楮貨]용 종이가 각 지방에서 공납되자 두께가 제각기 달라 불편했다. 이러한 불편을 줄이기 위해 1415년(태종 15)에 조지소(造紙所)를 신설하였다. 조지소는 설치 후 저화용 종이를 생산하는 일보다 표전(表箋)·[[자문(咨文)]] 등 외교문서를 비롯하여 왕실과 중앙 관사에서 필요한 국가 수요의 종이를 생산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조지소는 양질의 종이를 생산했을 뿐만 아니라 전주와 남원의 종이 공납을 대신할 정도로 생산량이 확대되어 그 역할이 컸다. 특히 세종과 세조 연간에 조지소의 종이 생산은 가장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는 1466년(세조 12) 관제 개정 때 조지소를 조지서로 개칭하면서 종6품직의 사지(司紙)를 처음 신설하였다. 이때 [[지장(紙匠)]]의 정원도 74명에서 81명으로 확대되었다. 조지서에 사지를 두게 된 것은 종이 생산을 늘리고 관리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lt;br /&gt;
&lt;br /&gt;
=='''담당 직무'''==&lt;br /&gt;
&lt;br /&gt;
저화에 쓸 종이를 각 도에서 만들어 상납하자 두께가 서로 달랐다. 조선 태종은 한곳에서 종이를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1415년 경기에 조지소를 신설하였다. 조지소는 설치 후 [[호조(戶曹)]] 소속하에 두고 생산과 운영 관리를 유지하였다. 1466년 관제 개편 때 조지서로 개칭하여 [[공조(工曹)]]에 편입되었다.&lt;br /&gt;
&lt;br /&gt;
조지서는 운영·관리를 맡는 관리와 종이를 직접 생산하는 지장으로 구성된 관영(官營) 지소(紙所)이다. 사지는 1466년에 조지소가 조지서로 관제 개편되면서 처음 두게 되는 종6품직의 녹관이다. 1460년에 70명이었던 지장을 1466년 관제 개편 때 81명으로 확대하면서 사지를 처음 두게 되는데 이는 조지서의 종이 생산량을 늘리고 운영·관리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lt;br /&gt;
&lt;br /&gt;
조지서에는 사지 외에 정1품 도제조(都提調) 1명, 종1·2품 제조(提調) 2명, 종5품 별좌(別坐) 8명, 종6품 별제(別提) 4명, 종8품 공조(工造) 4명, 종9품 공작(工作) 2명 등의 녹관이 있었다.&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조지서에 사지를 두게 된 주된 이유는 종이의 생산이 활발하였던 시기에 운영·관리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조지서의 생산 활동이 침체되는 시기에는 사지가 감원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연산군은 1506년(연산군 12)에 조지서 사지를 혁파하고 [[무록관(無祿官)]]을 각각 1명씩 더 두라는 전교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사지가 조지서에서 완전히 혁파된 것은 아니었다. 그 예로 1515년(중종 10)에 조광조를 조지서 사지로 제수한 적이 있다.&lt;br /&gt;
&lt;br /&gt;
『속대전』 단계에서 제조가 1명으로 감축되었다가 『대전통편』 단계에서 다시 충원되면서 총융사가 겸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도 『속대전』 단계에서 사지 1명이 축소되고 별제는 1명이 증가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경국대전(經國大典)』      &lt;br /&gt;
*『속대전(續大典)』      &lt;br /&gt;
*『대전회통(大典會通)』      &lt;br /&gt;
*김삼기, 『조선시대 제지수공업 연구』, 민속원, 2006.      &lt;br /&gt;
&lt;br /&gt;
[[분류:정치]][[분류:행정]][[분류:관직·관품]][[분류:직역]][[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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