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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북극고도(北極高度)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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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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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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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개념용어|대표표제=북극고도|한글표제=북극고도|한자표제=北極高度|대역어=|상위어=천문(天文)|하위어=|동의어=북극고(北極高), 북극출지(北極出地), 위도(緯度)|관련어=간의(簡儀), 앙각(仰角), 이순지(李純之)|분야=문화/과학/천문|유형=개념용어|지역=|시대=|왕대=|집필자=안상현|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7262|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ga_11106011_002 『세조실록』 11년 6월 11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904015_003 『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08021_001 『정조실록』 13년 8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612007_005 『영조실록』 36년 12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0011_002 『정조실록』 15년 10월 11일]}}&lt;br /&gt;
&lt;br /&gt;
지평에서 수직으로 측정한 천구의 북극 앙각.&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지구 자전축의 북극이 향하는 방향인 천구의 북극까지 정북(正北)의 지평선에서 수직으로 측정한 앙각(仰角)을 뜻한다. 북극고(北極高) 또는 북극출지(北極出地)라고도 부르며, 관측지의 위도(緯度)와 같다.&lt;br /&gt;
&lt;br /&gt;
=='''내용 및 특징'''==&lt;br /&gt;
&lt;br /&gt;
북극고도는 관측지의 위도와 일치한다. 이 값에 따라 밤과 낮의 길이가 달라지고, 해 뜨는 시각과 해 지는 시각이 달라진다. 또한 일식을 계산할 때, 식의 진행 시각과 식분(食分)이 달라진다. 따라서 이 수치는 역법에서 가장 중요하게 측정되어야 하는 수치 가운데 하나이다.&lt;br /&gt;
&lt;br /&gt;
『국조역상고』에 따르면, 세종 초기에 역법 계산을 담당하던 관리인 윤사웅(尹士雄), 최천구(崔天衢), 이무림(李茂林)을 마니산, 백두산, 한라산에 파견하여 북극고도를 측정했음이 『관상감일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관측치는 당시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운관선생안』이나 『삼력청선생안』에도 같은 기록이 전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기록은 실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으므로 사실 여부를 검증할 방법이 없다.&lt;br /&gt;
&lt;br /&gt;
『세조실록』에 나오는 이순지(李純之)의 졸기(卒記)에 따르면, “세종이 문신(文臣)을 뽑아서 산법(算法)을 익히도록 하였는데, 이순지가 북극출지를 계산해보더니 38도강(度强), 즉 38+1/12도(度)라고 하자 세종이 이를 의심하였다가 때마침 중국 조정에서 온 사람이 『역서(曆書)』를 바쳤는데 거기에 고려의 북극출지가 38도강이라고 되어 있었으므로, 세종이 크게 기뻐하고 이순지에게 의상(儀象)을 교정하도록 명하였다”라고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1106011_002 『세조실록』 11년 6월 11일]). 이 기록을 근거로 조선초에는 한양의 북극출지가 38도강인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원사(元史)』「천문지(天文志)」에는 고려의 북극출지가 38도소(度少), 즉 38+1/4도라고 적혀 있다.&lt;br /&gt;
&lt;br /&gt;
세종이 의상, 즉 천문 관측기구를 제작하라고 명한 것은 1432년(세종 14)의 일이다. 세종은 북극고도를 정확하게 측정해야만 다른 관측기구들을 만들 수 있음을 인식하고 맨 먼저 간의(簡儀)를 만들라고 구체적으로 명했다. 이에 따라 정초(鄭招)와 정인지(鄭麟趾)는 옛 제도를 연구하고 이천(李蕆)이 공사를 감독하여, 먼저 나무로 본을 만들어 북극출지를 측정하였더니 38도소로 측정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904015_003 『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이 값은 『원사』「천문지」의 값과 일치한다. 이러한 측정치를 바탕으로 한양 기준의 주야 시각, 절기 시각, 일출몰 시각 등을 구현한 『칠정산』이 편찬되었다.&lt;br /&gt;
&lt;br /&gt;
『국조역상고』에 따르면, 1713년(숙종 39)에 청나라 사신 하국주(何國柱)가 한양을 방문하여 종로에다 대형 상한의(象限儀)를 설치하고 한양의 북극고도를 측정하여, 37∘ 39′ 15″를 얻었다. 이 관측치가 청나라의 『역상고성』에 이 실측값으로 수록되었다. 정조 때 김영(金泳)이 신법지평일구(新法地平日晷), 『신법중성기(新法中星記)』와 『신법누주통의(新法漏籌通義)』를 계산할 때도 이 북극고도 값을 사용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08021_001 『정조실록』 13년 8월 21일]). 또한, 조선후기의 유물인 앙부일구(仰釜日晷), 간평일구(簡平日晷), 혼개일구(渾蓋日晷) 등의 해시계를 제작할 때에도 이 수치가 사용되었다.&lt;br /&gt;
&lt;br /&gt;
북극출지가 관측지에 따라 다르며, 이 때문에 주야 시각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인식은 실록에 나오는 서명응(徐命膺)의 답변 내용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영조와 토론하던 중에 “북극출지는 매 250리마다 1도씩 차이가 나며, 주야 시각의 차이가 이것 때문에 발생한다. 한양의 북극출지는 38도이므로, 한양 이북에서는 250리마다 1도씩 더하므로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의 땅에서는 40도 정도가 되고, 이곳에서는 하지(夏至) 때 낮이 지극히 길어서 60각이 된다. 한양 이남에서는 매 250리마다 1도씩 감해야 하는데, 강진(康津)과 해남(海南)의 땅에서는 북극출지가 30도가 되어, 이곳은 하지에 낮이 가장 길 때 45각(刻)이 된다”고 답하고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3612007_005 『영조실록』 36년 12월 7일]).&lt;br /&gt;
&lt;br /&gt;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아들인 서호수(徐浩修)는 1791년(정조 15)에는 이 한양의 북극고도 값을 기준으로 하여 『팔도여도(八道輿圖)』에서 측정한 거리에 대한 비율로 팔도의 관찰사 감영 소재지의 북극고도와 절기 시각을 계산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0011_002 『정조실록』 15년 10월 11일]).&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조선초기 1437년(세종 19)에 간의로 측정한 결과 한양의 북극고도는 38도소 즉 38+1/4도(度)로 측정되었다. 이 값은 원주를 365+1/4도로 정의할 때의 수치이며, 『원사』「천문지」에 고려 북극출지로 기록되어 있는 값과 일치하였다. 조선후기에는 1713년에 청나라의 하국주가 한양의 종로에서 측정한 37∘ 39′ 15″가 사용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국조역상고(國朝曆象考)』      &lt;br /&gt;
*『사제역상고성(卸製厯象考成)』      &lt;br /&gt;
*『운관선생안(雲觀先生案)』      &lt;br /&gt;
*『삼역청선생안(三曆廳先生案)』      &lt;br /&gt;
*『원사(元史)』      &lt;br /&gt;
*『원사류편(元史類編)』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amp;lt;html&amp;gt;&amp;lt;script&amp;g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amp;lt;/script&amp;gt;&amp;lt;input type=&amp;quot;button&amp;quot; value=&amp;quot;Graph&amp;quot; onclick=&amp;quot;reload();&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100%&amp;quot; height=&amp;quot;670px&amp;quot; src=&amp;quot;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17262&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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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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