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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보부상(褓負商)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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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집단기구|대표표제=보부상|한글표제=보부상|한자표제=褓負商|대역어=|상위어=행상(行商)|하위어=대방(大房), 도접장(都接長), 반수(班首), 보상(褓商), 부상(負商), 황아장수|동의어=부보상(負褓商), 상려(商旅)|관련어=객상(客商), 공원(公員), 백달원(白達元), 보부상단(褓負商團), 보부상유품(褓負商遺品), 보부청(褓負廳), 보상객주(褓商客主), 부상객주(負商客主), 험표(驗標), 혜상공국(惠商公局),|분야=경제/산업/상업·무역|유형=집단·기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시대|왕대=철종, 고종|집필자=김순주|설치시기=19세기 중반|폐지시기=일제강점기 초|소속관서=       한성부, 비변사, 혜상공국, 상리국|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2559|실록연계=}}&lt;br /&gt;
&lt;br /&gt;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방문 판매를 주로 하던 행상 집단.&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보부상(褓負商)이란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합친 말인데 보상을 ‘봇짐장수’, 부상을 ‘등짐장수’라고 부른다. 보부상이라는 용어가 문헌에 등장한 것은 조선말기인 19세기 후반경이다. 보상이나 부상이란 용어 역시 19세기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혜상공국서』와 『한성부완문』 등 보부상 관련 문서를 보면 이들의 역사가 상고시대까지 올라간다고도 하였고, 이성계(李成桂)가 위화도 회군을 할 때 토산 사람 백달원(白達元)이 부하 800여 명의 보부상을 거느리고 와서 군량미를 운반했는데 조선이 성립한 후 태조이성계가 그들의 공로를 기억하고 행상권을 그들에게 전담시켰다고도 주장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나 병자호란 때도 이들이 전쟁을 적극 수행하여 난이 평정된 후에 그 공을 인정받았다고도 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보부상 조직이 언제 그 체제를 갖추게 되었는지는 문헌적 근거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렇다고 그러한 존재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들 특히 부상의 조직화는 조선후기 상업 발달과 관련지어 볼 때 장시가 전국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17세기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들이 남긴 유품으로만 보면 1845년 이후 군현 수령이 [[상고(商賈)]]에게 발급한 공원차정첩(公員差定帖)과 1851년에 작성된 『예산임방입의절목』이나 원홍주육군상무사(元洪州六郡商務社)의 『청금록』이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달리 고증할 길이 없다.&lt;br /&gt;
&lt;br /&gt;
보부상들의 공식적인 의례 행사에는 한식날 제사와 공문제 축제가 있다. 이들은 장을 처음 열 때도 공문제 축제와 같은 형식의 놀이를 담은 ‘난장’을 벌였는데, 그 이유는 이를 통해 많은 사람을 모을 수 있고 따라서 시장을 활성화할 수 있는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부상의 휴대품으로는 축작대 외에 골패(骨牌)와 체장[帖張] 등이 있고 특히 보상의 경우는 놋자[鍮尺]를 가지고 다녔다. 체장은 보부상의 소속을 증명해 주는 증명서 같은 것이다.&lt;br /&gt;
&lt;br /&gt;
=='''조직 및 담당 직무'''==&lt;br /&gt;
&lt;br /&gt;
원홍주육군상무사 보부상 조직의 명단인 『청금록』에 의하면 1851년 당시 대흥에 사는 임인손(林仁孫)이 당년 4월에 조령(朝令)을 받아 접장에 피선되었다고 하였다. 즉 그때 이미 부상들은 다음과 같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형성하고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o 1851년 당시 부상 조직&lt;br /&gt;
&lt;br /&gt;
중앙 : 팔도도공사장-충청좌우도 도접장-도본방-대방&lt;br /&gt;
&lt;br /&gt;
지방 : 반수(班首)-접장(接長)-본방(本房)-도수공원-공사원&lt;br /&gt;
&lt;br /&gt;
하위 : (장 단위) 대방-비방(俾房)-집사&lt;br /&gt;
&lt;br /&gt;
같은 해에 작성된 『예산임방입의절목』은 비단 예산 지역뿐만 아니라 임방조직이 있는 전국의 군현 어디에나 내려졌던 완문이다. 그 안에는 잘못을 행한 자에게 내리는 14가지 벌목(罰目)을 적어놓았는데 주로 조직원 간의 단결과 타인에 대한 예의와 배려, 그리고 시장의 질서 등을 강조하고 있는 바 이는 이들 스스로가 정부로부터 사회 불안적 존재가 아님을 인정받기 위한 노력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산임방입의절목』에는 조직의 허가 및 관리에 관한 관문서인 『한성부완문』이 붙어 있는데, 이는 정부가 이들 조직을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당시 이들 공식 조직의 기본 단위는 임방이었다.&lt;br /&gt;
&lt;br /&gt;
이때 상무사 본사는 서울 평시서 자리에 설치하고 사장-구관사장(句管社長)-부사장-사무장-부사무(副事務) 3명 등 간무(幹務) 인원을 두었으며 기타 세칙은 사장과 농상공부대신이 상의하여 정하도록 하였다. 각 도 관찰사가 분사장(分社長)이 되어 관할하는 지방 상무사 임원 조직은 영위(領位)-반수-접장-부접장-본방-공사장-명사장(明査長)-도공원(都公員)-별공원(別公員)-비대방(俾大房)-비방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영위는 원로가 추대되는 명예직이고 실질적인 조직 운영은 반수와 접장이 맡았다.&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부상 조직과 보상 조직은 각기 별개의 조직으로 성장해왔다. 이 둘이 하나로 묶이는 계기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집정하에 마련되었다. 즉 1866년에 정부에서는 각 군현에 상단 조직으로 보부청을 설치하였다. 그 배경을 보면 그해 병인양요, 즉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침입하였을 때 보상과 부상이 흥선대원군의 명에 따라 상병단(商兵團)을 조직하여 강화도에 군량을 운반하고 문수산 전투와 정족산 전투에서 공을 세우자 흥선대원군은 보부청을 세워 스스로 도반수(都班首)가 되고 장남인 이재면(李載冕)에게는 사무를 관할하게 한 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실질적인 조직 활동에 있어서는 여전히 두 집단이 별개로 움직였다. 1879년 7월에 작성된 『비변사완문』은 『한성부완문』과 마찬가지로 비변사에서 전국 군현의 부상청(負商廳)에 내린 완문으로, 이 문서를 통해 중앙정부기관으로서 혜상공국이 설치되는 1883년까지 지방 단위에서 보상 조직과 부상 조직이 청(廳)을 달리하여 운영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보부청은 1882년에 흥선대원군 정치에 반발한 민영익(閔泳翊)이 보부상들을 동원하여 흥인문 즉 동대문 앞에서 시위를 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삼군부에 소속시켜 감시를 받았으며 군대 편성에서 제외되었다. 1883년(고종 20) 8월 19일에 혜상공국이 중앙에 설치되었고 보상청과 부상청의 두 조직이 합해졌으며 혁파된 삼군부를 대신하여 군국아문에 부속되었다.&lt;br /&gt;
&lt;br /&gt;
2년간의 혜상공국 시절을 거친 후 1885년 8월 10일부터 약 10년간 유지된 보부상 전국 조직이 상리국(商理局)이다. 이 시절에 지방에서 운영되던 보부상 조직을 보면 상위 조직에 영좌(領位)-반수-접장을, 하위 조직에 본방-문서공원(文書公員)-공사공원-도수공원-별공원 등을 두고 운영하였다.&lt;br /&gt;
&lt;br /&gt;
상리국은 1895년(고종 32) 3월 4일에 폐지되었다. 당시 농상대신 엄세영(嚴世永)이 제의하기를 “지난해 7월 이후 상리국을 농상아문에 잠시 소속시켰으나 농상아문에 부서가 이미 있는 만큼 해당국은 없애버리며, 각 도의 임방도 일체 없애어 세를 거두어들이는 등의 폐단을 엄격히 금지하고 보부상들의 일을 편리한 대로 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윤허하였다. 즉 이때 이미 보부상의 활동이 초창기와는 달리 정부의 이권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상충되는 면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lt;br /&gt;
&lt;br /&gt;
보부상단은 2년 후인 1897년에 황국중앙총상회에 소속되었다가 7월에 황국협회를 만들어 독립협회 회원들을 무력으로 공격하여 해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1899년부터 상무사로 바뀌면서도 부상과 보상은 별도의 조직을 가져 부상을 좌사(左社)로 보상을 우사(右社)로 불렀다. 이 당시 조직과 임원 명칭은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계속 이어져왔다. 이로 인해 상무사는 보부상단을 대표하는 조직명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일본상인들의 침투 등으로 위축된 상업 활동을 권장하고 상로(商路)를 확장하기 위해 도시의 시전까지 합하여 조직한 상무사는 1903년에 부상과 보상을 따로 하여 공제소(共濟所)로 이관되었다가 상민회(商民會)로 옮겼고, 1904년 진명회(進明會)로 이속되었다가 다시 공진회로 소속되는 등 안정된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다가 그해 2월 28일에 폐지되었다.&lt;br /&gt;
&lt;br /&gt;
당시 의정부의정 이근명(李根命)이 제의하기를 “상무사를 설치한 것은 진정 상인들을 보호하자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인데 최근 갖은 폐단이 늘어나 중앙과 지방에 해를 끼치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한이 자자합니다. 이것을 그냥 둘 수 없으니 해당 관청을 우선 없애 치움으로써 각기 생업에 안착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였는데도 의연히 제멋대로 구는 폐단이 있을 것 같으면 각별히 단속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lt;br /&gt;
&lt;br /&gt;
중앙에서의 위와 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는 임방 시절부터 뿌리를 내린 조직이 그대로 유지되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소멸되었다. 그러나 그중 충청도 지역에서 홍주를 중심으로 청양·오천·보령·광천·대흥 등 6개 군이 조직된 원홍주육군상무사와 예산과 덕산을 중심으로 당진 지역까지 포괄하는 예덕상무사(禮德商務社), 그리고 한산과 부여를 중심으로 정산·홍산·임천·서천·비인·남포 등 저산 8개 읍으로 조직된 저산팔구상무사(苧産八區商務社) 등이 남아 있고, 경상도 지역에서 고령과 창녕 등에서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비변사완문(備邊司完文)』      &lt;br /&gt;
*『한성부완문(漢城府完文)』      &lt;br /&gt;
*『보부상자료집』, 민속원, 1986.      &lt;br /&gt;
*유자후, 『조선부보상고』, 정음사, 1948.      &lt;br /&gt;
*정승모, 「유품을 통해 본 보부상단의 역사와 조직」, 『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 2005.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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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분류:경제]][[분류:산업]][[분류:상업·무역]][[분류:집단·기구]][[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시대]][[분류:철종, 고종]]&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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