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feed xmlns="http://www.w3.org/2005/Atom" xml:lang="ko">
		<id>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action=history&amp;feed=atom&amp;title=%EB%B3%91%ED%92%8D%EC%84%9D%28%E5%B1%9B%E9%A2%A8%E7%9F%B3%29</id>
		<title>병풍석(屛風石) - 편집 역사</title>
		<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action=history&amp;feed=atom&amp;title=%EB%B3%91%ED%92%8D%EC%84%9D%28%E5%B1%9B%E9%A2%A8%E7%9F%B3%29"/>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B%B3%91%ED%92%8D%EC%84%9D(%E5%B1%9B%E9%A2%A8%E7%9F%B3)&amp;action=history"/>
		<updated>2026-05-12T18:25:24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generator>MediaWiki 1.27.3</generator>

	<entry>
		<id>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B%B3%91%ED%92%8D%EC%84%9D(%E5%B1%9B%E9%A2%A8%E7%9F%B3)&amp;diff=8898&amp;oldid=prev</id>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B%B3%91%ED%92%8D%EC%84%9D(%E5%B1%9B%E9%A2%A8%E7%9F%B3)&amp;diff=8898&amp;oldid=prev"/>
				<updated>2017-12-09T17:27: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개념용어|대표표제=병풍석|한글표제=병풍석|한자표제=屛風石|대역어=|상위어=능원(陵園)|하위어=|동의어=사대석(莎臺石), 호석(護石)|관련어=부석소(浮石所), 산릉도감(山陵都監), 수석소(輸石所)|분야=왕실/왕실건축/능·원·묘|유형=개념용어|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집필자=이경미|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2521|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ua_10109025_004 『영조실록』 즉위년 9월 25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008011_002 『영조실록』 20년 8월 11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802030_002 『인조실록』 8년 2월 30일],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107026_001 『현종개수실록』 1년 7월 26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08016_001 『정조실록』 13년 8월 16일]}}&lt;br /&gt;
&lt;br /&gt;
능원이나 규모가 큰 무덤을 만들 때, 봉분이 무너지지 않도록 주위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석물.&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병풍석은 봉분을 형성한 흙과 사초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막는 기능을 하는 석축의 일종으로, 호석(護石) 또는 [[사대석(莎臺石)]]이라고 하며 줄임말로 병석(屛石)이라고도 한다. 신라 신문왕릉의 호석을 필두로 신라시대의 능제를 근간으로 삼은 고려시대에는 12각을 기본으로 한 호석이 채택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시기에 따라 크기와 부재의 구성, 축조 방식 등에 변화가 있었으나, 병풍석의 기능만큼은 바뀌지 않았다.&lt;br /&gt;
&lt;br /&gt;
병풍석은 그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릉의 능제 가운데서 설치 여부를 두고 가장 논의가 분분하였다. 병풍석이 능제 간소화의 주된 대상이었기 때문인데, 결국 공력이 많이 드는 것이 그 이유였다. 병풍석 폐지의 시초가 된 것은 [[석실(石室)]]과 사대석을 쓰지 말라는 세조의 유명이었다. 그에 따라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에는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았고, 뒤이어 천장한 세종의 [[영릉(英陵)]]도 광릉의 능제를 따랐다. 그러나 병풍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다가 현종 때 효종의 [[영릉(寧陵)]]을 옮기면서는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았지만, 그 뒤 현륭원(顯隆園), 홍릉(洪陵), [[유릉(裕陵)]]에서는 다시 사용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내용 및 특징'''==&lt;br /&gt;
&lt;br /&gt;
오늘날 병풍석이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조선시대의 능원은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하여 헌릉(獻陵), 현릉(顯陵), 선릉(宣陵) 등 14개소에 이른다.&lt;br /&gt;
&lt;br /&gt;
능원의 병풍석은 대개 12각형으로 모양을 만드는데, 의례에 따라 부재의 크기는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대체로 병풍석 네 켜로 석축을 쌓는다. 가장 아래에 초지대석(初地臺石)과 정지대석(正地臺石)으로 바탕을 형성한 다음, 그 위에 면석(面石)과 [[우석(隅石)]]으로 한 켜를 쌓고 다시 [[만석(滿石)]]을 덮는 구조이다. 만석 위로는 12각의 대각선 방향마다 인석(引石)을 방사상으로 설치한다. 면석과 우석의 표면에는 무늬를 새기는데, 조선전기까지는 불교적 색채가 강한 무늬가 주류였으나 조선후기에는 모란과 같은 상서로운 문양을 새기는 경향으로 바뀐다. 인석은 돌출된 머리 표면에 [[좌향(坐向)]]을 새기거나 꽃을 새겨 마감한다.&lt;br /&gt;
&lt;br /&gt;
홍릉과 유릉에 이르면 부재의 명칭을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하는데, 부재의 위치에 따라 면과 모퉁이[隅]를 구분하여 면병풍석, 우병풍석, 정지대석, 우지대석 등으로 이름을 구별하였다.&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병풍석이 폐지된 이후에도 간혹 그 장점을 말하며 다시 쓰기를 청하는 신료들이 있었지만, 왕의 의지에 따라 좌절되었다. 1724년(영조 즉위)에는 능침을 오래도록 견고하게 하는 방법은 병풍석을 두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옛 영릉(寧陵)에 물이 스며든 것은 흙을 굳게 쌓지 않아서이지 병풍석 때문이 아니라는 의견이 제기되었지만, 영조는 이를 옳게 여기지 않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0109025_004 『영조실록』 즉위년 9월 25일]). 영조는 1744년(영조 20)에 병풍석을 없앤 일을 두고, 사왕(嗣王) 준법(準法)이라고 일컬을 만하다고 평가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2008011_002 『영조실록』 20년 8월 11일]).&lt;br /&gt;
&lt;br /&gt;
사실 병풍석은 산릉 가운데서 비교적 탈이 많이 나는 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목릉(穆陵)]]의 경우, 산릉 조성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병풍석이 기울어지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에 따라 광내(壙內)에 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고, 지술(地術)을 아는 사람들은 자리가 불길하다며 능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802030_002 『인조실록』 8년 2월 30일]).&lt;br /&gt;
&lt;br /&gt;
병풍석은 때로 정치의 쟁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현종 때 효종의 영릉을 천장하게 된 동기도 병풍석과 가석의 틈을 공사 부실 탓으로 몰아가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rb_10107026_001 『현종개수실록』 1년 7월 26일]).&lt;br /&gt;
&lt;br /&gt;
현륭원을 조성하면서 일시적으로 병풍석을 되살린 정조는 자손으로서 성의를 다하기 위해서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도 난간석은 쓰지 말도록 하고, 더욱이 이후 능역에서는 병풍석에 관계된 갖가지 석물을 다시는 쓰는 일이 없도록 하라 명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08016_001 『정조실록』 13년 8월 16일]).&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lt;br /&gt;
*김상협, 「조선 왕릉 석실 및 능상구조의 변천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lt;br /&gt;
*문영식, 「조선후기 산릉도감의궤에 나타난 장인의 조영활동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lt;br /&gt;
*이희중, 「17, 18세기 서울 주변 왕릉의 축조, 관리 및 천릉 논의」, 『서울학연구』17,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01.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amp;lt;html&amp;gt;&amp;lt;script&amp;g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amp;lt;/script&amp;gt;&amp;lt;input type=&amp;quot;button&amp;quot; value=&amp;quot;Graph&amp;quot; onclick=&amp;quot;reload();&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100%&amp;quot; height=&amp;quot;670px&amp;quot; src=&amp;quot;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02521&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분류:왕실]][[분류:왕실건축]][[분류:능·원·묘]][[분류:개념용어]][[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