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feed xmlns="http://www.w3.org/2005/Atom" xml:lang="ko">
		<id>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action=history&amp;feed=atom&amp;title=%EB%8F%99%EC%A7%80%EC%82%AC%28%E5%86%AC%E8%87%B3%E4%BD%BF%29</id>
		<title>동지사(冬至使) - 편집 역사</title>
		<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action=history&amp;feed=atom&amp;title=%EB%8F%99%EC%A7%80%EC%82%AC%28%E5%86%AC%E8%87%B3%E4%BD%BF%29"/>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B%8F%99%EC%A7%80%EC%82%AC(%E5%86%AC%E8%87%B3%E4%BD%BF)&amp;action=history"/>
		<updated>2026-04-20T16:22:43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generator>MediaWiki 1.27.3</generator>

	<entry>
		<id>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B%8F%99%EC%A7%80%EC%82%AC(%E5%86%AC%E8%87%B3%E4%BD%BF)&amp;diff=4569&amp;oldid=prev</id>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B%8F%99%EC%A7%80%EC%82%AC(%E5%86%AC%E8%87%B3%E4%BD%BF)&amp;diff=4569&amp;oldid=prev"/>
				<updated>2017-12-09T15:49: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직역|대표표제=동지사|한글표제=동지사|한자표제=冬至使|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삼절겸연공사(三節兼年貢使), 절사(節使)|관련어=정조사(正朝使), 성절사(聖節使 ), 천추사(千秋使)|분야=정치/외교/사행|유형=직역|지역=대한민국, 중국|시대=조선|왕대=중종~철종|집필자=박성주|제정시기=|폐지시기=|소속관서=|관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1824|실록연계=}}&lt;br /&gt;
&lt;br /&gt;
조선시대 동지에 중국에 하례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파견된 사절.&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조선초기 중국에 매년 정례적으로 파견된 사절은 [[정조사(正朝使)]]·[[성절사(聖節使)]]·[[천추사(千秋使)]]가 있었다. 이 정례 사절 중 정조사는 1531년(중종 26)부터 동지사가 대신하여 정단(正旦)과 동지(冬至) 하례하기 위하여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1645년(인조 23)부터는 피차의 편의를 보아 날짜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 [[정조(正朝)]]에 보내기로 하였으며, 1723년(경종 3)에 다시 강조되어 이후로는 정례적으로 세 사절이 동시에 출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례 사행(使行)을 삼절겸연공사(三節兼年貢使), 혹은 동지사, 또는 절사(節使)라 불렀다. 이 사행은 동지를 전후하여 출발하여 그 해가 지나기 전에 북경에 도착하여 40~60일 묵은 다음 2월 중에 북경을 출발하여 3월말이나 4월초에 돌아오는 것이 통례였다.&lt;br /&gt;
&lt;br /&gt;
=='''담당 직무'''==&lt;br /&gt;
&lt;br /&gt;
동지사절의 구성은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250명 내외가 대부분이고, 예외적으로 500명이 넘는 사행도 있었다. 대체로, 정사·부사·서장관 각 1명, 상통사 2명, 질문종사관 1명, 압물종사관 8명, 압폐종사관 3명, 압미종사관 2명, 청학신체아·의원·사자관·화원 각 1명, 군관 7명, 우어별차 1명, 만상군관 2명 등 정관(正官) 33명과 마부·노자 등 종인(從人)으로 구성되었다. 동지사의 정사는 정2품의 인원을 종1품으로 하여 차임하였고, 부사는 정3품의 인원을 정2품으로 임명하였다. 서장관은 정5품의 인원을 종4품으로 임명하였다.&lt;br /&gt;
&lt;br /&gt;
사절이 출발하기 2~30일 전에 승문원에서 표·전문이 작성되고 호조에서는 예물을 준비하였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을 거쳐 북경[[회동관(會同館)]]의 옥하관(玉河館)에서 유숙하였는데, 명대에는 40일간, 청대에는 60일간 이곳에 체류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체류 기간이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lt;br /&gt;
&lt;br /&gt;
옥하관에 입관한 이후 표문과 자문을 받들고 예부로 나가서 자문을 전달하고, 다시 [[의제사(儀制司)]]로 가서 황제에게 바칠 표문을 전달하였다. 또 홍로시(鴻臚寺)에 사신 일행의 황제 알현을 요청하는 보고 단자를 보내면, 홍로시에서 조회가 있기 전에 조하(朝賀)하는 의식의 절차를 조선 사신 일행에게 연습시켰다.&lt;br /&gt;
&lt;br /&gt;
조회 당일에는 홍로시의 안내를 받아 대궐의 [[오문(午門)]] 밖에 기다리다가 황제가 봉천전에 도착하면, 조회에 참석하여 황제를 알현하였다. 조회가 끝나면 [[광록시(光祿寺)]]로 가서 접대를 받았다. 이후 가져간 예물을 예부에 보냈다.&lt;br /&gt;
&lt;br /&gt;
예물은 황제에게는 여러 빛깔의 모시와 명주, 여러 색깔의 화석(花席) 및 [[백면지(白綿紙)]], 수달피, 인삼, 잡색마 등을, 황후에게는 나전소함(螺鈿梳函), 여러 빛깔의 모시와 명주 및 화석이었으며, 황태후에게는 황후와 같은 종류, 황태자에게는 여러 빛깔의 모시와 명주·화석·백면지, 수달피, 인삼 등을 보냈다.&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명 태조는 처음에 조선에 대하여 3년에 1회씩 [[조공(朝貢)]]의 예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도리어 1년에 3회씩 조공하겠다고 요청하였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유구(琉球)는 ‘2년 1공(貢)’, [[안남(安南)]]·섬라(暹羅)는 ‘3년 1공’, 일본은 ‘10년 1공’으로 규정하여, 중국과의 친소(親疎) 관계에 의하여 그 조공의 횟수를 정하였다. 이것은 정기적으로 사절을 보내는 횟수를 의미하였다.&lt;br /&gt;
&lt;br /&gt;
고려와 조선에서 계속하여, 중국 측에 ‘1년 3공’을 요청하였으나, 명 태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안남과 섬라와 같이 ‘3년 1공’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명 태조가 죽고 그 손자 건문제(建文帝)가 즉위한 1400년(정종 2)부터 조선과 명의 관계가 호전되자, 비로소 조선 측이 주장한 ‘1년 3공’이 시작되었다. 이 뒤부터 양국 사이에는 ‘1년 3공’의 정례적인 사절 파견이 점차 규례화 되었다. 이것은 명대(明代)에 중국에 입조(入朝)한 주변의 여러 나라 중 조선에만 허용된 특례였다. 그러나 양국 사이에는 이러한 ‘1년 3공’의 정기적인 사절 외에도 비정기적인 사절이 더 많이 왕래하였다.&lt;br /&gt;
&lt;br /&gt;
동지사는 1531년(중종 26)부터 파견한 사절이었다. 또한 이때의 동지사는 정조사와 겸하여 사절의 명칭을 동지사로 개칭된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정기적인 사행은 ‘1년 3공’이었다. 이 정기적인 사행을 삼절사(三節使)라고도 하였다.&lt;br /&gt;
&lt;br /&gt;
이 정례적인 사행은 1645년(인조 23)부터 피차의 편의를 보아 날짜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 [[정조(正朝)]]에 보내기로 하였으며, 1723년(경종 3)에 다시 강조되어 이후로는 동시에 시행되었다.&lt;br /&gt;
&lt;br /&gt;
=='''의의'''==&lt;br /&gt;
&lt;br /&gt;
조선시대 중국과의 교류는 대부분 사행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 사행을 통하여 조공물(朝貢品)이 바쳐지고 중국에서도 이에 답하여 회사물(回賜物)이 보내져 왔다. 조공물은 마필(馬匹)·인삼·피물(皮物) 등이었고 회사물은 비단·자기·약재·서적 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lt;br /&gt;
&lt;br /&gt;
조선은 사행을 통하여 경제적인 교역 이외에도 학술·문화 교류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인물은 대부분 뛰어난 학술적 식견을 지니고 있어서 중국의 지식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또한 당시 최신의 서적이나 각종 서화(書畵), 지도 등을 구득(求得)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려고 노력하였고, 이를 통하여 열린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로 조선적인 특색을 지닌 문화로 발전·심화할 수 있었으며, 천문·역법 등 중국에서 전래된 서양의 과학기술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18세기 후반 [[연행(燕行)]]하였던 북학파 학자들은 중국의 문화와 신학문적인 서학(西學) 등 많은 신문물을 수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변화와 발전을 도모하게 되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대전회통(大典會通)』      &lt;br /&gt;
*『통문관지(通文館志)』      &lt;br /&gt;
*『만기요람(萬機要覽)』      &lt;br /&gt;
*김구진, 「조선전기 한중관계의 시론-조선과 명의 사행과 그 성격」, 『홍익사학』 4, 홍익사학회, 1990.12.      &lt;br /&gt;
*김송희, 「조선초기 대명외교에 대한 연구-대명사신과 명 사신 영접관의 성격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55·56, 1998.10.      &lt;br /&gt;
*박성주, 「조선초기 遣明 使節에 대한 一考察」, 『경주사학』 19, 경주사학회, 2000.      &lt;br /&gt;
*박성주, 『高麗·朝鮮의 遣明使 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amp;lt;html&amp;gt;&amp;lt;script&amp;g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amp;lt;/script&amp;gt;&amp;lt;input type=&amp;quot;button&amp;quot; value=&amp;quot;Graph&amp;quot; onclick=&amp;quot;reload();&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100%&amp;quot; height=&amp;quot;670px&amp;quot; src=&amp;quot;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01824&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분류:정치]][[분류:외교]][[분류:사행]][[분류:직역]][[분류:대한민국, 중국]][[분류:조선]][[분류:중종~철종]]&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