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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노한(盧閈)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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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26T00:32:49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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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8-01-09T13:41: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노한|한글표제=노한|한자표제=盧閈|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왕족/외척, 정치·행정가/관료/문신|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고려~조선|왕대=정종~세종|집필자=이기순|자= 유린(有隣) |호= 효사당(孝思堂) |봉작=|시호= 공숙(恭肅) |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376년(우왕2)|사망=1443년(세종25)|본관=교하(交河)|주거지= 서울 |묘소소재지= 경기도 금천(衿川) 북면(北面) 고사리(高寺里)의 선영|증조부= 노책(盧頙): 경양부원군(慶陽府院君) |조부=노진(盧稹): 공양왕(恭讓王)의 장인|부= 노균(盧鈞) |모_외조=개성왕씨(開城王氏): 왕수(王琇)의 딸, 한성부원군(漢城府院君)의 딸|형제=|처_장인=여흥민씨(驪興閔氏): 이천군부인(二川郡夫人), 명혜택주(明惠宅主),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 →(자녀)1남 2녀|자녀=(1자)노물재(盧物載) (1녀)이종인(李種仁)의 처 (2녀)최후(崔厚)의 처|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0307|실록연계=}}&lt;br /&gt;
&lt;br /&gt;
=='''총론'''==&lt;br /&gt;
&lt;br /&gt;
[1376년(우왕2)~1443년(세종25) = 68세]. 조선 초기 정종~세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유린(有隣), 호는 효사당(孝思堂)이다.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고려 [[대호군(大護軍)]]노균(盧鈞)이고, 어머니 개성왕씨(開城王氏)는 고려 종실(宗室) 한성부원군(漢城府院君)왕수(王琇)의 딸이다. 고려 창성군(昌城君)노진(盧稹)의 손자이며, 공양왕(恭讓王)의 처조카이다. 또 태종의 아랫 동서이고, 세종의 이모부이다.&lt;br /&gt;
&lt;br /&gt;
=='''여말선초의 활동'''==&lt;br /&gt;
&lt;br /&gt;
노한은 고려 첨의(僉議) 정승(政丞)노정(盧頙)의 증손자였으므로, 음보(蔭補)로서 고려말 공양왕 때 적경서(積慶署) 승(丞)에 보임되었다가, [[전농시(典農寺)]][[직장(直長)]] · 예빈시(禮賓寺) [[소경(少卿)]] 등을 역임하였다. 이 시기에 [[민제(閔霽)]]의 막내딸과 혼인하여, 둘째딸과 혼인한 이방원(李芳遠: 태종)과 동서 사이가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한 뒤에 태조 시대 7년 동안 그는 전혀 벼슬을 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실권을 잡았던 정도전(鄭道傳)이 세자 [[이방석(李芳碩)]]을 받들고 이방원 일파를 견제하였기 때문이다. 이방원이 &amp;lt;제 1, 2차 왕자의 난&amp;gt;을 일으켜서 실권을 잡은 뒤에, 1399년(정종1) 형조 의랑(議郞: 좌랑)을 거쳐, 1400년(정종2) 공조 의랑에 임명되었다. 처음에 사헌부 시사(侍史)에 임명되었으나, 장인 민제가 우정승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사위를 정승을 감찰하는 헌관(憲官)으로 삼을 수 없다는 세자 이방원의 말에 따라 공조 의랑으로 바꾸어 임명하였다.&lt;br /&gt;
&lt;br /&gt;
=='''태종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400년 11월 태종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노한은 1401년(태종1) [[봉상시(奉常寺)]] 경(卿)에 임명되었다가, [[삼사(三司)]] 좌사(左使)로 옮겼고,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사간원 [[지사(知事)]]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대간(臺諫)]]의 당상관으로 오르기가 아주 어려웠는데, 그는 임금의 지친(至親)이라서 청요직(淸要職)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만큼 왕가의 권력 싸움에 쉽게 휘말릴 수 있는 위험이 많았다. 1403년(태종3) [[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어 합문(閤門: 통례원) [[판사(判事)]]를 겸임하였고, 지방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들이 저지르는 불법을 비밀리에 염탐하기 위한 염문사(廉問使: 후대의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의 하삼도(下三道)를 염찰(廉察)하였다. 1404년(태종4) 승정원 우부대언(右副代言: 우부승지)으로 발탁되었다가, 예조 지사를 거쳐 이조 전서(典書: 판서)로 승진하였고,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때 그의 나이가 불과 29세였다. 1406년(태종6)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에 임명되어 [[천추사(千秋使)]]로서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와서, 이듬해 풍해도도관찰사(豊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었다. 1408(태종8)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으나, 이듬해 처남 &amp;lt;민무구(閔無咎) 형제의 옥사(獄事)&amp;gt;가 일어나 관직에서 쫓겨났는데, 나이가 33세였다.&lt;br /&gt;
&lt;br /&gt;
=='''민무구 형제의 옥사와 노한'''==&lt;br /&gt;
&lt;br /&gt;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장인 민제와 처남 민무구 · 민무질(閔無疾) 형제의 도움이 컸었다. 장인 민제는 책사(策士) 하륜(河崙)을 소개하였고 &amp;lt;제 1, 2차 왕자의 난&amp;gt; 때, 부인 민씨는 태종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으며 민무구 형제는 이숙번(李叔蕃)과 함께 남은(南誾)의 군사와 [[이방간(李芳幹)]]의 군사와 목숨을 걸고 싸워 승리하였다. 노한의 활약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그의 비문에 보이는 “국가 경영을 자임(自任)하고 집안일 따위는 돌보지 않았다.”라는 구절에서 그도 어떤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9척의 장신(長身)으로 힘도 세었기 때문에 그가 무공을 세웠을 수도 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태종이 즉위한 뒤, 태종과 원경왕후와의 사이에 불화가 일어났다.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이제(李禔)]]가 원경왕후를 옹호하면서 태종과 자주 충돌하는 바람에 그의 세자 자리도 위태로워졌다. 민무구 형제는 조카들이 왕위에 오르지 못할까 불안해했다. 그러자 1406년(태종6) 태종이 세자에게 양위하겠다고 공표하면서 세자 주변의 민무구 · 민무질 형제와 실권자들의 반응을 살폈다. 민제는 양위선언에 태종의 숨은 의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아들인 민무구 · 민무질 형제에게 언행을 조심하도록 거듭 경계하였다. 1407년(태종7) 세자의 정혼(定婚) 문제로 마침내 &amp;lt;민무구 형제의 옥사&amp;gt;가 일어나 민무구 형제는 연안(延安)으로 귀양을 갔다. 4개월 후, 궁중의 원경왕후가 태종의 금령(禁令)을 어기고 친정의 아버지 민제와 연락을 주고받다가 왕후의 자리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1408년(태종8) 민제가 죽고 난 다음에 민무구 형제는 제주도로 유배되었다.&lt;br /&gt;
&lt;br /&gt;
1410년(태종10) &amp;lt;이무(李茂)의 난언(亂言)&amp;gt; 사건이 일어나자, 태종은 민무구 형제를 이에 연루시켜서 이무와 함께 처형하였다. 이때 한성부윤으로 있던 노한도 &amp;lt;민무구의 옥사&amp;gt;와 &amp;lt;이무의 난언&amp;gt;에 연루되어 체포당하여 대질 심문을 받았다. 노한은 감옥에 갇히자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자기가 들은 것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고백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을 면하고 귀양을 갔다. 그 뒤에 태종의 하교로 외방종편(外方從便)되었는데, 가족과 함께 양주(楊州)의 별장(別莊)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14년 동안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lt;br /&gt;
&lt;br /&gt;
=='''세종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양녕대군이 폐세자 된 후, 충녕대군(忠寧大君: 세종)이 세자가 되었다가 1418년 태종의 선위로 왕위에 올랐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 장인 심온(沈溫)은 죽음을 당하고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친정 집안은 멸망당하였다. 그런데 노한의 외동아들 노물재(盧勿齋)가 소헌왕후의 아우와 혼인하였기 때문에 아버지 노한과 아들 노물재는 똑같은 처지가 되었다. 1422년(세종4) 태종은 임종이 가까워지자 노한을 불러 들여, 그의 죄를 용서하고 편한 대로 거주할 것[외방종편]을 하교한 다음, 세종에게는 그의 서용을 부탁하였다. 1425년(세종7) 세종은 태종의 뜻에 따라 노한의 직첩을 되돌려주고, 뒤이어 노한의 아내 민씨(閔氏)를 명혜택주(明惠宅主)로 봉하였다.&lt;br /&gt;
&lt;br /&gt;
1427년(세종9) 세종은 노한을 한성부윤으로 복직시킨 다음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陞品)하여 형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이어 노한은 1428년(세종 10) [[원접사(遠接使)]]에 임명되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였고, 의정부 [[참찬(參贊)]]으로 승진하였다. 1430년(세종12) 오위도총부 도총제(都摠制)를 거쳐, 이듬해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에 임명되었다. 1432년(세종14)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되고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진하였고,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태평관(太平館)]]을 개축하고 대궐의 [[강녕전(康寧殿)]] 조성하는 [[제조(提調)]]가 되어 이듬해 건물을 각각 완성하니, 세종이 이모부 노한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1434년(세종16) 의정부 찬성으로서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겸임하였다. 1435년(세종17) 정1품상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품되고,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어 병조 판사를 겸임하였다. 이어 하등극사(賀登極使)에 임명되어 중추원 동지사민의생(閔義生)과 함께 명나라 북경으로 가서 영종(英宗)정통제(正統帝)의 등극(登極)을 하례하였다.&lt;br /&gt;
&lt;br /&gt;
1437년(세종19) 이천(李蕆)이 파저강(婆猪江: 동가강) [[야인(野人)]]을 정벌하였을 때, 노한은 그 성과가 대단치 않다고 주장하다가 우의정에서 파직되었다. 그 뒤에 그는 양주 별장으로 돌아가 80세가 넘은 노모를 모시고 살다가, 1439년(세종21) 모친상을 당하자 금천(衿川: 시흥) 고사리(高寺里)의 언덕에 장사지내고 그 곁에 집을 짓고 시묘(侍墓)하면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1443년(세종25) 7월 초1일 병으로 서울 집의 [[정침(正寢)]]에서 죽으니, 향년이 68세였다.&lt;br /&gt;
&lt;br /&gt;
=='''성품과 일화'''==&lt;br /&gt;
&lt;br /&gt;
노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키가 9척(尺)나 되고 얼굴이 컸으며 풍채가 헌걸찼다. 천성은 활달하고 너그럽고 화평하였다. 그러나 남에게 구차스레 말하지 않았고, 말하면서도 잘 웃지 않았다. 집에서 한가롭게 홀로 있을 때에도 반드시 의관(衣冠)을 갖추고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젊어서부터 손위 동서 이방원을 도와서 국가경영을 자임(自任)하였고 집안 일 따위를 돌보지 않았다. 정승이 되어서는 큰 일을 챙기는 데 힘썼고, 가혹한 형벌을 행하지 않았다. 그는 분석이 명확하고 결단이 정확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록 자기의 생사가 걸려 있더라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태종의 신임을 받아서 &amp;lt;민무구의 옥사&amp;gt;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1432년(세종14) 노한이 관반사(館伴使)가 되어, 칙사로 온 명나라 환관창성(昌盛)과 윤봉(尹鳳) 등을 맞았다. 명나라 칙사는 해마다 와서, 중국 황제가 사냥할 때 쓰는 보라매와 사냥개 등을 요구하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접반사(接伴使)]]에게 모욕을 주었다. 그러나 9척 거구에 커다란 얼굴을 가진 노한이 정색을 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말하여 위엄을 보이자, 횡포를 부리던 창성과 윤봉도 그 위세에 눌려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였다는 일화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전한다. 또 노한은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관반사가 되었을 때 어머니가 병중에 있자, 낮에는 사신을 접대하고 밤에는 어머니를 간호하였다. 또 어머니가 돌아가자 어머니 묘소 곁에 집을 짓고 시묘하며 지냈고, 자신의 묘소도 그 아래에 두도록 했다.&lt;br /&gt;
&lt;br /&gt;
=='''묘소와 후손'''==&lt;br /&gt;
&lt;br /&gt;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묘소는 경기도 금천 북면(北面) 고사리(高寺里)에 있는데, 1436년(세종18)에 죽은 부인과 합장하였다. 그의 손자 [[노사신(盧思愼)]]의 친구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여흥민씨(驪興閔氏)는 여흥부원군민제의 막내딸인데, 태종비 원경왕후의 아우이다.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외아들 노물재는 돈녕부 동지사를 지냈다. 노물재의 처는 영의정심온의 딸로, 세종비 소헌왕후의 아우이다.&lt;br /&gt;
&lt;br /&gt;
=='''관력, 행적'''==&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정종실록(定宗實錄)』        &lt;br /&gt;
*『태종실록(太宗實錄)』        &lt;br /&gt;
*『세종실록(世宗實錄)』        &lt;br /&gt;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lt;br /&gt;
*『동문선(東文選)』        &lt;br /&gt;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lt;br /&gt;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lt;br /&gt;
*『용재총화(慵齋叢話)』        &lt;br /&gt;
*『임하필기(林下筆記)』        &lt;br /&gt;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lt;br /&gt;
*『춘정집(春亭集)』        &lt;br /&gt;
*『해동야언(海東野言)』        &lt;br /&gt;
*『사숙재집(私淑齋集)』        &lt;br /&gt;
*『도곡집(陶谷集)』      &lt;br /&gt;
&lt;br /&gt;
[[분류:왕족]][[분류:외척, 정치·행정가]][[분류:관료]][[분류:문신]][[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고려~조선]][[분류:정종~세종]]&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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