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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내병조(內兵曹)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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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집단기구|대표표제=내병조|한글표제=내병조|한자표제=內兵曹|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병조(兵曹)|분야=정치/행정/관청|유형=집단·기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조선|집필자=윤훈표|설치시기=|폐지시기=|소속관서=병조(兵曹)|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1256|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ga_10408001_004 『세조실록』 4년 8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ka_10702001_007 『중종실록』 7년 2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ka_12912020_002 『중종실록』 29년 12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408001_004 『세조실록』 4년 8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501020_002 『세조실록』 5년 1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211010_002 『명종실록』 2년 11월 10일],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10026_001 『고종실록』 31년 10월 26일]}}&lt;br /&gt;
&lt;br /&gt;
조선시대 궐내의 긴급한 군사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정궁인 경복궁이나 창덕궁 내 에 설치한 병조의 분사.&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군사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던 [[병조(兵曹)]]는 궁궐 밖에 있어 왕의 신상에 관한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거나 궁중 [[숙위(宿衛)]] 등의 일을 처리할 때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이에 궐내에 그 분사(分司)인 내병조를 설치하여 병조 관련 업무를 처리하되 특히 궁중의 숙위에 관한 업무나 [[의장(儀仗)]] 활동 등을 맡아서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 기능상 왕의 최측근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관계로 정궁에 설치되었는데, 조선전기에는 경복궁에 있었고 조선후기에는 창덕궁 등에 있었다.&lt;br /&gt;
&lt;br /&gt;
=='''설립 경위 및 목적'''==&lt;br /&gt;
&lt;br /&gt;
군사 관련 업무를 관장하였던 병조가 대궐 밖에 있었기 때문에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신속한 대처가 어려웠다. 이에 별도로 대궐 안에 그 지소를 설치하고 관원을 배치해서 만약의 위급한 상황이 일어났을 경우에 대비하고자 했다. 평상시에는 궁중의 숙위에 관한 업무나 행사 등의 의장 활동 등을 맡아서 처리하도록 했다.&lt;br /&gt;
&lt;br /&gt;
내병조와 유사한 성격의 기구나 조직이 일찍부터 궁궐 내에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러나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것은 세조 이후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408001_004 『세조실록』 4년 8월 1일]). 아마도 그 이전부터 비슷한 조직이 존재했을 것이나 세조 때에 이르러서 하나의 명실상부한 기구로 확립된 듯하다. 뿐만 아니라 세조 때 이후로 그 담당하는 업무와 궐 밖에 있는 병조, 간혹 외병조(外兵曹)로 부르던 기구와의 관계도 뚜렷하게 정해진 듯하다. 정확하게 언제 어떤 경로로 설치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은데, 정변을 통해 즉위했으며 그로 인해 정치적 불안감이 쉽게 가시지 않았던 세조 때 그 면모가 분명해졌다.&lt;br /&gt;
&lt;br /&gt;
=='''조직 및 역할'''==&lt;br /&gt;
&lt;br /&gt;
내병조의 조직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록이 없다. 다만 병조의 관원을 보면 이조 등과는 달리 [[당상관(堂上官)]]에는 판서 등 이외에 참지가 있고, 낭관도 이조 등이 각각 3~4속사에 정랑·좌랑 1명씩이 편제되어 그 사에 부여된 일을 관장하였음과는 달리 무선·승여사는 정랑·좌랑 각1명이 편제되나 숙위 등사를 관장한 무비사에는 정랑·좌랑 각 2명이 편제되어 그 사의 일을 담당하도록 되었다. 이에서 참지의 지휘하에 무비사 정랑·좌랑 각 1명이 내병조사를 전담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 중종대에 궐내에 입직한 인물로 가좌랑(假佐郞)김한로(金漢老)가 확인됨에서([http://sillok.history.go.kr/id/kka_10702001_007 『중종실록』 7년 2월 1일]) 숙위할 병조의 낭관들이 부족하면 임시로 마땅한 사람을 정해서 근무하게 한 듯하다.&lt;br /&gt;
&lt;br /&gt;
주된 임무는 궐내의 시위(侍衛)나 숙위에 관한 사항, 의장 등에 대한 조치 등이었다. 숙위군의 명부(名簿)라고 할 수 있는 성기(省記)도 내병조에서 관리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2912020_002 『중종실록』 29년 12월 20일]). 아울러 궐문의 자물쇠 등을 간수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였다. 궐내에서, 그것도 왕의 최측근에 있었기 때문에 통상적인 업무 외에도 여러 가지 일에 간여하였다. 시위 등에 참여했던 장수들을 모아 놓고 진법(陣法)을 가르치거나([http://sillok.history.go.kr/id/kga_10408001_004 『세조실록』 4년 8월 1일]), 명령을 어기거나 규칙을 위반하는 자들을 체포해서 국문(鞠問)하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501020_002 『세조실록』 5년 1월 20일]).&lt;br /&gt;
&lt;br /&gt;
한편 건국 초부터 예종 때까지 일어났던 정변과 전쟁, 그리고 외침의 전말을 기록했던 『무정보감(武定寶鑑)』의 후속편인 『속무정보감(續武定寶鑑)』을 명조 때 내병조에 국(局)을 설치하여 수찬하게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211010_002 『명종실록』 2년 11월 10일]).&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내병조는 그 기능상 왕이 거처하는 궁궐에 반드시 있어야 했기 때문에 만약 왕이 거처하는 궁궐이 바뀌면 그 설치 장소가 달랐다. 대개 조선초기에는 경복궁 근정문(勤政門) 인근에, 조선후기에는 창덕궁 [[호위청(扈衛廳)]] 서쪽이나 경희궁에는 건명문(建明門) 밖 동쪽에 각각 있었다. 그러나 『동궐도(東闕圖)』에 의하면 창덕궁에는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 맞은편, 진선문과 숙장문 사이의 남쪽 행각에 있었다. 아마도 시기에 따라 그 위치가 달라지기도 했던 듯하다.&lt;br /&gt;
&lt;br /&gt;
『대전통편』에서는 군무(軍務)에 관한 일을 어긴 사람이나 대궐문에 허가 없이 함부로 들어간 사람 이외에는 [[곤장(棍杖)]]을 쓰지 못하게 하면서 그에 관한 제도는 오로지 『흠휼전칙(欽恤典則)』을 준수하도록 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내병조에서는 곤장 가운데 중간급 곤장인 중곤(中棍)을 쓸 수 있도록 규정했다.&lt;br /&gt;
&lt;br /&gt;
1895년 갑오개혁이 단행되면서 내병조에서 관할하던 사무가 [[궁내부(宮內府)]]로 이관되면서 혁거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10026_001 『고종실록』 31년 10월 26일]). 그러나 그 기능은 이듬해 다시 [[시종원(侍從院)]]으로 이관되어 한말까지 계승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대전회통(大典會通)』권4, 병전(兵典), 용형(用刑)      &lt;br /&gt;
*『동궐도(東闕圖)』(1825~1835년 제작,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lt;br /&gt;
*한충희, 『조선초기 육조와 통치체계』, 계명대학교출판부, 1998.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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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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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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