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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남악(男樂)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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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4-20T19:50:30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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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09T17:20:2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개념용어|대표표제=남악|한글표제=남악|한자표제=男樂|대역어=|상위어=악인(樂人)|하위어=|동의어=|관련어=무동(舞童), 봉족(奉足), 솔정(率丁), 여기(女妓), 여악(女樂), 외진연(外進宴)|분야=문화/예술/음악|유형=개념용어|지역=|시대=|왕대=|집필자=이윤정|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1210|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ia_10401009_001 『성종실록』 4년 1월 9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5112029_006 『영조실록』 51년 12월 29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207028_002 『세종실록』 12년 7월 28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301004_002 『성종실록』 23년 1월 4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01004_002 『인조실록』 3년 1월 4일]}}&lt;br /&gt;
&lt;br /&gt;
조선시대 궁중의 [[외연(外宴)]]에서 무동(舞童)들이 행하던 춤과 노래, 또는 무동 그 자체.&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남악(男樂)은 [[여악(女樂)]]과 대칭되는 용어이다. 대개 연향(宴享)에서 춤과 노래를 담당한 남자 아이들, 즉 무동을 가리킨다. 무동은 남자들 잔치인 외연에 쓰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여기(女妓)]]들이 담당하였던 춤과 노래를 대신 하였다.&lt;br /&gt;
&lt;br /&gt;
=='''내용 및 특징'''==&lt;br /&gt;
&lt;br /&gt;
남악의 주축을 이루는 무동은 천민 및 양인층을 대상으로 8세에서 15세 이하의 아이들 중에서 뽑혔다. 이들에게는 급료로 의복과 양식·[[초료(草料)]] 등이 주어졌다. 또 봉족(奉足)·솔정(率丁) 2인이 주어졌고, 연회 시에는 상으로 물품을 받았다.&lt;br /&gt;
&lt;br /&gt;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무동은 주로 [[기우제(祈雨祭)]]·회례연(會禮宴)·양로연(養老宴)·[[진연(進宴)]]·사객연(使客宴)에 출연했다. 다만, 기우제와 관련해서는 예종조까지 기록이 보이다가 그 이후로는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동과 기우제의 관계는 일시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또한 회례연과 관련해서는 『문종실록』·『성종실록』·『영조실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정의 엄숙하고 경건한 예이므로 여악을 쓰는 것이 옳지 않다는 내용([http://sillok.history.go.kr/id/kia_10401009_001 『성종실록』 4년 1월 9일]), 나이가 많은 종신(宗臣)·조신(朝臣)·사서인(士庶人)들을 불러 모아 음식과 무동을 내려주었다는 내용([http://sillok.history.go.kr/id/kua_15112029_006 『영조실록』 51년 12월 29일]) 등이 그것이다. &lt;br /&gt;
&lt;br /&gt;
진연은 외진연과 내진연으로 나뉜다. 남성들을 위한 잔치인 외진연은 주로 무동이, 내진연은 여기들이 노래와 정재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순조 때의 진연에서는 [[내연(內宴)]]임에도 불구하고 무동들이 정재를 담당한 기록이 나타나기도 한다.&lt;br /&gt;
&lt;br /&gt;
사객연은 중국에 대한 사대와 일본·유구국 등에 대한 교린을 위하여 각 나라의 사신들에게 베푸는 잔치이다. 이 잔치에 무동들이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중국 명나라 사신과 왜·야인을 위한 잔치에 참여하였다.&lt;br /&gt;
&lt;br /&gt;
『세조실록』이나 『영조실록』·『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성균관 유생들을 위한 잔치나 문·무과에 합격한 사람들을 위한 사연에도 무동들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춘광호(春光好)·초무(初舞)·광수무(廣袖舞)·처용무(處容舞) 등을 담당하였다.&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남악은 여악의 폐단이 지적되며 그 실시가 요청되었다. 1430년(세종 12)에 김종서가 여악을 폐지할 것을 아뢰었고([http://sillok.history.go.kr/id/kda_11207028_002 『세종실록』 12년 7월 28일]), 1432년(세종 14)에 8세에서 10세 사이의 나이 어린 [[관노(官奴)]] 60명을 무동으로 뽑았다. 이듬해인 1433년(세종 15) 정월 초하루 회례연에서 처음으로 무동이 [[몽금척(夢金尺)]]·오양선(五羊仙)·[[아박(牙拍)]]·[[무고(舞鼓)]] 정재를 공연했다. 그러나 무동은 재주가 익숙해질 만하면 곧 장정이 되기 때문에 남악제도가 지속되기 어려웠다. &lt;br /&gt;
&lt;br /&gt;
성종대에도 [[정전(正殿)]]에서 베푸는 연향 때 남악을 쓰자는 요청이 있었으나([http://sillok.history.go.kr/id/kia_12301004_002 『성종실록』 23년 1월 4일]), 남악을 쓰는 것은 잘 시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전기에는 1433년 이후 대략 20여 년간과 1511년(중종 6) 이후 10여 년만 외연에 남악을 썼고, 그 외의 기간에는 외연이라도 여악을 썼다.&lt;br /&gt;
&lt;br /&gt;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면서 연향에서 여악을 쓰는 것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1625년(인조 3)에 왕세자가 책례(冊禮) 후 행하는 회백관례(會百官禮)에 남악을 미리 연습시킬 것이 건의된 내용을 보면([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01004_002 『인조실록』 3년 1월 4일]) 1623년의 인조반정 후 외연에 남악을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657년(효종 8) 12월에 자전(慈殿)에게 진연을 올렸을 뿐, 외연을 베푼 기록이 없으며, 현종대에도 외연을 연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1705년(숙종 31)에 숙종의 즉위 30년을 경축하기 위한 진연을 열고자 하였을 때, 외연에도 여악을 쓸 것을 청하는 자가 있었으나, 대체로 숙종대의 많은 조관(朝官)들은 여악은 내연에만 써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1705년 이후에는 외연에 여기가 아니라 무동이 춤을 추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김종수, 「조선 17·18세기 여악과 남악」, 『한국음악사학보』 11, 1993.      &lt;br /&gt;
*오혜경, 「조선시대 무동복식에 관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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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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