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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윤수(金允壽)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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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김윤수|한글표제=김윤수|한자표제=金允壽|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인물|유형=정치·행정가/관료/무신|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세종~세조|집필자=이현숙|자=|호=|봉작=|시호=호양(胡襄)|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387년(우왕 13)|사망=1462년(세조 8) 11월 24|본관=선산(善山)|주거지=서울, 선산|묘소소재지=경상도 선산|증조부=|조부=|부=|모_외조=|형제=(동생)김윤집(金允集), 김윤덕(金允德)|처_장인=성산 이씨(星山李氏) : 이계흥(李繼興)의 딸 →(자녀)2남 2녀|자녀=(1자)김구정(金九鼎) (2자)김만정(金萬鼎) (1녀)김상형(金尙亨)의 처 (2녀)이철환(李鐵丸)의 처|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349|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ca_11204011_002 『태종실록』 12년 4월 11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5020_003 『세종실록』 1년 5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908030_003 『세종실록』 9년 8월 30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505028_003 『세종실록』 15년 5월 28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506010_001 『세종실록』 15년 6월 10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01018_002 『세종실록』 17년 1월 18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02007_002 『세종실록』 17년 2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06013_003 『세종실록』 17년 6월 13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07019_001 『세종실록』 17년 7월 19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09018_003 『세종실록』 17년 9월 18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806022_002 『세종실록』 18년 6월 22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005020_001 『세종실록』 20년 5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108009_003 『세종실록』 21년 8월 9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408003_002 『세종실록』 24년 8월 3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502013_007 『세종실록』 25년 2월 13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707001_001 『세종실록』 27년 7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711003_001 『세종실록』 27년 11월 3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903010_001 『세종실록』 29년 3월 10일],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8007_003 『문종실록』 즉위년 8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8011_006 『문종실록』 즉위년 8월 11일],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12013_005 『문종실록』 즉위년 12월 13일],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1005_002 『문종실록』 1년 1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4005_004 『문종실록』 1년 4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4020_002 『문종실록』 1년 4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6026_003 『문종실록』 1년 6월 26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112027_003 『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0008_003 『단종실록』 1년 10월 8일],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2009_004 『단종실록』 2년 2월 9일],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11011_001 『단종실록』 2년 11월 11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07021_001 『세조실록』 8년 7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6020_003 『세종실록』 1년 6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711027_001 『세종실록』 7년 11월 27일]}}&lt;br /&gt;
&lt;br /&gt;
=='''총론'''==&lt;br /&gt;
&lt;br /&gt;
[1387년(우왕 13)∼1462년(세조 8) = 76세]. 조선 전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무신. 함길도병마절제사(咸吉道兵馬節制使)와 경상도안무처치사(慶尙道按撫處置使) 등을 지냈다. 시호는 호양(胡襄)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선산이다. 동생 김윤집(金允集)·김윤덕(金允德)과 함께 3형제가 모두 무재(武材)에 뛰어나서, 김종서(金宗瑞)가 6진(鎭)을 개척할 때 두만강 유역의 5성(城)을 축성하고 방어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lt;br /&gt;
&lt;br /&gt;
=='''태종~세종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409년(태종 9) 23세 때 [[갑사(甲士)]]에 예속되었고, 그 뒤에 25세가 되던 1411년(태종 11)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부사직(副司直)]]·[[사정(司正)]] 등 안팎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김윤수묘표」],([http://sillok.history.go.kr/id/kca_11204011_002 『태종실록』 12년 4월 11일]) 그는 완력이 남보다 세고, 활 쏘고 말 타는 무예에 뛰어났다. 그리하여 항상 궁중을 수비하는 갑사에 소속되어 궁중의 각종 무술 시합에서 우승하였으므로, 세종이 그의 무재를 잘 알고 있었다. 1419년(세종 1) 세종이 이종무(李從茂)를 3군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최윤덕(崔潤德)]]을 3군 [[도절제사(都節制使)]]에 임명하여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할 때 김윤수는 도절제사의 진무(鎭撫)에 임명되어, 중위(中尉)의 군사를 직접 지휘하며 대마도의 [[왜구(倭寇)]]를 정벌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5020_003 『세종실록』 1년 5월 20일]) 그 뒤에 [[경력(經歷)]]·[[호군(護軍)]]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1427년(세종 9)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시종관(侍從官)에 임명되어 마침내 청요직(淸要職)에 올랐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908030_003 『세종실록』 9년 8월 30일]) 1432년(세종 14) 부친상을 당하여 동생들과 함께 시묘살이를 하였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32 「김윤수(金允壽)」 이하 「김윤수묘표」로 약칭]&lt;br /&gt;
&lt;br /&gt;
1433년(세종 15)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최윤덕이 파저강(婆猪江)의 오랑캐 대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정벌할 때 그는 상중에 있었기 때문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추원(中樞院)]][[판사(判事)]]하경복(河敬復)이 “여연군지사(閭延郡知事)신득해(辛得海) 등은 모두 파저강 싸움에 나가서 적을 죽이고 돌아왔는데, 지금 만약 야인의 경계에 가까이 있으면 야인들이 반드시 원한을 품고 있을 것이니, 신득해를 대신하여 김윤수를 임명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여, 세종은 상중에 있는 김윤수를 여연군수(閭延郡守) 겸 [[절제사(節制使)]]로 임명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505028_003 『세종실록』 15년 5월 28일]) 이때 김윤수가 하직 인사를 하자, 세종이 그에게 활과 화살, 옷 한 벌을 내려주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506010_001 『세종실록』 15년 6월 10일])&lt;br /&gt;
&lt;br /&gt;
1435년(세종 17) 1월 오랑캐 대추장 이만주가 복수를 하려고 오랑캐 군사 2천 7백여 명을 이끌고 평안도에서 가장 후미진 여연성(閭延城)을 침입하였는데, 여연군수김윤수가 [[도진무(都鎭撫)]][[상호군(上護軍)]]이진(李震)·[[도안무사(都安撫使)]][[군관(軍官)]]김수연(金壽延) 등과 더불어 군관민을 이끌고 성문을 굳게 잠그고 오랑캐 군사와 대치하였다. 김윤수와 이진이 군사들에게 성곽 위에 올라가서 성가퀴에 몸을 숨기고 활과 포(砲)를 적에게 발사하게 하여 오랑캐 군사 90여 명과 그들의 말 60여 필을 쏘아 명중시키니, 오랑캐 군사들이 어쩔 수 없이 후퇴하였다. 적이 물러간 이튿날 김수연이 정예병 1백 명을 인솔하고 강변까지 적을 추적하였다. 김윤수도 이 사실을 급히 보고하고, 병력을 증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싸움에서 김윤수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화살을 맞았고, 군졸 4명도 적의 화살을 맞아, 그 중에 1명이 죽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01018_002 『세종실록』 17년 1월 18일]) 이후 세종은 오랑캐와 싸운 김윤수의 전술을 높이 평가하여, 오랑캐를 방어하는 기본 모델로서 항상 언급할 정도였다.&lt;br /&gt;
&lt;br /&gt;
그해 2월 세종이 이조 [[정랑(正郞)]]조강(趙講)을 평안도로 보내어, 평안도도안무사(平安道都安撫使)최윤덕,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이각(李恪), 여연군수김윤수에게 [[향온(香醞)]] 30병을 내려주고, 김윤수를 특별히 정4품상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승품시켰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02007_002 『세종실록』 17년 2월 7일]),[「김윤수묘표」] 그러나 그해 6월 파저강 여진이 귀화해 와서 말하기를, “지난 정월에 이만주가 홀라온(忽剌溫) 우디케와 더불어 여연 지경을 침범하여 남자 두 사람을 죽이고, 남녀 7명과 말 6필과 소 5마리를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하므로, 세종이 평안도 도절제사이각으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김윤수는 이를 알고도 여섯 달 동안이나 보고하지 않다가, 이때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실토하였다. 세종은 영의정황희(黃喜)·좌의정최윤덕과 상의한 후, 김윤수에게 내려준 4품의 [[고신(告身)]]을 빼앗고 그대로 유임시켰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06013_003 『세종실록』 17년 6월 13일])&lt;br /&gt;
&lt;br /&gt;
그해 7월 여연(閭延) 소훈두(小熏豆)에 오랑캐가 침입하자, 여연군수김윤수는 군사를 거느리고 진무(鎭撫)장사우(張思祐)의 군사와 함께 오랑캐를 협공하여 적 7명을 쏘아서 죽이고, 그들이 노략질해 가는 가축과 재산을 모두 되찾았다. 이에 세종은 김윤수와 장사우에게 활과 의복을 내려 주고, 김윤수에게 빼앗은 4품의 고신을 되돌려 주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07019_001 『세종실록』 17년 7월 19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09018_003 『세종실록』 17년 9월 18일]) 이듬해인 1436년(세종 18) 5월에는 오랑캐 군사 5백여 명이 여연의 조명간 구자(趙明干口子)에 침입하여, 남녀 14명을 납치하고 우마(牛馬) 85두를 약탈하여 갔다. 그 결과 김윤수는 여연군수에서 파직되어 [[충군(充軍)]]이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806022_002 『세종실록』 18년 6월 22일]) 그러나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김종서가 김윤수를 추천하여 6성을 구축하고 방어하는 일을 맡겼다. 한편 김윤수는 여연군수로 부임한 후 3년 동안 여러 차례 오랑캐의 [[기병(騎兵)]]의 침입을 받았으나, 기묘한 계책을 써서 변화에 대응하고 오랑캐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이에 세종은 그의 공이 매우 크다고 생각하여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하였다.[「김윤수묘표」]&lt;br /&gt;
&lt;br /&gt;
1438년(세종 20) 5월 함길도도절제사김종서가 아뢰기를, “도내의 수령 가운데 경원을 지킬 만한 자를 추천한다면, 김윤수가 좋겠습니다” 하였으므로, 세종은 김윤수를 경원도진무(慶源都鎭撫)로 임명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005020_001 『세종실록』 20년 5월 20일]) 이듬해인 1439년(세종 21) 8월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김종서(金宗瑞)가 “길주목사(吉州牧使)장우량(張友良)이 임기가 차서 지금 교대하게 되었는데, 김윤수는 오랫동안 변방 지역에 있어서 적의 허실(虛實)을 두루 알고 또 무예에도 능하니, 장우량을 대신할 사람은 김윤수보다 나은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니, 세종이 김윤수를 길주목사에 임명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108009_003 『세종실록』 21년 8월 9일]) 그리고 1442년(세종 24) 김윤수는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어, 회령절제사(會寧節制使)에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408003_002 『세종실록』 24년 8월 3일]) 이어 1443년(세종 25) 경원절제사(慶源節制使)에 임명되어 임기를 채우고, 1445년(세종 27) 중추원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12년 만에 조정으로 돌아왔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502013_007 『세종실록』 25년 2월 13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2707001_001 『세종실록』 27년 7월 1일]) 그해 경상우도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로 나가 경상도 연안의 왜구 침입을 방어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711003_001 『세종실록』 27년 11월 3일]) 이어 1447년(세종 29)에는 김종서와 이징옥의 뒤를 이어 함길도도절제사에 임명되어, 세종 말년까지 4년 동안 여진족의 침입을 방어하는 총책임을 맡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903010_001 『세종실록』 29년 3월 10일]) 세종은 김윤수에게 여진족을 방어할 사목을 일일이 지시하였는데, 그때 몽고의 야센부카가 명(明)나라를 침입하면서 우리 국경을 쳐들어온다고 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의 방어가 초긴장 상태였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문종~세조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김윤수는 중추원 [[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었다가 [[인수부(仁壽府)]] 윤(尹)으로 옮겼으며, 그해 말에 함길도도순문사(咸吉道都巡問使)에 임명되어 함길도 지방의 여진 방어를 점검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8007_003 『문종실록』 즉위년 8월 7일]),([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8011_006 『문종실록』 즉위년 8월 11일]),([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12013_005 『문종실록』 즉위년 12월 13일]) 1451년(문종 1) 경기조전절제사(京畿助戰節制使)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인수부 윤이 되었고, 다시 함길도도절제사가 되었다가 인수부 윤을 거쳐 경상우도도절제사(慶尙右道都節制使)가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1005_002 『문종실록』 1년 1월 5일]),([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4005_004 『문종실록』 1년 4월 5일]),([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4020_002 『문종실록』 1년 4월 20일]),([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6026_003 『문종실록』 1년 6월 26일]) 1452년 5월 문종이 세상을 떠나고, 어린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가 &amp;lt;[[계유정난(癸酉靖難)]]&amp;gt;을 일으킬 때 김윤수는 중추원 [[지사(知事)]]로 있었다. 권력의 핵심에서 떨어져 있었던 김윤수는 계유정난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는데, 세조는 다수의 관료층을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책봉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이리하여 김윤수는 좌익 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동생 김윤덕(金允德)은 3등에 각각 책훈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112027_003 『세조실록』 1년 12월 27일])&lt;br /&gt;
&lt;br /&gt;
이후 김윤수는 1453년(단종 1) 10월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명나라에 가서 조선의 정세를 알렸고, 1454년(단종 2) 2월 [[정조사(正朝使)]]에 임명되어 북경(北京)에 가서 신정(新正)을 하례하고 돌아온 후 명나라 정세를 자세히 보고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0008_003 『단종실록』 1년 10월 8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02009_004 『단종실록』 2년 2월 9일]) 1454년(단종 2) 충청도처치사(忠淸道處置使)에 임명되어 지초토사(知招討事)를 겸임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11011_001 『단종실록』 2년 11월 11일])&lt;br /&gt;
&lt;br /&gt;
1455년(세조 1)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되었으나, 나이가 70세에 가깝다고 하여 [[치사(致仕)]]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뼈를 묻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마침내 세조의 허락을 얻어 고향 선산(善山)으로 돌아온 후에는 강호(江湖)에서 여생을 보냈다. 1462년(세조 8) 7월 21일 노병으로 선산의 고향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6세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07021_001 『세조실록』 8년 7월 21일])&lt;br /&gt;
&lt;br /&gt;
=='''성품과 일화'''==&lt;br /&gt;
&lt;br /&gt;
사람됨이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나, 재물을 늘이거나 벼슬을 탐하지 아니하였다. 그가 북쪽 국경을 지킨 20여 년 동안에 여진족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우리나라에 복종하였다. 처음에 북방으로 떠나갈 때에 아내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나이 18살 때에 함길도로 아버지를 찾아가서 비로소 부자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해동잡록(海東雜錄) 권2』]&lt;br /&gt;
&lt;br /&gt;
김윤수는 젊었을 때부터 용맹과 지혜가 뛰어나서, 활 쏘기와 말 타기를 익히고 병법(兵法)을 배웠다. 1419년(세종 1) 6월 정종(定宗)이 더위를 피하여 모화루(慕華樓)로 피서하자, 태종과 세종이 가서 문안하였다. 그때 장사(壯士)를 뽑아 모화루 아래에 수박희(手搏戲 : 태견도의 일종)를 시키고 세 임금이 관람하였는데, 진무김윤수가 8명의 장사를 모두 이기자, 세종이 그에게 상을 주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6020_003 『세종실록』 1년 6월 20일])&lt;br /&gt;
&lt;br /&gt;
1425년(세종 7) 11월 세종이 동교(東郊)에 거둥하여, 화포를 시험하였는데, 세자 문종이 배종(陪從)하였다. 이보다 앞서 미리 [[군기감(軍器監)]]에서 [[갑주(甲胄)]]를 입힌 풀로 만든 사람[草人] 3백 명을 만들어 장막의 서쪽 1백 50보의 위치에 세워 놓았는데, 먼저 화약수(火藥手)로 하여금 화포를 쏘게 하고, 다음으로 대호군권복(權復)과 호군김윤수 등 6명으로 하여금 풀로 만든 사람에게 활을 쏘게 하였다. 그리고 화포를 쏘았을 때와 활로 쏘았을 때 어느 쪽이 갑옷을 더 깊게 꿰뚫었는지를 세종이 직접 실험하고, 화포를 연구 개발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711027_001 『세종실록』 7년 11월 27일]) 이리하여 세종 시대 ‘4전(箭) 화통(火筒)’⋅‘8전 화통’이 발명되어 [[화차(火車)]]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세종 초기에 김윤수는 갑사로서 세종을 측근에서 호위하였으므로, 세종이 김윤수의 무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세종 후반기에 6진(鎭)을 개척할 때 김윤수를 회령절제사와 경원절제사에 임명하였다가, 세종 말년에 4년 동안 함길도도절제사로 삼아 북방의 최일선에서 오랑캐를 방어하는 책임을 맡겼던 것이다.&lt;br /&gt;
&lt;br /&gt;
=='''묘소와 후손'''==&lt;br /&gt;
&lt;br /&gt;
시호는 호양(胡襄)이다. 묘소는 경상도 선산(善山) 동쪽 15리 냉산(冷山)에 있는데, 성종(成宗) 때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김성경(金成慶)이 지은 묘표(墓表)김윤수가 남아있다.&lt;br /&gt;
&lt;br /&gt;
부인 성산 이씨(星山李氏)는 이계흥(李繼興)의 딸로, 자녀는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김구정(金九鼎)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고, 차남 김만정(金萬鼎)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장녀는 호군김상형(金尙亨)에게, 차녀는 사정이철환(李鐵丸)에게 각각 시집갔다.[「김윤수묘표」]&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태조실록(太祖實錄)』      &lt;br /&gt;
*『태종실록(太宗實錄)』      &lt;br /&gt;
*『세종실록(世宗實錄)』      &lt;br /&gt;
*『문종실록(文宗實錄)』      &lt;br /&gt;
*『단종실록(端宗實錄)』      &lt;br /&gt;
*『세조실록(世祖實錄)』      &lt;br /&gt;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lt;br /&gt;
*『동사강목(東史綱目)』      &lt;br /&gt;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lt;br /&gt;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lt;br /&gt;
*『점필재집(佔畢齋集)』      &lt;br /&gt;
*『해동야언(海東野言)』      &lt;br /&gt;
*『해동잡록(海東雜錄)』      &lt;br /&gt;
*『옥천집(玉川集)』      &lt;br /&gt;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lt;br /&gt;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lt;br /&gt;
&lt;br /&gt;
[[분류:인물]][[분류:정치·행정가/관료/무신]][[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세종~세조]]&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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