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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계행(金係行)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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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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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김계행|한글표제=김계행|한자표제=金係行|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인물|유형=문신|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성종~연산군|집필자=이기순|자=취사(取斯)|호=보백당(寶白堂)|봉작=|시호=정헌(定獻)|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431년(세종 13)|사망=1517년(중종 12) 12월 11일|본관=안동(安東)|주거지=경상도 안동(安東) 길안(吉安) 묵계(黙溪)|묘소소재지=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직리|증조부=김득우(金得雨)|조부=김혁(金革)|부=김삼근(金三近)|모_외조=안동 김씨(安東金氏) : 김전(金腆)의 딸|형제=(형)김계권(金係權)|처_장인=(첫째 부인)이천 서씨(利川徐氏) : 서운(徐運)의 딸 →(자녀) 2녀 (둘째 부인)의령 남씨(宜寧南氏) : 남상치(南尙治)의 딸 →(자녀)5남|자녀=(1자)김극인(金克仁) (2자)김극의(金克義) (3자)김극례(金克禮) (4자)김극지(金克智) (5자)김극신(金克信) (1녀)박눌(朴訥)의 처 (2녀)유자온(柳子溫)의 처|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315|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ia_12101024_009 『성종실록』 21년 1월 24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107021_003 『성종실록』 21년 7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410024_005 『성종실록』 24년 10월 24일], [http://sillok.history.go.kr/id/kja_10405006_001 『연산군일기』 4년 5월 6일], [http://sillok.history.go.kr/id/kja_10407025_009 『연산군일기』 4년 7월 25일], [http://sillok.history.go.kr/id/kja_10501021_001 『연산군일기』 5년 1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011009_013 『연산군일기』 10년 11월 9일],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101006_004 『연산군일기』 11년 1월 6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410024_005 『성종실록』 24년 10월 24일]}}&lt;br /&gt;
&lt;br /&gt;
=='''총론'''==&lt;br /&gt;
&lt;br /&gt;
[1431년(세종 13)∼1517년(중종 12) = 87세]. 조선 중기 성종(成宗)~연산군(燕山君) 때 활동한 문신.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과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등을 지냈고,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자는 취사(取斯)이며, 호는 보백당(寶白堂)이고,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거주지는 경상도 안동이다. 아버지는 비안현감(比安縣監)김삼근(金三近)이고, 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삭령현무(朔寧縣務)김전(金腆)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합문(閤門)]][[봉례(奉禮)]]김혁(金革)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전농(典農) [[정(正)]]김득우(金得雨)이다. [[김종직(金宗直)]]과 교유하였다. &amp;lt;무오사화(戊午士禍)&amp;gt;와 &amp;lt;[[갑자사화(甲子士禍)]]&amp;gt;에 연루되어 고문과 형신(刑訊)을 받은 후 낙향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lt;br /&gt;
&lt;br /&gt;
=='''성종~연산군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447년(세종 29) 정묘(丁卯)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17세였다. 그러나 [[대과(大科)]]에는 합격하지 못하여 성주(星州)·충주(忠州)의 향학(鄕學) [[교수(敎授)]]를 지내다가, 성주에 낙향하여 있던 김종직과 만나 학문을 강론하면서 성리학의 이론을 토론하였다. 1480년(성종 11)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50세였다.[『방목(榜目)』]&lt;br /&gt;
&lt;br /&gt;
1490년(성종 21) 과거 출신자를 성균관의 관원으로 임명하여 성균관 유생(儒生)들의 사유(師儒)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김계행도 후보자가 되었으나, 학문은 훌륭하나 나이가 많다고 하여 임명되지 못하고,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2101024_009 『성종실록』 21년 1월 24일]),([http://sillok.history.go.kr/id/kia_12107021_003 『성종실록』 21년 7월 21일]) 1493년(성종 24) 마침내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어 유생들의 사유(師儒)가 되었는데, 이는 그의 형의 아들인 ‘학조(學祖) 스님’이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仁粹大妃)에게 간청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2410024_005 『성종실록』 24년 10월 24일])&lt;br /&gt;
&lt;br /&gt;
1498년(연산군 4) 연산군이 [[보경당(寶慶堂)]]에서 [[경연관(經筵官)]]에게 강론을 시험하였는데, 김계행은 경학(經學)과 훈고학(訓詁學)에 정통하여 ‘약통(略通)’의 점수를 받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ja_10405006_001 『연산군일기』 4년 5월 6일]) 이에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어 여러 직언을 하였으나,([http://sillok.history.go.kr/id/kja_10407025_009 『연산군일기』 4년 7월 25일]) 연산군이 번번이 받아들이지 않자 사임하는 글을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http://sillok.history.go.kr/id/kja_10501021_001 『연산군일기』 5년 1월 21일]) 그리고 풍산(豊山)의 사제에 ‘보백당(寶白堂)’이라는 서실을 지은 후 학생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비문] 그러나 얼마 후 무오사화가 일어나면서 김종직의 사림파(士林派)가 숙청당할 때 김계행 또한 김종직과 교유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이때 그는 유자광(柳子光)의 변호로 겨우 목숨을 건지고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1504년(연산군 10) 발생한 갑자사화에 다시 연루되었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廢妃尹氏)의 폐출과 관련이 있는 성종 때의 구신(舊臣)들이 이때 참혹한 형벌을 받았는데, 김계행도 당시에 승정원 [[승지(承旨)]]로 있었다고 하여 1505년(연산군 11)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형신을 당한 후 유배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ja_11011009_013 『연산군일기』 10년 11월 9일]),([http://sillok.history.go.kr/id/kja_11101006_004 『연산군일기』 11년 1월 6일]) 그로부터 1년 뒤인 1506년 9월 &amp;lt;[[중종반정(中宗反正)]]&amp;gt;이 일어나자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이후 그는 나이가 많다는 핑계로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연산군의 신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임금에게 벼슬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연산군의 폐출과 죽음을 애도하기도 하였다. 1517년(중종 12) 12월 11일 노병으로 안동의 고향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87세였다.[『눌은집(訥隱集)』 권11 「보백당김선생묘갈명(寶白堂金先生墓碣銘)」 이하 「김계행묘갈명」으로 약칭]&lt;br /&gt;
&lt;br /&gt;
문집으로 『보백당선생실기(寶白堂先生實記)』 4권 2책이 있다.&lt;br /&gt;
&lt;br /&gt;
=='''성품과 일화'''==&lt;br /&gt;
&lt;br /&gt;
김계행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은 강인하고 행동은 방정(方正)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남보다 뛰어나, 어려서부터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았으므로, 부모가 특이하게 여겨서 말하기를, “이 아들이 우리 집 문호(門戶)를 유지할 것이다” 하였다.[「김계행묘갈명」]&lt;br /&gt;
&lt;br /&gt;
김계행은 벼슬이 영달(榮達)하였으나, 청렴하고 검소하기가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그는 일찍이 시를 짓기를,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지만[吾家無寶物], 보물은 오로지 청렴과 결백뿐이로다[寶物惟淸白]”라고 하여, 자신의 뜻을 나타냈다. 그리하여 병이 들자 아들과 조카와 여러 손자들을 불러서 경계하기를, “청렴과 결백, 효도와 우애를 가지고 우리 집안을 유지하도록 하라. 교만하고 사치하면,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또 이어서 유언하기를, “나는 경악(經幄)의 근신(近臣)으로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한 시대를 구제할 수 없었으니, 내가 죽거든 장례를 갖추어 지내지 말고 명문(銘文)을 지어 비석을 세우지 말도록 하라. 착한 행실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착하다는 칭찬을 듣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였다.[「김계행묘갈명」]&lt;br /&gt;
&lt;br /&gt;
성품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였다. 평소에 묵촌(黙村)의 조용하고 외진 것을 좋아하였으므로, 무오사화가 일어난 뒤로 자주 왕래하다가, 1500년(연산군 6)에 낙향하여 송암(松巖)의 폭포 위에 만휴정(晩休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여기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 삼았다. 그는 만휴정 앞의 시내를 보고 본래 거묵역(居默驛)이었던 마을 이름을 묵계(默溪)라고 고쳤다.&lt;br /&gt;
&lt;br /&gt;
그의 형 김계권(金係權)의 맏아들 김학조가 일찍이 속세를 떠나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등곡선사(燈谷禪師)’라고 불렸는데, 사람들은 그를 ‘학조 스님’이라고 불렀다. 세조(世祖)가 불교를 깊이 믿고 ‘학조 스님’을 [[국사(國師)]]로 삼았으므로 그의 위세도 대단하였다. 김계행이 성주교수(星州敎授)로 있을 때, 조카인 학조 스님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에게 문후(問候)하려고 하였다. 그때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승려 학조를 예우한다며 삼촌인 김계행에게 조카를 보러 [[감영(監營)]]으로 오도록 청하였으나, 김계행은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학조 스님이 삼촌을 찾아가서 만났는데, 김계행이 노여워하며 하인을 시켜 거의 피가 나도록 학조의 종아리를 때렸다고 한다.[「김계행묘갈명」]&lt;br /&gt;
&lt;br /&gt;
그 뒤에 학조 스님이 김계행을 찾아가 은근히 말하기를, “숙부께서 오래도록 곤궁함이 심한 것 같은데, 뜻이 있으시면 제가 좋은 자리를 얻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자, 김계행이 노여워하며 “내가 너로 인하여 벼슬을 얻게 된다면 무슨 낯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겠는가” 하고, 하인을 시켜 종아리를 때렸다. 이때 [[사림(士林)]]의 여론이 이것을 통쾌하게 여겼다고 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2410024_005 『성종실록』 24년 10월 24일]) 김계행이 조카 학조가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국사가 된 것을 미워하여 종아리를 때린 것이다.&lt;br /&gt;
&lt;br /&gt;
=='''묘소와 후손'''==&lt;br /&gt;
&lt;br /&gt;
시호는 정헌이다. 묘소는 경상도 안동 학가산 아래 직곡(稷谷)의 선영에 있는데, 그가 죽은 지 2백 15년 뒤에 이광정(李光庭)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김계행묘갈명」] 현재 무덤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직리에 있다. 1859년(철종 10)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1687년(숙종 13) 안동의 사림에서 묵계서원(默溪書院)을 창건하고 제향하였는데, 1706년(숙종 32) 나라에서 사액(賜額)하고 전토와 노비를 하사하였다.&lt;br /&gt;
&lt;br /&gt;
첫째 부인 이천 서씨(利川徐氏)는 현감(縣監)서운(徐運)의 딸인데, 2녀를 낳았다. 장녀는 [[찰방(察訪)]]박눌(朴訥)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진사(進士)]]유자온(柳子溫)의 처가 되어 유공작(柳公綽)·유공권(柳公權)·유공석(柳公奭)·유공계(柳公季) 4형제를 낳았는데, 유공작의 손자가 유성룡(柳成龍)이다. 둘째 부인 의령 남씨(宜寧南氏)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남상치(南尙治)의 딸인데, 5남을 낳았다. 장남 김극인(金克仁)은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지냈고, 차남은 김극의(金克義)이며, 3남 김극례(金克禮)는 [[생원(生員)]]이다. 4남은 김극지(金克智)이고, 5남 김극신(金克信)은 군수(郡守)를 지냈다.[「김계행묘갈명」]&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성종실록(成宗實錄)』      &lt;br /&gt;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lt;br /&gt;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lt;br /&gt;
*『국조방목(國朝榜目)』      &lt;br /&gt;
*『보백당실기(寶白堂實記)』      &lt;br /&gt;
*『소산집(小山集)』      &lt;br /&gt;
*『점필재집(佔畢齋集)』      &lt;br /&gt;
*『경산집(經山集)』      &lt;br /&gt;
*『대산집(大山集)』      &lt;br /&gt;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lt;br /&gt;
*『밀암집(密菴集)』      &lt;br /&gt;
*『옥천집(玉川集)』      &lt;br /&gt;
*『눌은집(訥隱集)』      &lt;br /&gt;
*『허백정집(虛白亭集)』      &lt;br /&gt;
*『경산집(經山集)』      &lt;br /&gt;
*『사호집(思湖集)』      &lt;br /&gt;
&lt;br /&gt;
[[분류:인물]][[분류:문신]][[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성종~연산군]]&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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