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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사(騎士)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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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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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09T15:50:3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직역|대표표제=기사|한글표제=기사|한자표제=騎士|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향기사(鄕騎士), 경기사(京騎士)|관련어=별효위(別驍衛), 마병(馬兵), 향기사(鄕騎士)|분야=정치/군사·국방/편제|유형=직역|지역=|시대=조선|왕대=조선|집필자=노영구|제정시기=1746년(영조 22)|폐지시기=|소속관서=어영청, 금위영|관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964|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ca_10411016_003 『태종실록』4년 11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503008_001 『세종실록』15년 3월 8일],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007011_003 『숙종실록』10년 7월 11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607028_001 『영조실록』26년 7월 28일]}}&lt;br /&gt;
&lt;br /&gt;
조선후기 어영청과 금위영에 소속되어 도성에 번상 숙위하던 황해도 지역 기병. 1750년 이후 황해도 향기사의 번상은 폐지되고 군영에서 선발한 경기사가 도성 숙위를 전담함.&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조선전기까지 기사(騎士)는 보통 기병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세종실록』18년 윤6월 18일 2번째기사]. 다만 기사는 보통의 기병보다 군사력이 뛰어나거나 상위의 존재로서 왕 측근의 기병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411016_003 『태종실록』4년 11월 16일]). 일반적인 기병은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기사(騎射)]] 능력이 필요했지만 기사(騎士)는 [[기사(騎射)]] 이외에도 적군과의 전투에서 일전을 겨루며 아울러 주장을 호위하고 포위망을 돌파하는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했으므로 기사(騎士)는 말을 달리며 창을 다루는 무예인 [[기창(騎槍)]]도 익혔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503008_001 『세종실록』15년 3월 8일]).&lt;br /&gt;
&lt;br /&gt;
임진왜란 직후부터 조선의 군사 체제는 기존의 기병 중심에서 보병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므로 훈련도감 등 새로이 창설된 군영의 병종도 보병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북방 여진족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호란(胡亂)을 전후하여 여러 군영에 기병 부대를 추가로 창설하기 시작하였다. 인조대에는 훈련도감에 [[마병(馬兵)]]이, 효종대인 1658년(효종 9)에는 어영청에 [[별마대(別馬隊)]]라는 기병 부대가 창설되었다. 어영청에서는 이후 황해도 지방 기병을 [[향기사(鄕騎士)]]라는 명칭으로 도성에 교대로 번상(番上)하도록 하였다.&lt;br /&gt;
&lt;br /&gt;
1682년(숙종 8) 3월 금위영이 창설되었으나 모두 보병이었으므로 1684년 6월 황해도에서 200여 명의 기병을 확보하여 13번(番)으로 나누고 각 번에 16명씩 번상하게 하면서 별효위라고 하였다. 7월에는 그 규모가 크게 확대되어 13번 체제는 그대로 유지하되 각 번마다 번상하는 인원을 60명으로 늘려 편성한 것으로 보아 780명 정도로 증액된 듯하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1007011_003 『숙종실록』10년 7월 11일]). 1746년(영조 22) 별효위를 혁파하고 황해도 감영과 수영의 [[별무사(別武士)]] 가운데 [[숙위(宿衛)]]에 적합한 자를 [[향기사(鄕騎士)]]로 편성하여 번상하여 숙위하도록 하였다.&lt;br /&gt;
&lt;br /&gt;
향기사는 14번으로 나누어 매달 차례로 번상하였다. 그러나 향기사 편성 이후 이들의 번상 부담이 커져서 1750년 금위영과 어영청에 경기사(京騎士)를 각각 150명 창설하여 도성 숙위를 전담하도록 하고 향기사의 번상 규정을 폐지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2607028_001 『영조실록』26년 7월 28일]). 이후 향기사들은 모두 황해 감영에 소속시키되 [[군포(軍布)]]를 납부하게 하여 경기사의 급료로 사용하였다. 경기사 150명은 과거의 무과에 급제하고 아직 벼슬에 나서지 못한 한성과 지방 [[출신(出身)]]으로 [[취재(取才)]]하여 말을 납입하여 임명하였다. 기사들의 취재는 유엽전(柳葉箭), [[편전(片箭)]], 기추(騎芻), [[편추(鞭蒭)]], 강서(講書) 등 다섯 과목 가운데 두 과목을 시험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lt;br /&gt;
&lt;br /&gt;
경기사는 3번으로 나누어 매번 50명을 2[[정(正)]] 4령(領)으로 편성하였다. 이들의 지휘관으로는 가선대부(嘉善大夫)급 수사(水使) 및 당상관 병사(兵使) 이상의 기사별장(騎士別將) 1명과 [[영장(營將)]] 이상의 기사장(騎士將) 3명이 임명되었다. 이들 기사별장과 기사장에게는 수하의 군병인 표하군(標下軍)이 배치되어 보조 임무를 하였는데, 별장표하군은 21명, 기사장표하군은 13명으로 편성되어 있었다.&lt;br /&gt;
&lt;br /&gt;
=='''담당 직무'''==&lt;br /&gt;
&lt;br /&gt;
근무하는 경기사 50명은 궁성의 숙위나 도성의 경비 및 방어, 왕의 도성 내외 [[행행(行幸)]] 시 시위(侍衛) 등을 담당하였다. 또한 주요 군영에서 입직(入直)하기도 하였는데, 금위영의 경우 신영(新營)에 기사장 1명의 지휘 아래 기사 25명이 입직 근무하였다. 어영청은 동영(東營)에 25명이 입직하되, 왕이 임시로 경희궁에 거처할 때에는 북이영(北二營)에 기사 25명이 입직 근무하였다. 1778년(정조 2)부터는 큰 조회[大朝會]가 있을 때에는 금위영과 어영청의 기사 각 12명이 무기와 복장을 갖추고 파문갑사(把門甲士)로서 문에서 파수하였다. 한편 기사들에게는 매 번에 3명까지 휴가를 주도록 하였다.&lt;br /&gt;
&lt;br /&gt;
기사는 금위영과 어영청의 주요 기병 부대였으므로 진법 훈련 시 진 후방에 대기하고 있으면서 [[포수(砲手)]]의 공격으로 적군이 약해지면 앞으로 달려 나가 적군을 포위하여 공격하거나,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격멸하는 임무를 주로 맡았다. 이를 위한 기사들만의 진법 훈련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기사학익진(騎士鶴翼陣), 기사봉둔진(騎士蜂屯陣) 등이 그것이다.&lt;br /&gt;
&lt;br /&gt;
기사들에게는 활과 화살[弓矢], 도리깨와 곤봉[鞭棍], 갑옷과 투구[甲冑], [[예도(銳刀)]]의 일종인 [[환도(環刀)]]가 각각 지급되었다. 진법 훈련 시에는 적군이 100보(步) 이내로 다가오면 말에 올라타고 50보 이내로 접근하면 일제히 화살을 발사한 후 편곤을 휘두르며 돌격하여 적군을 공격하였다.&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기사에게는 왕이 행행 등으로 궁궐을 비울 때의 이른바 [[공궐위장(空闕衛將)]]과, 금위영과 어영청의 [[초관(哨官)]]으로 승직되는 보직은 있었으나 장기 근무[久勤]할 자격은 없었다. 이에 1808년(순조 8) 과거의 무과에 급제하고 아직 벼슬에 나서지 못한 사람인 [[출신(出身)]]과 [[한량(閑良)]]을 모두 통틀어 시취하여 장기 근무자 세 자리를 만들고, 금위영과 어영청에서 도목(都目) 때마다 돌려가며 별무사 두 자리를 승진 임명하도록 제도가 바뀌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lt;br /&gt;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lt;br /&gt;
*『일성록(日省錄)』      &lt;br /&gt;
*『대전회통(大典會通)』      &lt;br /&gt;
*『병학통(兵學通)』      &lt;br /&gt;
*『만기요람(萬機要覽)』      &lt;br /&gt;
*『금위영등록(禁衛營謄錄)』      &lt;br /&gt;
*이태진, 『조선 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lt;br /&gt;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 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lt;br /&gt;
*최형국, 「조선 숙종대 지방 기병부대 창설과 마상무예의 변화」, 『역사와 실학』44, 2011.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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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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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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