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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장(鼓匠)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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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4-25T03:34:50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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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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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12-09T15:58: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직역|대표표제=고장|한글표제=고장|한자표제=鼓匠|대역어=|상위어=경공장(京工匠)|하위어=장고장(杖鼓匠), 절고장(節鼓匠)|동의어=풍물장(風物匠)|관련어=거모장(去毛匠), 악기장(樂器匠)|분야=정치/행정/관속|유형=직역|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조선|집필자=장경희|제정시기=1434년|폐지시기=1884년|소속관서=군기시|관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2925|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1606011_005 『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608001_004 『세조실록』 6년 8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606011_005 『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608001_004 『세조실록』 6년 8월 1일]}}&lt;br /&gt;
&lt;br /&gt;
한성부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북의 제조를 맡았던 장인.&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에 고장(鼓匠)은 장고를 만들던 장고장(杖鼓匠)이나 절고(節鼓)를 만들던 절고장(節鼓匠)으로 세분되었으며, 각종 타악기를 만들던 풍물장(風物匠)도 북을 만들던 장인이었다. 조선초기 세조 때까지 북은 군대의 진퇴를 알리는 데 중요한 수단이어서 고장은 [[군기감(軍器監)]]에 4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고장이 군기시에 4명 소속되어 있었으며, 16세기 초부터 활동 상황이 발견되지 않으나 1884년에 군기시가 폐지될 때까지 법전의 규정에는 존속되어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군사용 북보다 왕실 의례 시 정재용 북의 수요가 많아 장고장이 훈련도감이나 상의원에 소속되어 있다가 국가에서 필요한 북을 제작하였다. 1892년에는 장악원에 장고장과 풍물장이 소속되어 각종 연향용 북을 제작하였다.&lt;br /&gt;
&lt;br /&gt;
=='''담당 직무'''==&lt;br /&gt;
&lt;br /&gt;
북은 크게 군대용, 의례용, 불교용, 민속용의 네 가지로 구분된다. 이 중 [[경공장(京工匠)]]으로서 관장(官匠)으로 활동하거나 국가적 의례를 거행하기 위해 도감에 차출된 고장이 제작한 북은 군대용과 의례용으로 나눌 수 있다.&lt;br /&gt;
&lt;br /&gt;
첫째, 국가적 안위를 위해 군대에서는 진퇴를 알리는 신호로 사용하기 위해 다양한 북을 만들었다. 군사용이나 관아에서 조회를 하거나 행진을 할 때 사용하는 북들이 전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초기에는 병조 산하의 군기감에 고장 6명을 소속시켜 군대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한 북을 제작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606011_005 『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이렇게 군대용으로 사용하는 북의 수요가 늘어나자 세조대에는 군기감에 고장 15명을 소속시킴과 동시에 가죽에서 털을 뽑아 제거하는 거모장 15명까지 소속시키도록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608001_004 『세조실록』 6년 8월 1일]). 15세기에 들어 성종대에 사회가 안정되자 『경국대전』에 의하면 고장 4명을 군기시에 소속시켜 그 숫자가 줄어들었다.&lt;br /&gt;
&lt;br /&gt;
둘째, 왕실의 권위와 안정을 대내외에 과시할 각종 왕실 의례와 연향을 장엄하게 하기 위한 각종 북은 풍물장이 만들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중앙 관서와 지방관청에서 징·꽹과리·장구·소고 등 악기를 만들던 장인, 풍물장이 상의원에 8명이 소속되어 있었다.&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이 북 치는 법을 제정하였다 하며, 신라에는 대고(大鼓)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태묘에 제사를 지낼 때 좌고(座鼓)와 입고(立鼓)를 사용하여 음악을 연주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조선초기에 군기감의 장인은 7~8백여 명이었는데, 매월 부과된 업무[月課] 이외에 잡일이 많아서 장인들이 도망가 1434년에는 그 숫자가 3백여 명으로 줄어들어 인원수를 보충한 적이 있었다. 당시 고장은 6명으로서 그대로 두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606011_005 『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그런데 세조 때에는 군기감의 고장과 거모장이 각각 15명씩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608001_004 『세조실록』 6년 8월 1일]). 『경국대전』에 의하면 중앙 관서와 지방관청에서 북을 만들던 장인은 풍물장이었다. 그들은 징·꽹과리·장구·소고 등 악기를 만들던 장인이었다.&lt;br /&gt;
&lt;br /&gt;
임진왜란이 끝난 후 각종 악기가 불에 타 장악원에서 풍물을 만들려 하였으나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하여 정지하였다[『선조실록』 34년 5월 14일]. 하지만 광해군대에 들어서면 풍물 조성이 가능하여 1608년 선조의 국장도감 때 이미 풍물장 한대춘(韓大春)이 장악원의 정6품 잡직인 [[전악(典樂)]]설윤향(薛允香)의 감조를 받아 제작하였다.&lt;br /&gt;
&lt;br /&gt;
조선후기 도감에서는 고장·절고장·장고장·풍물장을 동원하여 각종 왕실 의식에 필요한 북을 제작하였다. 그들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동원된 풍물장은 1608년 선조의 국장도감에서 풍물을 제작하였다.&lt;br /&gt;
&lt;br /&gt;
첫째, 고장은 도감에 동원된 사례가 가장 적어 5번에 불과하다. 고장을 부른 도감은 [[존숭도감(尊崇都監)]]·제기악기도감(祭器樂器都監)·수작도감(酬酌都監)·천봉도감(遷奉都監) 등이었다.&lt;br /&gt;
&lt;br /&gt;
둘째, 절고장은 1688년부터 1757년까지 12번의 국장도감(國葬都監)·시호도감(諡號都監)·천릉도감(遷陵都監)에 동원되었다. 이로 미루어 국장 때 행사용 절고를 만들어 수많은 군인들이 행진을 하거나 국장 의식을 장엄하게 하기 위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셋째, 장고장은 15차례의 도감에 징발하였는데, 국장도감·[[예장도감(禮葬都監)]]·천릉도감에 가장 많이 동원되었고, 진연청·악기도감 등에서도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넷째, 풍물장이 동원된 도감은 크게 국장도감과 진찬도감(進饌都監)·악기조성도감(樂器造成都監)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이들 풍물장은 시기에 따라 동원되는 숫자나 처지가 바뀌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삼국사기(三國史記)』      &lt;br /&gt;
*『고려사(高麗史)』      &lt;br /&gt;
*『경국대전(經國大典)』      &lt;br /&gt;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通考)』      &lt;br /&gt;
*김종태, 『중요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권190 북메우기』, 문화재관리국, 1991.      &lt;br /&gt;
*이종석·이보형, 『중요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권130 북메우기』, 문화재관리국, 1980.      &lt;br /&gt;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2003.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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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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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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