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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산리보(高山里堡)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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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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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건축|대표표제=고산리보|한글표제=고산리보|한자표제=高山里堡|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고산진(高山鎭), 고산리진(高山里鎭), 고산리구자(高山里口子), 고사리(高沙里), 고산리(高山里)|관련어=강계(江界), 야인(野人), 진보(鎭堡)|분야=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유형=건축|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조선|집필자=김만호|일시=|장소=       평안북도 강계도호부 고산리 |규모=|양식=|관련인물=       강지(姜漬), 김종서(金宗瑞), 박양지(朴陽枝), 서자명(徐自明), 양관(梁瓘), 이극균(李克均), 이순신(李舜臣), 이중실(李仲實), 정충신(鄭忠臣), 최만(崔萬), 최영산(崔永山), 한호(韓豪)|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7145|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1410022_003 『세종실록』 14년 10월 22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906014_002 『세종실록』 19년 6월 14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103019_004 『세종실록』 21년 3월 19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106017_002 『세종실록』 21년 6월 17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108016_004 『세종실록』 21년 8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403010_006 『세종실록』 24년 3월 10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3201018_002 『세종실록』 32년 1월 18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3201018_002 『세종실록』 32년 1월 18일],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8007_006 『문종실록』 즉위년 8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1202003_001 『세조실록』 12년 2월 3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605029_001 『성종실록』 6년 5월 29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608016_001 『성종실록』 6년 8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709003_005 『성종실록』 7년 9월 3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309030_009 『성종실록』 13년 9월 30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105014_002 『성종실록』 21년 5월 14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208029_001 『성종실록』 22년 8월 29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208029_002 『성종실록』 22년 8월 29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210012_005 『성종실록』 22년 10월 12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210012_005 『성종실록』 22년 10월 12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210016_007 『성종실록』 22년 10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06007_002 『연산군일기』 9년 6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802008_002 『영조실록』 8년 2월 8일]}}&lt;br /&gt;
&lt;br /&gt;
조선시대 평안북도 강계도호부에 속한 첨절제사진.&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고산리보는 평안북도 강계도호부에 속한 관방시설로 주변 지형이 험하여 세종대에는 벽성(壁城)의 형태로 존재했다. 1437년(세종 19) 6월 14일에는 구자만호(口子萬戶)를 두었다. 1442년(세종 24) 2~3월에는 고산리구자에 행성(行城)을 쌓았으며, 1482년(성종 13)에는 고산리진성을 쌓았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진성을 쌓으면서 첨절제사를 둔 것 같다.&lt;br /&gt;
&lt;br /&gt;
=='''위치 및 용도'''==&lt;br /&gt;
&lt;br /&gt;
고산리보는 강계도호부에 위치해 있다. 강계는 야인이 침입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국방상 요충지 중 하나였다. 그리고 강계의 요해처는 만포(滿浦)와 고산리(高山里) 두 곳이었다. 『여지도서』에는 고산리보가 관아의 서쪽 150리(약 59㎞)에 있다고 했는데, 현재에는 자강도 강계시에 속한다.&lt;br /&gt;
&lt;br /&gt;
=='''변천 및 현황'''==&lt;br /&gt;
&lt;br /&gt;
1432년(세종 14) 10월에는 평안도감사의 관문(關文)에 의해 고산리를 지키는 군인을 인근의 구자둔(口子屯)을 지키는 군인과 합쳐서 만포(萬浦)의 목책으로 들어가서 함께 지키도록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410022_003 『세종실록』 14년 10월 22일]). 이때까지만 해도 고산리는 별도의 조직이나 방어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것이 1437년(세종 19) 6월에 구자만호를 두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906014_002 『세종실록』 19년 6월 14일]). 1439년(세종 21) 3월 조정에서는 연변에 위치한 여러 구자(口子)를 점차 석성으로 쌓으려고 했다. 하지만 평안도도절제사이천(李蕆)은 여기에 반대하며 목책을 수리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농사에 힘쓰게 할 것을 제안했다. 강계 지역은 만포(滿浦)와 고산리(高山里)가 만나는 강변 30리 거리에 위치한 정부인(鄭夫人) 터에 목책을 설치하기로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정부인 터에 석성을 쌓는 걸로 합의를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103019_004 『세종실록』 21년 3월 19일]).&lt;br /&gt;
&lt;br /&gt;
연변에 위치한 고산리보에는 야인들이 자주 침입했다. 1439년(세종 21) 5월 24~25일에는 150여 명이 고산리구자 건너편에 모습을 보였으며, 8월에는 오랑개[吾郞介]의 기병(騎兵) 8명이 활과 화살을 차고 고산리 쪽 강가에 오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106017_002 『세종실록』 21년 6월 17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108016_004 『세종실록』 21년 8월 16일]).&lt;br /&gt;
&lt;br /&gt;
1442년(세종 24) 2월 10일에는 평안도의 정부(丁夫) 300명과 황해도의 정부 2,000명을 보내어 고산리 구자에 행성(行城)을 쌓기 시작했다. 이때 한 달여에 걸쳐 쌓은 성의 길이는 12,619척(약 3.8㎞)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403010_006 『세종실록』 24년 3월 10일]).&lt;br /&gt;
&lt;br /&gt;
1448년(세종 30) 8월에는 세종이 평안도감사에게 남도에서 부방하는 군사의 수를 조정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불정동(佛丁洞) 방어소에 배정되어 있던 남도 부방군인 갑사(甲士) 15명 중 8명이 고산리 구자(高山里口子)로 옮기게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201018_002 『세종실록』 32년 1월 18일]).&lt;br /&gt;
&lt;br /&gt;
1450년(세종 32) 평안도도절제사김종서(金宗瑞)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만 하더라도 고산리보는 석성이 아니라 벽성(壁城)으로 축성되었다. 고산리보의 지형이 높고 험하여 대규모의 적군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지역 농민들이 혹시 좀도둑의 피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조정의 걱정도 작용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201018_002 『세종실록』 32년 1월 18일]).&lt;br /&gt;
&lt;br /&gt;
1450년(문종 즉위)에는 김종서가 고산리에 석성을 쌓아야 야인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다고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의정부와 병조에서는 점차 석성으로 쌓자고 의결하였고, 문종 역시 이에 동의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8007_006 『문종실록』 즉위년 8월 7일]).&lt;br /&gt;
&lt;br /&gt;
1466년(세조 12) 2월에는 도체찰사한명회가 종사관이수남(李壽男)을 보내어 고산리성의 높이가 7~8척(약 2m)으로 낮기 때문에 12척(약 3.6m)을 더 쌓고, 무너진 행성(行城)도 점차 수축할 것을 보고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1202003_001 『세조실록』 12년 2월 3일]).&lt;br /&gt;
&lt;br /&gt;
1475년(성종 6) 5월에는 나졸 박양지(朴陽枝) 등 10명이 강을 건너 정찰하다가 야인들에게 잡혀가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0605029_001 『성종실록』 6년 5월 29일]).  이들 중 갑사 최영산(崔永山)은 8월 9일에 도망쳐 돌아왔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0608016_001 『성종실록』 6년 8월 16일]). 야인들의 출몰은 계속되었는데, 1476년(성종 7)에도 야인 10여 명이 고산리 강 밖에서 사냥하면서 틈을 엿보았다고 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0709003_005 『성종실록』 7년 9월 3일]).&lt;br /&gt;
&lt;br /&gt;
1482년(성종 13)에는 고산리진성을 쌓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1309030_009 『성종실록』 13년 9월 30일]). 동시에 만호진이던 고산리보는 첨절제사를 둔 것 같다. 1490년(성종 21) 5월에는 첨절제사양관(梁瓘)의 이름이 확인되기 때문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2105014_002 『성종실록』 21년 5월 14일]).&lt;br /&gt;
&lt;br /&gt;
1491년(성종 22) 8월 21일에는 야인 200여 명이 고산리성을 포위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조선군은 이 전투에서 적의 머리 39급(級)을 베는 등 크게 승리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2208029_001 『성종실록』 22년 8월 29일])([http://sillok.history.go.kr/id/kia_12208029_002 『성종실록』 22년 8월 29일]). 성종 역시 고산리에서의 승전을 매우 기뻐했으며, 공을 치하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2210012_005 『성종실록』 22년 10월 12일]). 같은 해 10월 서북면도원수가 고산리의 군공을 올렸는데, 1등에는 유호(兪顥) 등 124명, 2등에는 유중성(劉仲誠) 등 84명, 3등에는 김신동(金信仝) 등 71명, 4등에는 성첩(城堞)을 지킨 김외동(金外同) 등 149명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2210012_005 『성종실록』 22년 10월 12일]). 대체로 이 제안이 받아들여진 것 같다. 같은 달 16일에 최종적으로 그들의 군공이 정해졌다. 성종은 1등은 3자급(資級), 2등은 2자급, 3등은 1자급을 더해주고, 정탐꾼은 2등의 예로, 성벽을 지킨 사람은 3등의 예로 할 것이며, 성첩을 지킨 사람이 천구(賤口)이면 면포(綿布) 8필(匹)을 지급하라고 명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2210016_007 『성종실록』 22년 10월 16일]). 군공이 정해진 이후 여러 신하로부터 포상이 지나치게 크다는 지적이 제기되었으나, 성종은 그때마다 윤허하지 않았다. 성종이 고산리전투의 승리를 얼마나 기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lt;br /&gt;
&lt;br /&gt;
1503년(연산 9) 6월에는 실제로 기주위(岐州衛) 소속의 야인들이 고산리보에 침입하여 도둑질을 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때 조선 측에서는 야인 4명을 죽이고 사을두(沙乙豆)라는 자를 생포하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06007_002 『연산군일기』 9년 6월 7일]).&lt;br /&gt;
&lt;br /&gt;
1732년(영조 8) 무렵에 오면 강계 지역의 큰 폐단으로 국경을 넘어오는 범월과 불법으로 장사를 하는 잠상이 지적된다. 잠상의 근거지 중 하나가 고산리진이었는데, 영조는 절제사로 하여금 날마다 살펴서 금지하도록 명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0802008_002 『영조실록』 8년 2월 8일]). 하지만 범월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이를 적발한 자는 포상을 받았고, 관리가 허술한 자는 처벌을 받았다.&lt;br /&gt;
&lt;br /&gt;
=='''형태'''==&lt;br /&gt;
&lt;br /&gt;
1442년(세종 24)에는 고산리 구자에 행성을 쌓았는데, 성의 길이는 12,619척(약 3.8㎞)이었다. 1482년(성종 13)에는 고산리진성을 쌓았는데, 높이는 8척(약 2.4m)이고 둘레는 2,145척(약 650m)이었다.&lt;br /&gt;
&lt;br /&gt;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산리보는 강계도호부의 서쪽 125리(약 49㎞)에 있으며, 석성으로 둘레가 1,106척(약 335m)이고 높이는 4척(약 1.2m)이라고 했다. 병마첨절제사영이 있으며 성안에는 군창이 있다. 참고로 정약용의 『대동수경』에는 고산리보가 강계의 서쪽 150리에 있으며, 성의 둘레는 1,106척이라고 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lt;br /&gt;
*『여지도서(輿地圖書)』      &lt;br /&gt;
*『대동수경(大東水經)』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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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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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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