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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찬회(慶讚會)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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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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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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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XML 가져오기&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의식행사|대표표제=경찬회|한글표제=경찬회|한자표제=慶讚會|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경찬법석(慶讚法席), 경찬법회(慶讚法會), 낙성법회(落成法會), 낙성회(落成會)|관련어=자씨전(慈氏殿), 내불당(內佛堂), 정업원(淨業院), 법연(法筵)|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의식·행사|지역=전국|시대=고려, 조선|왕대=|집필자=탁현규|시작시기=고려|시행시기=고려~조선|시행기관=왕실|시행장소=사찰, 내불당, 정업원|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3260|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05020_002 『세종실록』 17년 5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604010_003 『세종실록』 16년 4월 10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207003_001 『세종실록』 22년 7월 3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3011021_002 『세종실록』 30년 11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3011025_001 『세종실록』 30년 11월 25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1018_003 『세종실록』 31년 1월 18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1104007_002 『세조실록』 11년 4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712011_003 『성종실록』 17년 12월 11일]}}&lt;br /&gt;
&lt;br /&gt;
사찰의 불상이나 불탑 등을 조성하거나 불경 간행을 마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여는 불교 의식.&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경찬회(慶讚會)는 불상을 조성하거나 사찰의 탑이나 전각(殿閣) 등의 건축을 마쳤을 때, 또는 경전의 간행이 끝났을 때 그것을 기념하여 행하는 의식이다. 경찬회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조선전기인 1448년(세종 30) 세종이 내불당에서 연 경찬회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 있어, 당시 법회의 규모 및 상황 등을 파악해 볼 수 있다. 낙성법회(落成法會), 경찬도량(慶讚道場), 경찬법석(慶讚法席), 경찬법회(慶讚法會)라 칭하기도 한다.&lt;br /&gt;
&lt;br /&gt;
=='''연원 및 변천'''==&lt;br /&gt;
&lt;br /&gt;
단군시대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동국통감』에 1070년(고려 문종 24) 흥왕사(興王寺)의 자씨전(慈氏殿)이 완성되어 왕이 가서 이를 축하하는 경성대회(慶成大會)를 베풀고 하룻밤을 자고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경찬회에 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법회를 ‘대회(大會)’로 표현하고 대부분 1~4일 동안 진행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대규모의 법회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고려사』에는 1087년(고려 선종 4)에 황금탑(黃金塔)을 조성한 후, 1097년(고려 숙종 2) 국청사(國淸寺)가 완공된 후 경찬회를 열었고, 1250년(고려 고종 37) 8월 고종이, 1285년(고려 충렬왕 11) 11월과 1289년 10월 충숙왕이 법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통해 고려말기까지 경찬회가 지속적으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절차 및 내용'''==&lt;br /&gt;
&lt;br /&gt;
조선전기에도 경찬회의 전통이 이어지는데 태종 때 원주 치악산에 있는 각림사 승려들이 절을 중건하고 경찬회를 열었다는 기록과([http://sillok.history.go.kr/id/kda_11705020_002 『세종실록』 17년 5월 20일]), 1434년(세종 16) 양주 회암사에서 절을 중수하고 승려들이 경찬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604010_003 『세종실록』 16년 4월 10일]).&lt;br /&gt;
&lt;br /&gt;
1440년(세종 22) 흥천사 사리각에서 경찬회를 열었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 많은 재물을 허비한다는 이유로 좌정언(左正言)박적선(朴積善)이 경찬회를 그만둘 것을 아뢰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207003_001 『세종실록』 22년 7월 3일]). 세종은 2년 후인 1442년(세종 24) 3월 24일에도 흥천사에서 사리탑을 중창(重創)하고 5일 동안 경찬회를 베풀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1447년(세종 29) 수양대군이 어머니 소헌왕후를 위해 양평 용문사에 보전(寶殿)을 짓고, 불상 2구와 보살상 8구를 봉안한 뒤 다음 해에 경찬회를 열고, 용문사를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사찰인 원찰(願刹)로 삼았다.&lt;br /&gt;
&lt;br /&gt;
세종은 1448년(세종 30)에 내불당이 완공되자 성대한 규모로 경찬회를 열었다. 이때 불당 밖의 건천(乾川)에서 음식을 나누어 주었는데 700~800명 되는 사람들이 모여 소비한 쌀이 2,570여 석에 달했다. 또한 경찬회를 위해 새로 곡을 지어 관현(管絃)에 올리고, 악기를 만들어서 [[공인(工人)]] 50명과 무동(舞童) 10명으로 부처에게 음성공양(音聲供養)을 하도록 하였는데, 종(鍾)·[[경(磬)]]·[[범패(梵唄)]]·사(絲)·죽(竹)으로 이루어진 법회 소리가 사찰 밖에까지 퍼졌다고 전한다. 경찬회가 끝나고는 수양대군이 경찬회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계문(契文)을 지어, 모임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써서 축(軸)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011021_002 『세종실록』 30년 11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3011025_001 『세종실록』 30년 11월 25일]). 이듬해 1월에도 내불당에서 4일 동안 경찬회를 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1018_003 『세종실록』 31년 1월 18일]).&lt;br /&gt;
&lt;br /&gt;
1465년(세조 11) [[원각사(圓覺寺)]]가 낙성되자 세조는 성대한 규모로 경찬회를 열었다. 경찬회의 법회 의식에 동참한 승려의 수만 128명에 달했고, 2만여 명의 승려가 경찬회에 참석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1104007_002 『세조실록』 11년 4월 7일]). 1486년(성종 17)에 비구니들의 승방인 [[정업원(淨業院)]] 중수 후에도 경찬회가 열렸는데, 이를 두고 사헌부 대사헌[[박건(朴楗)]] 등이 &amp;quot;부녀자들이 탄 가마가 길에 연이어 있고 흉년임에도 시주를 많이 해서 재물을 헛되이 소비한다.&amp;quot;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1712011_003 『성종실록』 17년 12월 11일]).&lt;br /&gt;
&lt;br /&gt;
이처럼 조선전기에는 왕실과 관련된 사찰의 중창 공사가 끝날 때마다 왕실 주도의 경찬회가 열리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1486년의 기록을 끝으로 실록에서는 더 이상 경찬회에 관한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로 볼 때 조선중기 이후에는 왕실에서 주도하는 대규모의 경찬회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하지만 사찰에서의 경찬회 전통은 조선후기까지 계속 이어졌으며, 오늘날까지도 낙성회(落成會), 경찬법회 등의 이름으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고려사(高麗史)』      &lt;br /&gt;
*『동국통감(東國通鑑)』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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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분류:문화]][[분류:종교]][[분류:불교]][[분류:의식·행사]][[분류:전국]][[분류:고려, 조선]]&lt;/div&gt;</summary>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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