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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수궁(慶壽宮)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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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ilman: XML 가져오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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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lt;br /&gt;
&lt;br /&gt;
{{건축|대표표제=경수궁|한글표제=경수궁|한자표제=慶壽宮|대역어=|상위어=궁가(宮家)|하위어=|동의어=|관련어=궁방전(宮房田), 향동(鄕洞), 화빈윤씨(和嬪尹氏)|분야=왕실/왕실건축|유형=건축|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정조|집필자=정정남|일시=정조대|장소=한양 향동|규모=|양식=|관련인물=화빈윤씨(和嬪尹氏), 정조|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9746|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wa_12607005_001 『순조실록』 26년 7월 5일]}}&lt;br /&gt;
&lt;br /&gt;
1780년(정조 4) 정조의 후궁으로 책봉된 화빈윤씨(和嬪尹氏)의 [[궁가(宮家)]].&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화빈윤씨는 윤창윤(尹昌胤)의 딸로 1780년 창경궁 자경전(慈慶殿)에서 가례를 올리고 후궁에 책봉되었으며 궁호를 경수(慶壽)라고 했다. 경수궁은 화빈윤씨를 의미하는 것과 동시에 경수궁에 소속된 [[궁방전(宮房田)]] 및 재산을 관리하고, 화빈윤씨 사후에 제사를 맡아 거행하던 궁가를 의미한다. 경수궁의 토지들은 다른 궁가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면세지였으며, 왕실의 [[내탕(內帑)]]을 담당하기도 하여 자체적인 경제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2607005_001 『순조실록』 26년 7월 5일]). 조선후기에는 전기와 달리 왕자를 낳지 않은 후궁에게도 궁가를 하사하여 왕이 승하한 후에 나가 살 수 있도록 하였다. 또 후궁들 사후에는 해당 궁가에서 후궁들의 제사도 담당하였다. 따라서 자체적인 경제력을 유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특히 영조가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사당인 육상궁(毓祥宮)과 능묘인 소령원(昭寧園)을 왕비급으로 격상시키면서 후궁의 지위를 높인 것에서 후궁의 궁가가 확대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 것이 계기가 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이후 1908년(융희 2) 대한제국이 쇠락의 길을 걷던 통감부 시기에 경수궁도 다른 사묘나 궁가들과 마찬가지로 국가 제사의 개선과 정비라는 미명하에 폐궁시킨 이후 신위를 매안(埋安)하고 국유로 이속하였다.&lt;br /&gt;
&lt;br /&gt;
=='''위치 및 용도'''==&lt;br /&gt;
&lt;br /&gt;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향동경수궁(鄕洞慶壽宮)』 도형(圖形)에 따르면, 화빈윤씨의 궁가였던 경수궁은 창덕궁 앞쪽 향동에 위치했다.&lt;br /&gt;
&lt;br /&gt;
=='''형태'''==&lt;br /&gt;
&lt;br /&gt;
경수궁의 공간 구성과 배치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향동경수궁』 도면을 통하여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파일:P00009746_01.PNG|150px]]&lt;br /&gt;
&lt;br /&gt;
전체적으로 서향하고 있는 경수궁은 중심 생활 영역을 6칸 이상의 대청과 침실로 구성하였다. 침실에 연이어 이를 보조해 주는 반빗간과 내고들이 별도의 영역을 형성하며 폐쇄적인 배치를 하고 있다. 또 대청과 침실 앞쪽으로도 궁궐 행각과 유사한 공간들로 폐쇄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남동쪽으로는 연못을 파고 주변에 화계(花階)를 꾸몄으며, 궁방의 업무를 담당하는 서제소(書題所)를 설치하였다. 궁방 재정의 기반이 되는 쌀과 물품을 보관할 수 있는 많은 곳간이 담장의 외곽을 두르며 배치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정정남, 「조선후기 궁가의 공간구성 및 배치」, 『2009년 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2009.      &lt;br /&gt;
*조영준, 「조선후기 궁방의 실체」, 『정신문화연구』제31권 제3호, 2008.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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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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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Silma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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