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륜선(火輪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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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인 증기선(蒸氣船)으로, 증기기관선의 옛 이름.

개설

화륜선(火輪船)은 목재나 석탄 등을 태워 나오는 수증기를 동력원으로 하는 배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845년(헌종 11) 김대건 신부가 소개하여 처음 알려졌고, 1866년(고종 3)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그로 인해 자체적인 화륜선 제작 시도가 흥선대원군에 의해 추진된 바 있었다. 이후 근대적 기술 수용의 일환으로 개화파들에 의해 화륜선에 대한 다방면의 논의가 있었다. 그 결과 1882년 이후 조선 정부는 운송과 국방상의 필요에 의해 외국으로부터 화륜선을 구입하여 사용하였다.

연원 및 변천

1845년(헌종 11) 김대건 신부가 서양의 증기기관선을 소개한 적이 있으며, 1842년에 끝난 청국의 아편전쟁과 특히 1860년 영·프 연합군에 의한 북경 함락이 알려짐으로써 서양의 증기기관선과 대포의 우수성이 널리 인식되었다. 또한 대원군 1차 집권기(1863~1873)에는 한국 연안에 빈번하게 나타나던 이양선(異樣船)이 곧 증기기관선임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관심 속에서 중국에서 나온 『기기화륜선원류고(機器火輪船源流考)』, 『증기기계서(蒸氣器械書)』, 『화륜선도설(火輪船圖說)』 등을 한국에서 출판하였다. 이들 서적 중 『화륜선도설』은 화륜선의 설계도와 용도, 제조법 등을 설명한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조선 최초의 화륜선을 건조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갑신정변에 참여하였던 박제형의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 따르면, "배를 끌어 한강으로 보내왔다. 대원군이 김기두 등을 시켜 그 제도를 본 따서 철갑선을 만들고, 목탄을 때서 증기를 일으켜 기계바퀴를 운전했으나 선체는 무거운데 증기 힘이 약해서 잘 움직이지 않았다. 부수어서 다시 배를 만들었는데 비용이 수십만냥이고 쌓였던 구리와 철이 싹 없어져 버렸다. 대원군이 직접 와서 배를 물에 띄워 백성들도 자유롭게 보도록 하였다. 배를 물에 띄우고 불을 댕겨서 기계를 재촉했으나 배의 운행이 매우 더디어서 한 시간 동안에 겨우 십여 보를 떠갔고, 끝내는 여러 채 작은 배로써 줄을 매어 끌도록 하니 보는 사람이 모두 비웃으며 이런 물건을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하였다. 대원군도 흥이 싹 가시었으나 끝내 후회하는 말은 없었는데 그 후에 배를 깨뜨려서 구리와 철은 대포 만드는 재료로 충당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1866년(고종 3) 평양 경내에 소각당한 제너럴셔먼호의 타고 남은 선체를 한강까지 끌어다 놓고 김기두 등으로 하여금 모방하여 철갑함을 제조케 한 다음 목탄 증기로 이를 운전케 했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의 화륜선 제조는 실패하였지만 최초의 시도라는 데 역사적 의미가 있다. 또한 1867년 9월 대원군은 해국도지 혹은 서양의 기선을 모방해서 전선(戰船)을 건조한 바 있었다.

한편 개화사상가 박규수는 개항 훨씬 전부터 기술 수용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청국의 예를 들어 서양의 대포나 증기기관선 등을 구입하는 문제와 그것을 스스로 제조하는 문제를 제기하여 주의를 환기하였다. 역관 출신 개화사상가 오경석은 "우리나라에 화륜선을 구비하게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역설하였다. 강화도조약 직후 수신사로 갔던 김기수가 돌아오자 고종은 일본에 도입된 전선, 화륜과 농기구에 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물었으며 김기수는 그 세 가지가 일본이 가장 급무로 삼고 있는 바라고 대답한 바 있었다. 개항 이후 각종 개화 상소에서는 한결같이 조선공업의 장려를 주장하였고, 윤선학은 상소에서, "옛날의 범선(帆船)과 오늘의 화륜선은 주즙(舟楫)의 고금(古今)의 다름입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개화파의 대표적 지도자 김옥균은 『한성순보』에 기고한 「회사설(會社說)」에서 "우리들은 배에는 화륜(火輪)을 달 수 있고 철도 시설을 할 수 있으며 통신은 전선으로 하고 가로에는 가스등을 달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고, 「치도약론(治道略論)」에서도 증기기관선, 기차, 전선, 채광 기술 등을 수용 대상 기술로 설명하였다.

1882년(고종 19) 10월 조정에서는 선박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주교사(舟橋司)에 명하여 외국에서 근대적인 증기선을 사들이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기선이었다.

증기기관선은 국방상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조선 정부는 1881년부터 군함 구입을 위하여 노력했고, 1884년 이래 중국, 독일, 일본 등지에서 구입 혹은 임차하는 증기기관선 역시 군사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다만 이렇게 들여온 증기기관선은 실제 사용에서는 대부분 일반 수송 업무에 이용되었다.

증기기관선은 세미(稅米) 운반 필요에서도 요구되었다. 조선 정부는 세미 운반에 이용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증기기관선을 구입하였다. 1884년 처음 구입한 3척의 증기선은 모두 세미를 운반하는 전운선(轉運船)으로 사용하였다. 1889년에는 정부와 상인이 합동으로 설립한 기선회사도 주로 정부로부터 세미 운반 업무를 청부받고 있었다. 또 증기기관선은 민간 상공업자들이 수송상의 이유로 필요로 하였다. 정부는 1882년에 민간인이 증기선을 구입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1900년 러시아 기록을 보면, 한국에서 소유한 증기기관선은 1886년 7척, 1887년 19척을 시작으로 하여 1894년에는 143척, 1895년에는 144척에 달하고 있었다. 증기선에 대한 수요가 갈수록 증가하자 조선 정부도 증기기관선의 제조를 위해 노력을 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박제형·이익성 역, 『근세조선정감』 , 탐구당, 1988.
  • 연갑수,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 이광린, 『한국개화사연구』, 일조각, 1977.
  • 이선근, 『한국사- 최근세편-』, 을유문화사, 1961.
  • 김영호, 「한말 서양기술의 수용」, 『아세아연구』31, 1968.
  • 糟谷政和, 「大院君時代の火輪船(蒸氣船)建造問題をぬぐって」, 『茨城大學政經學會雜誌』49.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