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양문(協陽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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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내전과 편전의 합문.

개설

협양문(協陽門)은 창덕궁 내전(內殿)의 합문(閤門)으로 창덕궁이 창건되던 1405년(태종 5)경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등으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어 유지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창덕궁을 개조하던 때에 훼철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치 및 용도

협양문은 창덕궁승정원(承政院) 동쪽에 있던 문이다. 왕의 침전이면서 동시에 편전(便殿) 기능을 했던 희정당(熙政堂)의 합문으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협양문은 창덕궁에 있는 왕의 침전인 희정당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大造殿) 영역으로 드나드는 정문이다. 왕은 공식적인 거둥을 협양문 앞에서 시작하고 끝냈다. 이는 협양문이 창덕궁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협양문이 처음 설치된 시기를 창덕궁의 창건과 같은 시점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협양문은 창덕궁의 중심 영역에 있는 문으로 소실과 재건의 역사는 창덕궁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협양문은 희정당의 남쪽, 승정원의 동쪽에 있다. 그 앞쪽으로는 넓은 공터가 있어서 내전에서 나온 왕은 여(轝)를 타고 숙장문(肅章門)까지 간 다음 연(輦)을 갈아타고 궁궐 밖으로 나갔다. 궁궐로 돌아올 때는 반대로 숙장문에서 여로 갈아타고 협양문 앞에서 내려 시위하는 신하들의 지송을 받으며 내전으로 들어갔다.

일제 강점기에 인정전 동쪽의 승정원 일대 및 내전 개조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해당 지역이 훼철되었는데 협양문도 이때 같이 훼철되어 현재는 빈터로 남아 있다.

형태

협양문은 현재 실물이 남아 있지 않으며, 「동궐도(東闕圖)」를 통해서 그 형태를 추정할 수밖에 없다. 「동궐도」에 그려진 협양문은 4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사주문(四柱門)으로 좌우 행각보다 높이 설치된 솟을대문이다. 지붕은 맞배 기와지붕으로 용마루에는 용두를 설치하여 내전 합문에 걸맞은 격식을 보여 준다.

관련사건 및 일화

협양문은 창덕궁의 합문이었는데, 왕이 창경궁이나 경희궁으로 이어했을 때에는 합문이 다른 곳으로 바뀌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왕의 이어 장소는 당대에 관직을 맡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쉽게 알 수 없었다. 1796년(정조 20)에 정조는 주로 창경궁의 환경전(歡慶殿)에 머물면서 빈양문(賓陽門)과 집현문(集賢門)을 합문으로 삼았다. 그런데 새로 벼슬길에 나온 사관(史官)이 창덕궁의 협양문이 합문이라고 생각하여 대기하였다가 정조가 창경궁에 머무른다는 사실을 알고 그곳으로 서둘러 옮겨 가면서 땀을 흘리고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일이 잦았다. 순조 때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자 순조는 내각(內閣)과 승정원을 빈양문 근처로 옮기는 조처를 취하기도 했다(『정조실록』 20년 5월 25일)(『순조실록』 15년 12월 14일)(『순조실록』 21년 3월 4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내각일력(內閣日曆)』
  • 『홍재전서(弘齋全書)』「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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