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화당(咸和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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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향원지 남쪽에 있는 침전 일곽.

개설

함화당과 집경당(緝敬堂)은 흥복전(興福殿) 북쪽, 향원지(香遠池)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1876년(고종 13)의 화재로 소실된 경복궁의 내전 일곽은 1888년(고종 25)부터 재건되었는데 그 공사가 마무리 되고 나서 1890년(고종 27)에 함화당과 집경당, 주변의 행각을 지었다.

위치 및 용도

이 전각의 용도는 「함화당상량문(咸和堂上樑文)」에 적혀 있듯이 침전이다. 당시에 고종과 명성왕후(明聖王后)는 주로 건청궁(乾淸宮)에서 지냈는데, 함화당이 완공되자 이곳과 건청궁을 번갈아 사용했다. 1892년(고종 29)부터는 함화당에서 신하와 정무를 논하고 외국 공사를 접견했다(『고종실록』 29년 8월 1일).

집경당에서는 주로 진강(進講)을 했으며 준공 직후인 1890~1891년(고종 28) 사이에 왕실의 장서와 서화를 수장하였다. 집경당에 수장했던 장서는 신무문(神武門) 안쪽에 집옥재(集玉齋)가 완공되자 그곳으로 옮겼다. 애초 집경당은 서화 수장을 목적으로 지은 것은 아니며, 관문각을 새로 짓는 동안 건청궁 관문각에 있었던 서책을 임시로 수장했던 것이다.

변천 및 현황

2005~2006년에 함화당과 집경당 주위의 행각 터를 발굴 조사한 결과, 「북궐도형(北闕圖形)」에 그려져 있는 행각지 아래 층위에서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의 내용과 일치하는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이전에 있던 건물은 일(日)자형의 똑같은 건물 3동이 나란히 있었는데, 서쪽의 건물부터 춘희당(春凞堂), 보광당(寶廣堂), 영훈당(永勳堂)이다. 이 세 건물은 흥복전의 후행각이며 그 용도는 불분명하다. 이 중에서 영훈당은 그대로 두고 춘희당과 보광당을 헐고 그 자리에 함화당과 집경당을 지었다.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의 전각이 헐려 나갈 때 함화당 일곽은 자경전(慈慶殿)과 함께 총독부(總督府) 박물관의 사무실로 쓰였기 때문에 철거되지 않고 남을 수 있었다. 1924년에는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가 조선민족박물관을 개관하여 도자기 등을 전시하고 연구하기도 하였다. 함화당과 집경당 사이의 담장과 주변 행각은 이미 1930년대 이전에 철거되었으며 2008년에 함화당 일곽의 행각을 복원했다.

형태

함화당과 집경당은 동·서·남쪽에 행각을 두고 있으며 함화당은 내·외행각을 갖추고 있었다. 외부에서 이곳으로 진입하는 동선은 경회루의 동쪽 변을 따라 만시문(萬始門)과 진거문(辰居門)을 지나고 함화당 서쪽의 옹화문(雍和門)을 통해 함화당의 서행각으로 출입하도록 되어 있다. 함화당과 집경당은 3칸의 복도로 연결되어 있고 두 건물의 마당은 담장으로 구분되었다. 담장에는 홍예소문[월문]을 설치하였다.

집경당은 중앙에 대청이 3칸 있고 좌우에 대칭으로 방이 2칸씩 있는 침전의 기본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서쪽 온돌방의 북쪽으로 4칸의 침방이 붙어 있다. 양 측면에는 누마루를 설치했는데 서쪽의 누마루는 전면으로 2칸 돌출하여 행각과 연결되었다. 함화당과 집경당은 굴도리에 소로수장으로 소박한 모습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함화당은 건립 이후 1892년부터 신하를 만나 정사를 논의했던 장소이며 갑오개혁이 있던 1894년(고종 31) 6월 이후에는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외국 공사를 만났다(『고종실록』 31년 6월 21일). 고종이 지은 명성왕후 지문(誌文)에 의하면, 갑오개혁 직전인 1894년 6월 21일,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지휘하는 일본 군사가 경복궁에 난입하여 경복궁을 점령할 때 고종과 명성왕후는 함화당에 머물고 있었는데 고종이 건청궁으로 피하라고 하자 곧 되돌아와 이곳에 남아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역적들의 칼날을 늦추어 놓겠다고 하며 피하지 않았다고 한다(『고종실록』34년 11월 22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하정집(荷亭集)』「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 국립문화재연구소, 『경복궁: 함화당·집경당 행각지』,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 황정연, 「고종연간 집경당의 운용과 궁중 서화수장」, 『문화재』제40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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