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새(擺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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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조선으로 파견되어 종군한 명나라 장수.

개설

파새는 1597년(선조 30) 8월 흠차통령선대초모이병유격장군(欽差統領宣大招募夷兵游擊將軍)도지휘첨사(都指揮僉事) 직함을 가지고 조선에 입국했다. 파귀(頗貴)·해생(解生)·양등산(楊登山)과 마찬가지로 몽고 출신의 장수였고, 이들은 모두 용맹을 떨쳐 사장(四將)으로 불렸다. 파새는 네 장수 가운데에서도 가장 용맹이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울산의 도산성 전투에서 조총에 피격된 뒤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가계

활동 사항

1597년(선조 30) 일본군의 재침으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에서는 경리(經理)양호(楊鎬), 총독(總督)형개(邢玠), 제독(提督)마귀(麻貴) 등으로 하여금 조선으로 출병하게 하였다. 파새는 이해 8월,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서 마병 3천 명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파새가 들어왔을 때는 이미 총병양원(楊元)이 남원성에서 패전한 시점이었다. 선조는 19일에 파새의 거처를 방문하여 접견례를 행하였다. 선조는 양원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주례(酒禮)를 행하지 않고 다례(茶禮)만을 행하였다(『선조실록』 30년 8월 19일).

일본군이 남원을 함락한 여세를 몰아 급속히 북상하자, 경리양호와 제독마귀는 부총병해생(解生)으로 하여금 우백영(牛伯英)·양등산(楊登山)·파귀(頗貴) 등을 이끌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파새는 이들의 뒤를 따라 입국하여 전장으로 향했다. 파새는 직산의 소사평(素沙坪)에서 벌어진 전투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았지만, 중로에서 군대를 이끌고 2차 전선을 형성하여 지원하였다(『선조실록』 30년 9월 9일) (『선조수정실록』 30년 9월 1일). 또 파새는 중군(中軍)팽우덕(彭友德), 유격시등과(柴登科)와 함께 일본군의 잔병을 추격하여 금강(錦江) 일대에서 격파하고 155개에 달하는 수급을 획득하였다. 파새는 직접 네 명의 일본군을 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들의 활약으로 청주와 충주 일대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모두 철수하였다(『선조실록』 30년 9월 20일).

명군 장수들은 전투를 마치고 경성에 올라와 선조를 접견할 기회를 맞았다. 이 자리에서 파새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모진 고생을 한 자신에 대한 대우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의사를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선조는 수많은 명의 관원을 접대하면서 몸에 병이 걸려 있었는데, 파새는 이러한 속사정을 몰랐다(『선조실록』 30년 9월 22일). 선조는 명 장수들에 대한 접대를 계속해서 시행했고, 9월 26일에 파새를 접견하여 위로하고 예단을 주었다(『선조실록』 30년 9월 26일).

파새는 1597년 10월에는 다시 남하하였다. 직산 전투에서의 승리로 일본군의 기세는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전라도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경리양호와 제독마귀는 부총병이여매(李如梅)로 하여금 직산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던 파새, 파귀 등 네 명의 장수와 군사를 파견하였다(『선조실록』 30년 10월 6일) (『선조실록』 30년 10월 7일). 같은 해 11월 한양으로 돌아온 파새는 다시 선조의 접견을 받았다(『선조실록』 30년 11월 16일).

1597년(선조 30) 12월, 조·명연합군은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을 공격하였다. 도산성은 당시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쌓은 왜성(倭城)으로 매우 견고했다. 조·명연합군은 성의 북쪽에 지휘부를 두고, 여러 장수를 배치하여 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파새는 이여매와 강변에서 서생포의 왜적을 차단하고, 조승훈(祖承訓)과 파귀는 부산 방면을 방어하여 인근 지역 일본군의 지원을 차단하고자 했다(『선조실록』 31년 1월 3일). 이와 같은 작전으로 조·명연합군은 도산성의 일본군을 곤경에 몰아넣었지만,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결국 인근 지역의 일본군이 출동하여 구원하는 사태가 전개되자 조·명연합군도 포위를 풀고 후퇴하였다.

파새는 후퇴 과정에서 일본군과 접전하며 엄호하는 역할을 맡았고, 이후 물러나 안성에 주둔하였다(『선조실록』 31년 2월 3일) (『선조실록』 31년 2월 18일). 조선은 승전에 관한 주본(奏本), 즉 중국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제독마귀 휘하에서 큰 전공을 세운 파새 등의 공로를 누락시켰다 하여 외교적인 문제에 직면하기도 했다(『선조실록』 31년 2월 20일) (『선조실록』 31년 2월 20일).

파새는 이 시기에 군중에서 죽었다. 『상촌선생집』에는 그가 병으로 죽었다고 기록하였으나, 실제로는 도산성 전투에서 일본군의 조총에 피격되었기 때문이다(『선조실록』 31년 4월 13일). 파새는 조총에 피격된 이후에 즉사하지는 않았고, 치료 중에 사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해 3월 파새의 죽음이 전해지자 조선에서는 조시(朝市)를 27일부터 28일까지 이틀간 열지 않는 조치를 취하였고, 4월에는 선조가 직접 가서 조문하기도 했다. 예조에서는 이후에 유격 이상의 명 관원의 죽음에는 같은 예를 적용하기로 결정하였다(『선조실록』 31년 3월 27일) (『선조수정실록』 31년 3월 1일).

파새는 도산성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으며, 경리양호가 회군하려고 할 때에는 결전을 청하는가 하면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양호의 말 앞에 가로누워 노래를 지어 부르며 비평하였다고도 전해진다.

참고문헌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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