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진(兎城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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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양덕현에 설치하여 첨사가 관할하던 진보.

개설

토성진은 평안도 남변(南邊)에 위치하여 함경도·황해도와 접경을 이루었던 양덕현에 설치된 진보이다. 양덕현은 1396년(태조 5) 고려의 양암(楊岩)과 수덕(樹德) 두 진을 합쳐 만들어졌고, 1413년(태종 13)부터 현감이 파견되었다. 조선초기 양덕현은 호구수가 325호(戶), 952구(口)에 불과한 작은 군현이었다. 변방과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군사시설도 설치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후기 숙종대에 평안도 군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양덕현에도 첨사가 관할하는 토성진이 설치되었다. 토성진은 맹산(孟山)에서 양덕으로 내려가는 교통 요충지에 설치되어 주로 정보 전달이나 도로 방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위치 및 용도

양덕현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 120리(약 47㎞)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서쪽으로는 평안도 성천군(成川郡), 남쪽으로는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동쪽으로는 함경도 영흥군(永興郡)·고원군(高原郡)·문천군(文川郡), 북쪽으로는 평안도 맹산군(孟山郡)이 자리하였다. 세 도(道)의 접경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토성진은 도로 방어의 요충지였다. 토성진의 앞으로는 오강(吳江)이 흐르고 있었고, 뒤로는 한미산(寒眉山)이 서 있었다.

토성진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대로를 통해 내려오는 외적을 방어하고 감시하는 것이었다. 평안도의 진보가 대부분 강변 7읍에 소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토성진의 입지와 첨사진이라는 위상은 다소 의외일 수 있다. 조선 초기 국경지대가 불안할 시기에는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에 진보를 집중하여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17세기 후반 북방 정세가 안정되면서부터는 강변 방어 못지않게 내륙의 요충지 방어도 중시되었다. 진보는 외부의 적을 방어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내란이 발생했을 때 도성으로 진격하는 적군을 도로에서 지연시키는 역할도 할 수 있었다. 토성진은 대로변의 교통 요충지에 위치하면서 각종 정보 전달과 운송 등을 지원하였고, 내지에 침입한 적을 차단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변천 및 현황

토성진은 조선 후기에 신설된 진보이다. 1677년(숙종 3) 양덕현 토성 지역에 둔전을 설치하고 소모별장(召募別將)을 파견하여 경영을 시작하였다. 3년이 지난 1680년(숙종 6) 둔전에 백성들이 모이고 농사가 자리 잡자 진을 설치하고 첨사를 파견하였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18세기 중반 토성진에는 첨사(僉使) 이하 약 419명의 군병이 소속되어 있었다. 18세기 후반에는 매년 쌀로 환산했을 때 약 245석의 재정을 운영하다가 정조 후반 약 50석이 절감되었다. 토성진은 1841년(헌종 7) 혁파되었고, 진에서 관리하던 환향(還餉)은 양덕현에 소속시켰다(『헌종실록』 7년 7월 15일).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
  • 『해동지도(海東地圖)』
  • 강석화,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압록강변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4,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고승희,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도로 방어체제의 정비」, 『한국문화』34,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문광균, 「18세기 강계지역 공삼제의 운영과 변화」,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 이철성, 「17세기 평안도 ‘강변 7읍’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13, 고려사학회, 2002.
  • 임성수, 「18세기 평안도 진보재정의 운영과 변화」, 『한국사학보』46, 고려사학회, 2012.[[분류:평안도 양덕현(陽德縣) / 대한민국 ->대한민국]][[분류:조선시대 ->조선]][[분류:조선시대 ->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