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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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자손의 태(胎)를 묻을 태봉을 찾기 위해 지방에 파견한 임시 관원.

개설

왕실 자녀의 태를 묻기에 적당한 좋은 땅을 찾기 위해 지방으로 파견한 임시 관원을 가리킨다. 조선전기에는 평상시에 태실증고사를 파견하여 좋은 땅을 미리 선정하도록 하였다. 태실증고사는 풍수지리에 전문적인 식견을 지닌 대신 가운데 1명을 임명했는데, 왕은 태실증고사가 지방으로 떠날 때 직접 전송하기도 하고, 말이나 안장, 옷이나 신발 또는 약품 등의 물건들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태실증고사는 관상감에 속한 상지관(相地官)과 함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에 위치한 명당을 찾아다니다가 태봉으로 적합한 장소를 찾으면, 그 지형을 그린 산수 형세도 또는 태실산도(胎室産圖)를 왕에게 직접 바쳤다.

담당 직무

평상시에 파견되는 태실증고사의 주요 임무는 종사관, 상지관과 함께 전국 각지를 다니며 왕실의 태봉으로 삼기에 적합한 명당을 찾는 것이었는데, 대체로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지역의 땅을 살피고 돌아왔다.

태실을 새로 조성할 경우에는 태실도감을 따로 설치하였다. 이때에도 태실증고사를 임명하여 일정 기간 지방에 파견하였다. 태실증고사는 왕실의 태봉으로 적합한 땅을 찾으면, 그 땅의 산수 형세도를 제작하여 왕에게 직접 바쳤다.

1418년(세종 즉위) 8월 14일에는 예조에서 세종의 태실을 조성하기 위해 태실도감을 설치하도록 청하였고, 8월 29일에는 전 대제학 정이오(鄭以吾)를 태실증고사로 임명해 지방에 파견하였다. 정이오는 경상남도 진주의 속현인 곤명(昆明)에서 태실에 적합한 땅을 찾아 그해 10월 25일에 태실산도를 왕에게 바쳤다. 세종의 태봉으로 할 만한 곳을 찾기 위해 지방에 약 2개월 동안 체류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태를 특별하게 인식했을 뿐 아니라 태를 묻는 일도 신중히 하였다. 왕실에서는 출산 후에 배출되는 태를 잘 보관했다가 좋은 땅에 태실을 조성하여 안치하였다. 조선전기에는 평상시에 미리 태실을 조성할 만한 좋은 땅을 찾아서 후보지를 세 등급으로 나누어 장부에 기록해두었다. 태봉 후보지는 태의 주인이 왕위 계승자인지의 여부와 적서 여부에 따라 등급을 나누었다. 원자와 원손 같은 왕위 계승자는 1등 태봉, 왕비의 소생인 대군과 공주는 2등 태봉, 후궁의 소생인 왕자와 옹주는 3등 태봉 가운데서 선정하여 태를 묻도록 하였다.

중종대에 이르러서는 태실증고사를 지방에 파견하는 데 따른 백성들의 폐해가 심하다는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가능하면 한양에서 가까운 경기도에 태실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태실증고사를 따로 파견하지 않고, 외람된 행동을 하지 않을 상지관을 가려 뽑아 해당 도의 감사와 함께 다니며 태실에 적합한 장소를 선정하게 하였다(『중종실록』 12년 11월 23일). 그러나 1520년(중종 15)에는 다시 이행(李荇)을 태실증고사로 임명해 지방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 뒤 선조대에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관상감에 보관해두었던 태봉 관련 기록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 그에 따라 태봉으로 합당한 곳을 미리 살펴서 등급에 따라 장부를 만들어두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때 선조는 태실증고사를 별도로 임명하지 않고 관상감에 소속된 지리학 관원에게 그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선조실록』 35년 6월 25일). 이후에는 태실증고사를 특별히 지방으로 파견하는 관행은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용재집(容齋集)』
  • 김호, 「조선 왕실의 藏胎 儀式과 관련 儀軌」, 『한국학보』 29-2, 일지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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