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벽(治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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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喪)에 사용할 내관(內棺)을 장식하는 것.

개설

치벽은 벽을 꾸민다는 말로서, 벽은 곧 관을 가리킨다. 왕의 관곽은 별도로 내재궁(內梓宮), 외재궁(外梓宮)이라 했다. ‘벽(椑)’은 칠을 견고하게 하여 만든 것이 벽돌 같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관(棺)을 살아생전에 미리 만드는 것은 장수하기를 바라는 효자의 도리를 행하는 것이지 흉사를 대비하는 것이 아니다. 왕이 승하하면 장생전(長生殿)에서 미리 만들어놓은 재궁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사용했다.

내용 및 특징

『세종실록』 「오례」에 의하면, 재궁의 장식은 공조(工曹)에서 담당하였다. 벽을 만들어 안팎을 꾸미고, 벽 안의 사방은 홍릉(紅綾)을 붙이고 네 모퉁이는 녹릉을 붙였다. 바닥에는 출미(秫米)를 태운 재로 조성한 회를 4촌 두께로 깔았다. 칠성판을 놓고, 판 위에는 홍릉으로 만든 욕석을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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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궁은 장생전에서 왕이 즉위하는 해에 제작을 시작했다. 즉위하자마자 재궁을 제작하는 이유는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재궁의 안팎에는 각각 칠을 100번 한 뒤에 해마다 한 번씩 칠을 해서 아직 완성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재궁의 재질은 황장목(黃腸木)이다.

변천

재궁은 장생전에서 제작한 여럿 중에서 선택하여 썼다. 그 절차의 예를 들어보면, 장생전의 제조(提調)와 낭청(郞廳)이 장생전에 회동하여 전 안에 봉안한 내재궁을 봉심했다. 보관 중이던 8(部) 중에서 이들은 우(雨) 자, 노(露) 자, 등(騰) 자 재궁으로 3망을 갖추어 입계하였다. 왕은 수망인 우자 재궁으로 쓸 것을 하교하였다. 제조와 낭청 3원은 우자 재궁을 받들어 토우(土宇)에 봉안하고 소합주(蘇合酒)로 연정(鍊正)한 다음, 다음 날 연정한 곳을 봉심하고 나서 길일과 시를 택해 가칠을 했다.

가칠할 때에는 2품 이상과 육조(六曹)·양사(兩司)의 장관(長官), 승지(承旨), 사관(史官) 등이 입시했으며, 백관은 빈전 뜰에 모여 곡을 했다. 은정 위에 그리고 칠포를 쓴 다음에 여러 번 칠을 했다. 현종 국상 때에는 칠포(漆布)를 사용하지 말도록 조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1683년(숙종 10)에 재궁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다시 쓰도록 하였다가(『숙종실록』 10년 3월 18일), 영조 연간에 다시 쓰지 못하도록 했다. 가칠의 횟수는 일정하지 않은데, 보통 30번 이상이었다.

보관 중인 재궁은 내외의 길이와 너비, 높이가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시신은 신장의 차이뿐 아니라 염습으로 두텁게 옷을 입힌 상태이므로 소렴이 끝나자마자 전체 치수를 쟀다. 그리하여 재궁의 치수가 모자랄 경우에는 부판을 대어 늘리기도 했다.

관 안에는 1720년(숙종 46)에 출회의 두께를 1치 1푼 더 늘려 깔았다. 그리고 소두(小豆) 곧 붉은팥을 넣어두었는데, 이는 사특한 기운을 물리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오색낭(五色囊)을 넣기도 했다(『숙종실록』 46년 6월 12일).

의의

효자는 어버이의 시신이 혹시 훼손될까 염려하는 마음이 각별했다. 그리하여 이를 방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습기와 벌레가 전혀 침투할 수 없는 완벽한 시설을 갖춘 관곽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또한 관 내부는 평시의 안락함과 내세의 안녕을 기원하는 상징을 담았다.

참고문헌

  • 『정조국장도감의궤(正祖國葬都監儀軌)』
  • 임민혁 역주, 『주자가례』, 예문서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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