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비(斥和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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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고종 8)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개설

1866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며, 그들과 교역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내용의 글을 반포하여, 서양의 침략에 강력하게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였다(『고종실록』 3년 9월 11일). 그 뒤 1871년 미국이 조선을 침략한 신미양요(辛未洋擾)를 물리친 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반침략 투쟁을 더욱 강력히 전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 종로 네거리, 경기도 강화, 경상도 동래군·함양군·경주·부산진 등을 포함한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그 비석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12자가 큰 글자로, 그 옆에 “우리의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가 작은 글자로 각각 새겨져 있다(『고종실록』 8년 4월 25일).

연원 및 변천

척화비는 1882년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이 틈을 탄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었다. 그중 서울에 세워졌던 척화비는 1882년 8월 종로 보신각 부근에 묻혔다가, 1915년 6월 보신각을 옮길 때 발굴되어 경복궁에 보관되었다. 부산진에 건립된 것은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에 있는 용두산 공원 내에 옮겨 세워져 있다. 경상도 함양군 함양읍과 안의면 옛 면사무소 안에도 각각 1구씩 보존되어 있다.

형태

비석의 높이는 서로 차이가 있어 부산의 것은 1.8m인 데 비하여 함양군 함양읍의 것은 1.2m이다. 그러나 너비는 대체로 40~45㎝이고, 두께는 대체로 25㎝ 정도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귀부(龜趺)와 이수(賂首)를 갖추지 않은 통비(通碑)이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대원군이 서양에 대하여 반침략 투쟁을 천명한 것을 쇄국정책으로 보는 기존의 통설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연구가 나오고 있다. 쇄국정책은 그가 추진한 여타의 부국강병 정책과 모순된다는 것이다. 척화비에는 이 시기에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정치·군사적 침입으로부터 조선의 자주권을 지키려는 의지가 드러나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문화유적총람』 중,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77.
  • 『서울육백년사-문화사적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7.
  • 김원모, 『근대한미외교사』, 철학과현실사, 1992
  • 연갑수,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 김원모, 「대원군의 대외정책」, 『한국사』 37 , 국사편찬위원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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