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시(贊侍)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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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찬시 |
한글표제 | 찬시 |
한자표제 | 贊侍 |
관련어 | 고종(高宗), 궁내성(宮內省), 근시(近侍), 덕수궁(德壽宮), 순종(純宗), 왕공가(王公家), 왕공족(王公族), 왕세자(王世子), 이왕(李王), 이왕가(李王家), 이왕직(李王職), 이태왕(李太王), 장사계(掌祀係), 조선왕실(朝鮮王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창덕궁(昌德宮), 황실(皇室)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일제강점기 |
왕대 | 일제강점기 |
집필자 | 정욱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찬시(贊侍)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순종실록부록』 3년 12월 30일 |
일제강점기 덕수궁의 고종과 창덕궁의 순종 등 왕공족(王公族)의 시종 역할을 하던 근시(近侍) 직책.
개설
찬시는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제가 만든 직책으로 시종(侍從)과 같은 관리였다. 대한제국 황실은 일제에 의해 왕공족이 되었다. 왕공족은 이왕가(李王家)로서 고종과 순종, 영친왕, 이희공(李熹公), 이강공(李堈公) 등이다. 이들은 한일병합 당시 천황의 조서(詔書)에 따라 대한제국기 황족으로 영위하던 예우(禮遇)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다만 궁내부(宮內府)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이왕직(李王職)이 대신하였는데, 이왕직에 배속된 관리가 찬시(贊侍)였다.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자로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식민지 조선의 공식적인 통치 권력은 천황의 직속이었던 조선 총독이었다. 이후 옛 통치자들인 왕공족도 조선 총독의 관리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조선 총독은 이왕직의 직원 인사와 예산 추인을 관리, 승인하는 권한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구황실 인물들인 왕공족은 식민지 조선의 새로운 지배층이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일본 정부가 이왕가를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이왕직의 관제는 황실령 제34호로 1910년 12월 30일에 발표되었다. 이에 대한제국 시대의 궁내부 업무는 이왕직으로 이관되었다. 1911년 1월에 업무가 개시되면서 대한제국기 궁내부의 모든 직원들은 해직되었고 업무도 정지되었다. 이왕직 관제는 일제강점기 동안 수차례 바뀌었으나 기본 골격은 유지되었다. 이왕직 관제에 따라 장관(長官), 차관(次官), 사무관(事務官), 찬시, 전사(典祀), 전의(典醫), 기사(技士), 속(屬), 전사보(典祀補), 전의보(典醫補), 기수(技手), 참봉이 배치되었다. 장관과 차관은 각각 1명, 사무관은 36명, 찬시는 12명, 전사는 8명, 전의는 6명, 기사는 3명이었다. 속과 전의보는 인원이 정해지지 않았으나 1911년에 속이 85명, 전의보는 7명, 기수는 9명, 참봉은 75명이었다. 사무 분장은 서무계(庶務係), 회계계(會計係), 장시계(掌侍係), 장사계(掌祀係), 장원계(掌苑係) 등의 5계로 구분되었다. 찬시는 그중에서 장시계에 소속되었다. 장시계는 왕공족의 신측(身側), 진료, 음식, 향연, 내인(內人) 등을 관장한다고 하였다(『순종실록부록』 3년 12월 30일).
1911년 창덕궁의 순종 측근에 소속된 찬시는 8명, 덕수궁의 고종에게는 3명, 왕세자는 1명이었다. 창덕궁에 근무하던 이왕직 직원은 사무관 24명, 전의 3명, 속 58명 전의보 4명으로 이에 찬시 8명을 합산하면 모두 97명이었다. 그러므로 창덕궁의 찬시는 창덕궁 소속 이왕직 직원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덕수궁이왕직 직원은 사무관 7명, 전의 2명, 속 20명, 전의보 2명 등으로 찬시 3명을 합산하면 전체 34명이었다. 덕수궁의 찬시도 거의 덕수궁 소속 이왕직 직원의 10%에 달하는 인원으로 창덕궁과 동일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왕세자인 영친왕에게는 찬시가 있었으나 이희공과 이강공 같은 공족에게는 찬시가 배치되지 않았다. 덕수궁과 창덕궁의 찬시 11명과 왕세자인 영친왕의 찬시 1명을 합한 12명은 윤덕영(尹德榮), 김춘희(金春熙), 이필균(李弼均), 이교영(李喬永), 엄주일(嚴柱日), 윤형구(尹逈求), 김황진(金璜鎭), 김영갑(金永甲), 서병협(徐丙協). 이은우(李恩雨), 이성묵(李聖默), 이규원(李圭元)으로 모두 한국인이었다.
담당 직무
고종과 순종의 주변에서 24시간 교대로 근무하면서 신체의 변화에서부터 식사 등 모든 일상생활을 기록하였다. 혹 왕실의 제사나 의례 행사가 있을 때에도 항상 측근에서 사전에 준비하고 이동을 도왔다. 찬시는 모두 한국인들로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외부 행사에서는 신년 인사나 문안 인사, 선물 전달 등을 대신해서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 등에 전하기도 하였다. 또한 왕실의 능원묘(陵園廟)에 대한 이상 점검을 담당했고, 인천항과 부산항에 도착하던 일본 황족과 고위 정부 인사들을 영접하기도 했다. 도쿄에 거주하던 영친왕을 직접 찾아가 문안을 드렸으며, 1917년 순종의 도쿄 방문 시에도 선발대로 파견되어 의식주와 교통 및 의전 행사 등의 전반을 준비하였다. 찬시직은 덕수궁의 고종과 창덕궁의 순종, 영친왕의 생활과 활동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였다.
변천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한 이후에 일본 황실에 대한 예우가 없어지면서 이왕가에 대한 각종 제도들도 사라졌다. 이왕가를 관리하던 이왕직 역시 폐지되면서 찬시직도 없어졌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寧府日記)』
- 『창덕궁이왕실기(昌德宮李王實記)』
- 『이왕직처무규정(李王職處務規程)』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왕실도서해제』 1,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06.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왕실도서해제』 2,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07.
- 김기훈, 「일제하 재일 왕공족의 형성배경과 관리체계」, 부경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 신명호, 「일제하 이왕직과 이왕가 족보」, 『한국학대학원논문집』 11, 1996.
- 신명호, 「덕수궁 찬시실 편찬의 『일기』 자료를 통해본 식민지시대 고종의 일상」, 『장서각』 23, 2010.
- 이승우, 「일제하 일본의 대한제국왕실에 대한 인식과 이왕직의 운영」, 동아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 이왕무, 「1910년대 순종의 창덕궁 생활과 행행 연구」, 『조선시대사학보』 69, 2014.
- 이윤상, 「일제하 대한제국왕실의 지위와 이왕직의 기능」, 『한국문화』 40, 2007.
- 이지선·야마모토 하나코, 「직원록을 통해본 이왕직의 직제」, 『동양음악』 26, 2004.
- 金英達, 「朝鮮王公族の法的地位について」, 『靑丘學術論集』14, 199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