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해소학(直解小學)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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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직해소학 |
한글표제 | 직해소학 |
한자표제 | 直解小學 |
상위어 | 역학(譯學), 한학(漢學) |
관련어 | 『노걸대(老乞大)』, 『박통사(朴通事)』, 사역원(司譯院), 역관(譯官) |
분야 | 정치/인사/선발 |
유형 | 문헌 |
집필자 | 정광 |
저편자 | 설장수(偰長壽) |
간행처 | |
간행년일 | 미상 |
권책수 | 미상 |
사용활자 | 미상 |
표제 | 直解小學 |
소장처 | 원전은 전하지 않음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직해소학(直解小學)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2년 3월 18일, 『성종실록』 14년 9월 20일, 『정종실록』 1년 10월 19일, 『성종실록』 14년 9월 29일 |
조선전기에 사역원의 한학에서 사용한 한어 교재.
개설
『직해소학(直解小學)』은 고려말에 설장수(偰長壽)가 사역원의 한어 교재로 편찬한 책이다. 원래 유교 경전으로 훈몽 교과서였던 『소학(小學)』을 원(元) 대의 공용어인 한아언어(이하 한어로 약칭)로 풀이한 것이었다. 1430년(세종 12) 상정소(詳定所)에서 제학(諸學)의 취재에 출제서를 정하여 보고한 계문(啓文)(『세종실록』 12년 3월 18일)에서 역학 한훈(漢訓, 한학을 말함)과 한이학(漢吏學)의 출제서로 『직해소학』의 서명이 보였다. 또 『경국대전』「예전(禮典)」 ‘역과초시(譯科初試)’ 강서(講書)조에 배강(背講)을 해야 하는 본업서(本業書) 3책으로 『노걸대』·『박통사』와 함께 『직해소학』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역과(譯科) 한학(漢學)의 기본 출제서이며 한어 교육의 기초 교재였음을 알 수 있다. 현전하는 판본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편찬/발간 경위
『직해소학』은 원대의 한어로 송(宋)대에 편찬한 『소학』을 풀이한 것이므로 원본은 고려말에 편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어의 변천에 따라서 명(明)대의 공용어가 된 남경 관화로 이 책을 다시 수정하였는데, 1483년(성종 14)의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이에 앞서 임금이 영접도감 낭청(郎廳)인 방귀화(房貴和)에게 명하여, 두목 갈귀(葛貴)로 하여금 『노걸대』와 『박통사』를 교정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직해소학』도 질정하려고 하니”라는 기사(『성종실록』 14년 9월 20일)가 있어 『직해소학』도 이때에 『노걸대』·『박통사』와 더불어 수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을 거치면서 『직해소학』은 한어 교재로서 적절하지 않음이 밝혀져 다른 한학서로 바뀌었다. 즉, 양란(兩亂) 이후에 간행된 『속대전(續大典)』과 이보다 조금 앞서 간행된 『통문관지(通文館志)』에는 『직해소학』이 『오륜전비(伍倫全備)』로 바뀌었다.
서지 사항
원전이 전하지 않아서 알 수 없다.
구성/내용
『직해소학』은 조선전기에 한어 교육의 기본 교과서였으며 고려에 귀화한 색목인(色目人) 설장수(偰長壽)의 소편이었다. 설장수는 위구르족의 고창(高昌) 사람이었던 아버지 백료손(伯遼遜)이 원나라에 복속(服屬)하였다가 다시 가족을 이끌고 고려에 귀화하였는데, 그때에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온 색목인이었다. 1362년(고려 공민왕 11)에 22세의 나이로 진사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갔고 『직해소학』을 찬술하였다(『정종실록』 1년 10월 19일).
송대 유자징(劉子澄)이 주자(朱子)의 가르침을 받아 지은 『소학』을 원대의 한어로 풀이한 것이지만 원전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역시 위구르인으로 원에 귀화한 관운석(貫雲石)이 유교 경전의 하나인 『효경(孝經)』을 한어로 풀이한 『직해효경(直解孝經)』이 오늘날 전해져서 이를 통해서 『직해소학』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직해효경』은 원대 공용어였던 한어로 『효경』을 풀이하여 이 언어의 모습을 잘 보여 주었다.
『직해소학』은 원대 한어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자료로 기대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전하는 판본이 없다. 아마도 『소학』과 같이 예법(禮法)과 선행(善行)·가언(嘉言)을 교육하는 훈몽서의 하나였으며, 이러한 교육을 통하여 한어를 함께 배우도록 한 교재일 것이다.
『직해소학』은 유교 경전으로서 훈몽서(訓蒙書)인 『소학』을 한어로 풀이한 것이다. 1483년(성종 14) 사행(使行)을 따라온 명나라 사람 두목(頭目) 갈귀(葛貴)는 『직해소학』을 보고 “번역은 매우 좋으나 간혹 옛말이 있어 시용에 맞지 않고 또 관화가 아니므로 알아듣는 사람이 없을 것(『성종실록』 14년 9월 29일)”이라고 하였다. 『직해소학』을 풀이하는 데 사용한 원대의 한어가 이미 명대에는 옛말이 되어 당시 공용어인 남경(南京) 관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정광, 『역학서 연구』, J&C, 2002.
- 정광, 『조선시대의 외국어 교육』, 김영사, 2014.
관계망